학생과 지식인들의 유신 반대시위. 하지만 침묵하는 언론. 침묵하는 언론을 향한 학생들의 분노. 이에 부끄러움을 느낀 몇 사람. 동아일보 ‘해직’ 기자. 상주하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기사를 검열하던 1970년대. 기자 180여 명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다. “어떠한 외부 간섭도 배제, 기관원의 출입, 언론인의 불법 연행 거부 등” - 1974년 10월 24일 며칠 뒤, “이유는 묻지 말라.” 광고주들의 일방적인 광고 해약. 광고 없는 흰 지면이 그대로 나간다. 하지만 흰 지면을 채우는 새로운 광고주 ‘이름 없는’ 시민들. “동아일보 배달원임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 신동지국 배달원 15인 일동 “동아! 너마저 무릎 꿇는다면 진짜로 이민 갈거야.” - 이대S생 그러나 동아일보사는 기구 축소를 이유..
조선·중앙·동아일보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공직자 인선 과정에서 엄격한 기준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는 고위 공직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이 불거져도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동아일보는 자사출신 최시중 씨에 대해서는 예전 비판의 ‘근거’조차 ‘자질’로 평가하기도 했다. 노무현 후보의 언론고문이었던 서동구 씨의 KBS 사장 임명을 반대한 조선일보의 2003년 3월 24일자 사설과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 중 측근’이자 ‘대통령 형님 친구’인 최시중 씨의 방송통신위원장 내정을 보도한 조선일보 2008년 2월 27일 8면 기사를 비교해보자. ▼ http://www.realcjd.net/bbs/view.php?id=politics&page=2&sn1=&divpage=1&sn=off&s..
조선일보는 스스로를 ‘비판언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군사독재 시절 조선일보는 권력에 부역하고 아부했다. 조선일보가 ‘비판신문’이었던 때는 김대중 · 노무현 정부 시절 뿐이다. ▲조선일보 1980 년 8월 23 일. 조선일보는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을 낯뜨겁게 미화 하는 기사를 실었다. http://www.realcjd.net/bbs/view.php?id=politics&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7
조선·중앙·동아일보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공직자 인선 과정에서 엄격한 기준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는 고위 공직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이 불거져도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동아일보는 자사출신 최시중 씨에 대해서는 예전 비판의 ‘근거’조차 ‘자질’로 평가하기도 했다. 노무현 후보의 언론고문이었던 서동구 씨의 KBS 사장 임명을 반대한 동아일보의 2003년 3월 24일자 사설과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 중 측근’이자 ‘대통령 형님 친구’인 최시중 씨의 방송통신위원장 내정을 보도한 동아일보 2008년 2월 27일 1면 기사를 비교해보자. ▼ http://www.realcjd.net/bbs/view.php?id=politics&page=1&sn1=&divpage=1&sn=off&s..
1997년 11월 5일 블룸버그통신이 서울발 기사로 “한국이 국제통화기금에 긴급자금을 요청할지도 모른다”고 보도하자 조선일보는 5일 후인 11월 10일 라는 제목의 사설을 싣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내 외환, 주식, 금융시장의 혼선과 불안정도 여러 복합적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이지만 왜곡된 정보나 루머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임이 분명하다”, “단순한 객관보도나 비판적 분석으로만 보기 어려운 의도적 ‘한국 때리기’의 조짐이 엿보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조선일보는 정부에 “부정확한 인용이나 과장 또는 허위보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할”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앞선 9월 18일 조선일보는 “한국경제 위기 아니다”는 내용의 캉드쉬 IMF 총재와의 인터뷰 기사를 1면에 싣기도 했다. h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