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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왜 볼드모트가 되었는가

- 영화는 영화 자체로만 봐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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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이 개봉 2주 만에 600만 관객을 돌파하며 1000만 관객은 기정사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영화 '변호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 길을 걷게 했던 부산의 학림 사건(부림 사건)을 모태로, 실존했던 한 고졸 변호사가 사회참여로 나아가는 성장기를 영화를 통해 그리고 있습니다(영화 '변호인', '안녕들 하십니까'에 답하다).

 

한편, 영화가 흥행을 이어가자 관심이 집중되면서 때 아닌 감상평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글에서는 논쟁이 되었던 이동진 씨와 허지웅 씨의 감상평과 함께 전부터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이야기하지 못했던 영화 '디 워' 이야기까지 함께 적어보겠습니다.

 

 

영화는 영화 자체로만 봐야할까?

 

이동진 씨의 변호인 리뷰는 늘 그렇듯 차분하고 읽기 쉽고 독자를 배려하는 리뷰였습니다. 이동진 씨의 정제되고 담담한 감상평을 좋아하던 독자들은 이 감상평에 만족했습니다. 반면 영화 변호인이 허구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지만 실재했던 부림사건을 모티브로 했고, 실존인물인 노무현 전 대통령과 피해자를 다루고 있을뿐더러, 작년 12월부터 시작된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이라는 시대상을 반영하지 않는 감상평은 제대로 된 감상평이 아니라는 독자들의 비판도 있었습니다.

 

또한 고문 장면들이 과하게 여겨졌다는 문단은, 사회상에 침묵하는 것도 모자라 역사적 사실을 묘사한 것마저도 비판하는 모양새가 되어 열띤 논쟁은 이어졌고, 이동진 씨의 감상평에는 700건이 넘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이동진 씨의 논쟁이 된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략)

 

(이동진 씨 블로그, '변호인' 리뷰 중에서)

 

논쟁의 성격을 보면 결국은 '영화를 영화 자체로만 볼 것인가'와 '영화를 영화 자체로만 봐서 제대로 볼 수 있을까'라는 논쟁으로 좁혀지게 됩니다. 이동진 씨는 전자처럼 영화는 영화 자체로 즐기고 시대상을 반영하지 않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와는 극명하게 제 '변호인' 리뷰는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시대상을 설명하고, 실명을 언급하고, 부림사건을 재조명하고, 노무현을 언급함으로써 가치지향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영화 '변호인', '안녕들 하십니까'에 답하다).

 

어떤 접근이 영화를 더 즐겁고 가치 있게 할까요? 두 접근 모두 틀린 접근은 아닐 겁니다. 때때로 시대상을 이해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작품들이 있고, 시대상을 반영하면 작품의 해석의 폭이 넓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 과도한 시대적 접근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하고, 작품의 엉뚱한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이 논쟁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다양한 생각을 주고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리뷰에 대한 비평이든, 리뷰에 대한 비평의 비평이든 우리는 다양하게 사고할 수 있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유의해야할 점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함으로써 더 다양한 생각과 의견의 교환을 통해 작품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는데 방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베와 노사모가 공생관계?

 

허지웅 씨의 변호인 리뷰는 전체적인 영화의 흐름과 흥미로운 점에 대하여 자세히 적었습니다. 하지만 논란이 된 부분은 리뷰 끝자락의 내용입니다.

 

 

 

"사실 <변호인>을 감상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단점은 영화 외부로부터 발견된다. <변호인>의 단점은 세상에 일베가 있다는 것이다. <변호인>의 단점은 세상에 여전히 비뚤어진 정의감만으로 모든 걸 재단하며 민폐를 끼치는 열성 노무현 팬덤이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공모자이자 공생관계인 저들은 <변호인>과 관련해서 역시 아무런 의미없는 소음만을 양산하며 논쟁의 가치가 없는 논쟁의 장을 세워 진영의 외벽을 쌓는데 골몰할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는 건 피곤한 노릇이다. 그 난잡한 판에 억지로 소환되는 건 더욱 끔찍한 일이다. 이 재미있는 영화가 재미를 찾는 관객들과 불필요한 소음없이 만나고 헤어지길 기대한다."

 

 (허지웅 씨 블로그, '변호인' 리뷰 중에서)

 

 

 

허지웅 씨는 영화 변호인을 감상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영화 외적요인이라고 말합니다. 일베의 평점테러, 변호인 티켓테러 의혹 등 영화 외적 요인이 오히려 영화를 관람하는데 어려움을 주었던 것을 비추어 볼 때 외적 요인이 영화 관람에 영향을 미쳤을 수는 있다고 봅니다. 반면 열성 노무현 팬덤을 '삐뚤어진 정의감만으로 모든 걸 재단하며 민폐를 끼치는', '(일베와) 공모자이자 공생관계'라고 묘사한 점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이에 대해 허지웅 씨는 '썰전'에서 이렇게 해명합니다.

