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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초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석궁사건'이 영화화 됐습니다.  '석궁사건'은 고교 수학능력시험의 오류를 밝혔지만 부당하게 재임용 탈락의 수모를 겪은 한 수학교수가 교수 재임용과 관련한 재판에서 사학재단의 손을 들어준 사법부의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석궁을 들고 담당 판사를 찾아가 위협한 해직 수학 교수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실제 이야기 영화 '부러진 화살'은 배급사 문제 등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개봉했고, '부러진 화살'은 개봉 이틀만에 10만 관객을 돌파하며 의외의 흥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영화 '부러진 화살'의 실제 이야기는 MBC 'PD 수첩'(2008-03-25)(클릭)을 통해 이미 방영된 바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인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수학과)는 배우 안성기 씨(김경호 역)가 맡았고, 박훈 변호사는 배우 박원상 씨(박준 역)입니다. 석궁테러의 피해자 박홍우 부장판사는 배우 김응수 씨(박봉주 판사 역)가,  보수꼴통 판사로 그려진 신태길 부장판사는 배우이자 정치인인 문성근 씨(신재열 판사 역)가 맡았습니다.

영화 '부러진 화살'과 실제 이야기 '석궁사건'은 과연 피해자가 실제로 석궁에 의해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한 3가지 의혹을 제기합니다. 첫째, 속옷, 와이셔츠, 조끼, 양복상의 가운데 왜 다른 옷들에서는 혈흔이 발견되는데 옷들 사이의 와이셔츠에는 혈흔이발견되지 않았는지 여부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속옷과 양복상의에 혈흔이 묻었다면 당연히 와이셔츠에 혈흔이 남아야 합니다. 둘째, 담당판사는 왜 증거물(속옷, 와이셔츠, 조끼, 양복상의)에 남은 혈흔과 피해자의 DNA 일치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를 거부했는가 입니다. 셋째, 도대체 경비원 증언에 의하면 촉이 뭉특한 '부러진 화살'이 어디로 사라졌는가 입니다. '과학 수사'를 '증거재판주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 사법부가 증거도 없고 의혹투성이인 이리도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 판결을 용인했는지 의문입니다.


드레퓌스 사건


                                   청년 장교 시절의 알프레드 드레퓌스


"재판장님은 100여 년 전 프랑스 군사재판에서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간 드레퓌스 사건을 알고 계실 겁니다. 당시 재판부는 진범이 잡혔는데도 당국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진실을 은폐한 채 드레퓌스에게 종신형을 선고했지요. 그런데 100년도 더 지난 21세기에 대한민국 사법부에서는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억지재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영화 '부러진 화살' 중에서
 
 
드레퓌스 사건은 1890년대부터 장기간 프랑스를 이념적으로 갈라놓았던 정치적 스캔들이다. 1894년 11월 젊은 유대인 포병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의 군사 기밀을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에 넘겼다는 이유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의 섬에 유배되었다. 2년 뒤 프랑스 육군의 다른 장교가 진범(에스테라지 소령)이었다는 정보가 나타났다. 그러나 군법회의에서는 새로운 증거를 묵살하고 재판 개시 이틀 만에 만장일치로 혐의자를 석방했다. 드레퓌스는 석방되기는커녕 다른 정보 장교가 날조한 문서를 근거로 추가로 기소되었다.

1898년 1월 저명한 소설가 에밀 졸라가 파리의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격렬한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재판이 속개되어 드레퓌스는 파리로 소환되었다. 이후 프랑스 사회는 드레퓌스를 지지하는 자들과 반대하는 자들로 극명하게 구분되었다. 그것은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드레퓌스는 무죄로 판명되어 군대에 복귀했고, 제1차 세계대전 내내 장교로 복무하다가 육군 중령으로 전역했다.
 
(중략)

(한겨레) [조한욱의 서양사람] 드레퓌스 사건(클릭)



프랑스 군사법원은 드레퓌스 사건을 비밀재판을 열어 무기징역을 선고합니다. 만약 드레퓌스에게 죄가 없다면 군부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게 된다고 생각한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여러 가지 거짓 증거를 제출합니다. 재판장은 드레퓌스가 그 증거들에 대해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재판을 끝내 버렸습니다.


끝까지 드레퓌스를 믿어준 인내심 있는 부인 루시 아다마르, 양심적인 군인 피카르 소령, 진실과 정의를 사랑한 작가 에밀 졸라가 없었다면 드레퓌스의 진실이, 프랑스의 정의가 무너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깨달아야 할 점은 재판의 과정은 공정해야 하며, 증거 없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침해를 묵인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드레퓌스 사건의 프랑스 군사법원처럼 진실과 정의를 묵살하고, '사법부에 대한 테러'로 규정하며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혹은 법률가의 지배를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 판결을 내린 사법부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법가사상, 이사와 한비자 (고전으로 보는 법치주의)

법가사상은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사상입니다. 법가는 부국강병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고 최후의 6국을 통일했습니다. (법치주의는) 현실 적합성이 실천적으로 검증된 학파인 셈입니다. 법치란 권력의 자의성(사사로움)을 제한하고 성문법에 근거하여 통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의 공개성과 공평무사한 법치야말로 법치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비자는 동양의 마키아벨리로 불릴 정도로 권모술수를 중시하고 순자의 인의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폄하하며,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법가의 대표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비자는 스스로 권모술수의 희생자가 되어 비운의 생을 끝마칩니다.

마찬가지로 진나라 최대의 공신이었던 이사 역시 기원전 208년(2세 황제 2년) 7월 함양의 거리에서 자신이 제정한 법령에 의해 허리를 잘리는 형벌을 받고 죽게 됩니다. '사기', '이사열전'에서는 이사에 대하여 주공에 비견할 만함에도 불구하고 주살을 면치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정적 과오는 역시 윗사람의 의중을 당자보다 먼저 헤아려 영합하기에 급급했고 스스로 공명정대한 원칙을 견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다시 '정의'를 말한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사악한 조건 또는 부도덕한 관행을 고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있다고 믿지 말라. 그리고 법을 지나치게 믿거나 의존하려고 하지 말라. 처방 차원에서 탄생한 제도는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기 쉬우며, 오히려 탄압의 도구로 사용되기 쉽다."

- 루이스 브랜데이스 대법관(1922)


이사와 한비자 그리고 드레퓌스 사건에서 보듯 공명정대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법치주의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올바르지 못한 법치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시민'입니다. 잘못되고 그릇된 것에 분노하고, 그 분노를 표현하는 과정이 소통이며, 소통을 통해 올바른 것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정의로운 시민,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영화 '부러진 화살'을 통해 공명정대한 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회의 부당함을 느끼시는 시민들이 늘어가기를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