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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 글은 <한 시간 후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 편, 2004)에 게재된 방학진의 '이랬던 조선일보가 1 - 친일편'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방응모의 친일행각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 이듬해인 1938년부터 1945년까지를 이른바 '전시총동원체제기'라고 한다. 이 시기는 사실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많은 인사들이 일본의 강력한 군사력을 실감하며 변절을 하게 되면서 가히 친일파가 양산되는 때이기도 하다.

 그런데 방응모의 경우 조선일보 인수 직후인 1934년 이미 고사포를 기증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의 친일활동은 자발적인 동시에 사업 확장의 필수적인 도구였음이 분명하다. 즉, 그는 사업확장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는지 수많은 친일단체에 적극적으로 가입한다.

 그는 1937년 5월 우가키 총독의 지시로 친일 가요와 시, 가곡 등의 보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선문예회 회원을 시작으로, 1937년 8월 금비녀라도 뽑아 국방 헌금을 내자는 친일 귀족 부인들이 주축이 된 애국금차회 발기인이 되었다.

 또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9월 미나미 총독의 지시로 시국의 중요성과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지도적 지위를 대중들에게 선전할 목적으로 구성된 전선 순회 시국 강연반에 2차로 강연반으로 참석했으며 중일전쟁 1주년을 맞아 그 동안 경쟁적으로 진행되어 오던 각종 단체들의 친일활동을 일사불란하게 조직화할 필요를 느낀 총독부에 의해서 1938년 7월 7일 59개 단체 및 개인 56명이 참가해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 되었다.

 1939년 중국 천진에서 일본이 영국과 무력 충돌하자 6개 신문사가 모여 결성한 조선춘추회 주최의 '배영(排英) 국민대회'에서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는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고, 방응모는 "황군 만세"를 선창했다. 이어 방응모는 1940년 전쟁의 장기화로 후방에 대한 더욱 강력한 전시체제를 이룩하기 위해 한층 강화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 1941년 친일파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임전대책협의회 위원으로 종로 화신 백화점 앞에서 김동환, 이광수, 모윤숙, 윤치호, 이숙종 등과 함께 전쟁채권을 사도록 독려하는 채권가두 유격대 활동을 벌였다.

 또 그는 윤치호를 중심으로 한 흥아보국단과 김동환을 중심으로 한 임전대책협의회를 통합하여 1941년에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이사가 되었으며, <조광>이 참여한 조선문인보국회가 주최한 출전 학도 격려대회에 참여하는 등 그는 이미 일제의 침략전쟁을 선동하는 데 최선두급에 서 있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지 막 반년이 넘었던 1938년 2월 방응모는 일본인 천황주의자 덕부소봉(德釜蘇峰, 도쿠도미 소호)에게 정중한 연하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편지 내용은 아래와 같다.

新年の賀儀 신년 인사

 千里同風先以て高堂各位益御建勝龜齡を加へさせられ珍重る重存候
 천리(千里)나 떨어졌지만 같은 바람 속에 있습니다. 우선 집안 여러분들이 더욱 건승(健勝)하시고, 나이를 더 잡수셨으니 더욱 몸을 보중(保重)할 수 있기를 빕니다.

 拙者方無事加年致候
 저도 이제 무사히 신년을 잘 보냈습니다.

 間乍慮外御省念 福下慰候
 그 사이에 뜻밖의 보살핌을 내려주셔서 위로가 됩니다.

 右御送詞旁年頭の御祝詞を書
 위의 보내주신 말씀 곁에 새해를 축하하는 글을 써 두었습니다.

 餘は永日を期候
 나머지는 후일을 기약하겠습니다.

 不宣
 총총 이만 줄이고, 편지의 형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二月初 方應謨
 2월 초에 방응모가

 蘇峰 先生 机下 
 소봉 선생 궤하

 謹 京城府 朝鮮日報社 方應謨
 삼가 경성부 조선일보사 방응모가

<<조선일보 반민족, 반통일 행위에 대한 민간법정 백서>>(인물과 사상, 2002)


http://www.realcjd.net/bbs/view.php?id=nippon&page=4&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