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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진중권 교수가 트위터에 '정봉주 재판' 관련 글을 쓰면서 트위터 논쟁이 치열했습니다. 진중권 교수는 사법부의 결정이 일정 부분 수긍할 수 있다며, '나는 꼼수다 애청자들'의 정봉주 옹호를 비판했습니다. 한편 딴지일보에는 진중권 교수에 대한 글이 무려 3개나 메인에 장식됐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화제가 된 '정봉주 재판'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돌아보려 합니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영화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에서는 성추행 혐의로 몰린 결백한 피의자가 재판부의 오판으로 인해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재판부가 진실을 밝혀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주인공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처음으로 이해했다. 재판은 진실을 밝히는 곳이 아니다. 피고인이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모아들인 증거를 가지고 임의로 판단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는 이렇게 사법부의 판결이 터무니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법부의 재판에는 '진실'이니 '정의'라는 가치보다는 단순히 법조문에 의지한 판결을 내립니다. 결국 사법부의 판결은 '정의'를 가치로 내세우기 보다는 법조문이라는 틀에 박힌 형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인 것입니다. 

이번 정봉주 판결을 비롯한 사법부의 판결을 제대로 되돌아보려면 위법성을 떠나 과연 정봉주 의원 혹은 일반 시민들의 행위가 '정의'롭지 않았는지, '진실'을 덮어둔 거짓된 행위였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정봉주 의원은 당시 유력한 대선 주자였던 이명박 후보를 맹 공격했습니다. 어쩌면 밝혀지지 않았던 허위사실이 있었을 법한 발언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오류들이 이번 사례에서는 정의롭지 않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명박 당시 후보는 'BBK 관련 논란'에 숱한 거짓말과 변명으로 의혹들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고 객관적인 증거들은 이명박 후보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정봉주 의원의 의혹제기는 상식적으로 합당했으며 다만, 면책특권 뒤에서 하지 않고 기자들 앞에서 발언한 것이 화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이 국회의원에게 면책특권을 부여한 것은 이처럼 밝히기 어려운 의혹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허용함으로써 정의와 진실에 대한 가치를 부여한 것이고, 박근혜 당시 대선후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BBK 관련 의혹'을 제기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정의롭지 않은 일이 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검찰은 'BBK 관련 의혹'과 관련한 가장 중요하고 유력한 피의자인 김경준에 대해 협박과 회유로 수사과정에서조차 공정성과 객관성을 상실하고 수사를 마쳤습니다. 과연 이러한 검찰의 수사와 이 수사를 바탕으로 낸 사법부의 판결을 믿을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멋진 신세계'와 진중권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는 1932년올더스 헉슬리가 쓴 반유토피아적 소설로, 계급사회를 배경으로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제조되는 사회를 나타내는 소설입니다. 이 사회에서는 모두가 행복합니다. 노동은 누구나 즐거워하며 그 누구도 이 사회를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멋진 신세계'는 그야말로 천국(유토피아)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에 순응하지 않은 이 책의 주인공은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쾌락이 아니라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고통을 선택하면서 '자유'를 얻습니다.

진중권 교수는 이 사회의 문제점을 가장 적나라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봉주 재판'을 신뢰하는 그의 비판주의 시각은 우리가 그동안 '친일파' 토론, 100분토론에서의 '대구 밤문화' 등에서 진중권 교수에게 느꼈던 날카로움 보다는 그의 편집과 아집을 느끼게 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정봉주 의원과의 인연(?)때문일 것이고 둘째, 소설 '멋진 신세계'와 비슷한 우리나라 사법부의 판결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논지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설명했듯 사법부의 판결은 '정의'와 '진실'을 대변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차가운 머리 보다는 뜨거운 머리가 진실에 더 가까이 갈 수도 있습니다.


지식인의 오류

'지식인의 오류'라는 말은 아마 없을 겁니다. 제가 명명한 것이니까요. 많이 배우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분들은 오류가 적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모든 논리는 법치주의라는 말에서는 허물어집니다. 가장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집단들이 가장 합리적인 이상향을 그린 말이니까요. 하지만 이 법치주의에서 히틀러의 나치즘이 최초로 탄생합니다.

결론은 법을 만들고 법에 저촉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정의'에 목마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소설 '멋진 신세계'에 그려진 모두가 행복한 완벽한 사회가 과연 정당한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행위가 위법했을지라도, 그의 행위과 과연 정당하고 '정의'로웠는가를 다시 따져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의'에 대한 시민들의 욕구가 더욱 절박함을 드러내는,
영국 출신 베테랑 변호사 브라이언 해리스의 말로 글을 마칩니다.

"법률가들은 거의 모두 '오로지 재판이 공정하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에만 관심을 갖고, 법을 모르는 보통 사람들은 '죄 있는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고, 죄 없는 사람은 풀려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