 

 

 

 

 

 

 

 

 

 

 

허지웅 씨의 해명은 납득이 잘 가지 않습니다. 허지웅 씨의 변호인 리뷰가 있기 전 어떤 소모적인 논쟁이 있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이동진 씨의 리뷰에서 논쟁이 된 것은 친노냐 일베냐 문제가 아니라 사회상이 포함되느냐 포함되지 않느냐의 감상평 논쟁정도였고, 일베의 평점테러에도 '비뚤어진 정의감만으로 모든 걸 재단하며 민폐를 끼치는 열성 노무현 팬덤'은 그다지 활약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허지웅 씨가 무엇을 근거로 영화를 핑계 삼아 '노무현 팬덤'을 폄하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극렬한 노무현 팬덤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제에 보였던 흔히들 부르는 노빠들의 극심한 행동이 대표적 사례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논쟁에서의 허지웅 씨의 해석은 순서를 뒤바꾸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빠들이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영화를 보며 노무현을 떠올리고 추억한 많은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허지웅 씨의 소모적이고 쓸데없는 폄하를 통해 논쟁을 부추기는 리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런 의미없는 소음만을 양산하며 논쟁의 가치가 없는 논쟁의 장을 세워 진영의 외벽을 쌓는' 행위를 통해 감상을 방해할 것을 비판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소모적인 논쟁으로 변호인의 감상을 방해한 것은 허지웅 씨 본인의 글이었습니다.

 

구성애 씨는 청소년들이 연예인들을 쫓아다니는 행위가 긍정적으로 보면 성적 에너지의 건전한 발산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새누리당을 지지하든, 민주당을 지지하든,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든 시민들이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을 지지하고 표현을 통해 정치와 사회에 참여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바람직한 행위입니다. 시민들이 때때로 지지를 넘어선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이분법적이고 폐쇄적인 정치적 지지를 호소하기도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이는 어른들의 희망을 찾는 다른 표현 방법일 것입니다.

 

어버이연합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때때로 공감하기 어려운 주장을 하시지만, 이 또한 사회공동체 일원으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이 조롱하고 비하하고 폄하하는 것보다 정치적 타협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일지라도 이를 폄하하고 차단시키면 대화는 단절됩니다. 상대방이 헤게모니(주도권)를 쥔 권력가가 아니라면, 우리는 누구에게나 '똘레랑스'(관용)를 베풀 수 있습니다.

 

 

노무현은 왜 볼드모트가 되었는가

 

 

 

해리포터 시리즈를 보면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악당 '볼드모트'가 등장합니다. 해리포터의 마법사들은 볼드모트가 두려워 그의 이름을 부를 수조차 없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화와 역사적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이 영화화 됐습니다. 하지만 평론가들 사이에 '노무현'이란 이름은 '볼드모트'가 되어있고, '안녕들 하십니까'의 현시대상을 영화에 대입하면 소모적인 논쟁으로 치부되고, 영화 관람에 반대가 되는 삐뚤어진 정의감이 됩니다. 하지만 제가 본 '변호인'은 '설국열차'만큼이나 정치적이고, '관상'만큼이나 역사적인 영화였습니다. 적어도 이 영화만큼은 시대적 상황과 함께 보고 듣고 느낀다면 더욱더 즐겁게 관람하실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음)

 

심형래 감독의 '디 워' 논쟁이 불이 붙었을 때, 허지웅 씨의 비판에 이어 진중권 씨가 100분 토론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외치며 대중들의 관심을 한 몸에 쓸어 담았을 때, 우리가 귀를 기울였어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김규항 씨입니다. 김규항 씨는 '디 워' 논쟁이 있었을 때 이렇게 답변합니다.  

 

 

 "사실 <디 워> 사태의 시작은 <디 워>를 넘어 <용가리>도 나오기 전이다. 언젠가부터 한국의 영화평론가들이 평론가와 평론가 지망생, 그리고 지식인들끼리 읽는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B급 좌파: 세 번째 이야기>, 152쪽)

 

(프레시안)

 

 

언제부턴가 평론은 대중과 단절된 그들만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대중들의 취향을 경멸하고 조롱하고 폄하하고 냉소합니다. 또한 글쓰기를 업보로 삼고 있는 '먹물'들이자 '지식인'들인 자신들이 항상 옳다고 자신합니다. 이에 대해서도 김규항 씨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들(대중들)은 타인의 취향에 폭력적인 게 아니라 제 취향을 경멸하는 재수 없는 인간들에 반발하는 것이다. 동네 양아치들이 싸우다 파출소에 잡혀가도 '선빵'을 가리는 법이다."(같은 책, 153쪽)

 

(프레시안)

 

 

저는 심형래 감독의 '디 워'를 아직까지 좋아합니다. 단순한 이야기 구조도 좋아하지만, 영화 외적으로 심형래 감독의 코미디언에서 감독으로 데뷔하기까지의 삶의 여정, 영화에 쏟은 열정,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까지의 노력도 영화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즐기는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저는 주로 다양한 시각으로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햄릿'이나 '닥터 지바고' 같은 작품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는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사람들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되고, 반영되고, 투영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극장에서 함께 보는 것이 가장 즐겁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 기대하고, 영화를 집중해서 보고, 영화를 본 후에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다시 찾아보고...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과 사고들이 소통하고 상호작용이 일어납니다.

 

그 과정에서 대중들과 평론가들이 함께 나아가길 바랍니다.

 

 

http://yibumsuk.tistory.com/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