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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85430553

 

 

이 책을 바탕으로 서울 탐방을 하려 했으나 경기도민인 나에게는 너무 어렵다. 서울의 ~동, ~주변... 책 제목이 (서울 사람들을 위한) 권기봉의 도시산책을 바뀌어야 할 것 같다. 나같은 경기도민이나 여행객에게 이 책은 불친절하다. 어디가 어디인지 잘 모르겠고 찾아가는 방법 또는 지도라든지, 여행 일정을 짜기에 어렵다.

 

명성황후를 민비로 표현하는 대목 아쉽다. 조선 시대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은 청주 한씨(6명)지만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한비(韓妃)라는 표현은 없다. 성을 따서 부르는 건 폐비였으며, 복권한 왕비 중에는 중종의 비 신비(愼妃)뿐이다. 왕비를 칭할 때는 존호를 사용해 태조 이성계의 첫 아내인 신의왕후 한씨는 한비가 아니라 절비(節妃), 조선 최고 국모로 손꼽히는 소헌왕후 심씨는 심비가 아니라 공비(恭妃)였다. 물론 이런 존호와 함께 중전, 중궁, 왕비전하, 중궁전하 같은 표현도 같이 썼다.
 

1983년 문교부는 명성황후를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인 1924년 4월2일 동아일보 창간호에 명성황후 호칭이 사용됐지만 1936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삭제 사건 이후 1940년 8월11일 강제 폐간될 때까지 민비라고 표기됐다.

 

이는 일본 왕실에서는 이름과 왕비 합친 자기네 방식으로는 바꾸면서 자연스러운 호칭이 됐다는 설과 민초들은 그가 나라를 망하게 한 주범이라며 민비라고 깎아내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굳어진 호칭이 1983년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것이다. 학자들은 왕비는 임금과 같이 나라의 군주이며 국모이기 때문에 황후의 호칭인 명성황후가 맞다고 주장하고 있다.[각주:1]

 

물론 이외의 내용은 훌륭하다. 역사적 의미와 깊은 성찰을 할 수 있게 구성했다. 주제별로 3쪽을 넘지 않는 설명도 흥미를 유발한다. 이 책은 얻을 것이 많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중심지인 서울 곳곳을 탐구할 수 있게 해주며 역사적 소양과 함께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사고를 돕는다.

 

 

나만의 즐겨찾기

 

14쪽. '부도'의 정체(경복궁). 석가의 진신사리를 모신 것이 '탑'이라면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것은 '부도'라고 부른다. 경복궁의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20쪽. 조국의 현실을 도외시한 작가들이 해방 뒤 대한민국 미술계의 중심을 차지했다. (...) 군사독재나 사회지도층의 부정부패와 같은 부정적인 시대상을 그리거나 사회참여적인 내용을 담아낸 작품은 입선조차 할 수 없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26쪽. 정몽주 동상을 세운 이유(양화대교 북단). 박정희 정권이 애국선열 조상 건립위원회라는 조직을 출범시켜 군인, 독립운동가의 동상을 만드는 사업을 펼쳐나갔다. (...) 오로지 박정희 정권이 지닌 민주적, 절차적, 역사적 정통성의 약점을 덮기 위한 방편이었다.

 

34쪽. 로댕은 영웅을 늘 확신에 찬 사람이 아니라 고뇌하고 번민하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즉 인간 본연의 희로애락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다. (세종대왕 동상과 비교)

 

46쪽. 두 번의 재해석(국립극장). 국립극장은 서울시청 맞은편에 있는 지금의 서울시의회청사가 첫 둥지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박정희 정권에 들어서 지금의 남산 국립극장 터로 이전하게 됐다. 설계를 맡은 이는 이희태 선생으로 경회루를 모티브로 재해석해 국립극장을 지었다. 하지만 노후화와 더불어 내부 공간이 협소한 탓에 이희태 선생의 후학들이 최신 건축 언어로 재해석해 지금의 국립극장이 되었다. 국립극장은 기둥 사이의 수직벽을 투명한 유리로 교체하면서 권위주의적 색채를 빼는 데 성공했고, 소수의 VIP를 위한 귀빈석과 귀빈용 중앙홀을 없앴다. 국립극장은 민주주의와 평등을 담은 장소로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50쪽. 간송미술관. 매년 5월과 10월에만 잠깐 개방한다.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의 작품 등.

 

68쪽. '이상의 집' 그 이면(서촌). 서인 중에서 소론,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필운 이항복, 화가 이중섭, 이상범, 박노수, 시인 윤동주 등. '이상의 집'은 그저 이상이 살았던 '집터'

 

108쪽. 자동차에 밀려난 대한문(덕수궁)

 

114쪽. 역사관으로 재탄생한 을사늑약의 현장(중명전)

 

140쪽. 창덕궁(비원 = 후원)

 

178쪽.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안식처(창덕궁 낙선재). 낙선재 주변에는 순종이 탄생한 관물헌과 순정효황후가 머물던 석복헌, 덕혜옹주가 기거했던 수강재, 낙선재 일곽을 굽어볼 수 있는 취운정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182쪽. 600여 년의 풍파를 견뎌온 문화유산(한양도성). 총길이가 18.6km, 전체 구간 가운데 12km 정도는 성벽과 나란히 걸을 수 있어 역사와 자연을 함께 만끽하기에 제격이다.

 

208쪽. '여우사냥'과 사라진 비석(경복궁 건청궁). 경복궁 안쪽 가장 깊숙한 곳에 건청국이라는 '궁 안의 궁'이 있다. 역대 임금들의 총상화인 어진을 봉안하려 지은 것. 을미사변이 일어난 곳.

 

221쪽.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영은문 철거를 부추긴 것과 굳이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운운하고, 독립문을 묵인한 것은 조선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인 종주국 지위를 청산함으로써 중국의 간섭 없이 조선을 지배할 수 있는 길을 트기 위한 노림수였다.

 

222쪽. 서대문형무소. 보수 계열의 독립운동에만 집중하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조명하지 않고 있음. 전시 공간을 남성에게만 할애하고 여성 운동가들은 이름 석 자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내부자의 과오에는 관대하면서 외부자의 폭력성에만 집중하고 있다. 있는 내용을 애써 외면하는 것 역시 왜곡이다.

 

252쪽. 서울역.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 서있다. 강우규 의사는 제3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의 목숨을 빼앗지는 못했지만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진 인물이다.

 

256쪽. 운현궁.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기거하던 생활공간이자 고종 즉위 이후 섭정을 하던 구한말 정치의 중심과도 같은 곳이다. '노락당'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열린 곳이다. '이로당'은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 씨가 거처하던 안채로 왕궁으로 치면 중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공보문화원(조선황실 동태 감시)과 양관(황실 인사들 회유)

 

264쪽. 경교장(대한민국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 강북삼성병원 자리.

 

322쪽. 정립회관. 한국 최초의 장애인 이용시설. 황연대 전 정립회관 관장의 체취가 남아 있는 공간. 한국 최초의 여성 장애인 의사. 황연대성취상.

 

348쪽. 보신각. "저녁 8시가 되면 보신각종이 울리는데 이것은 남자들에게 귀가시간을 알려주는 신호이며 여자들에게는 외출하여 산책을 즐기며 친지들을 방문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

 

366쪽. 경복궁 향원지. 1887년 이 땅 최초의 발전기를 설치했던 곳이자 백열구를 밝혀 이 땅 최초의 전등을 켠 곳이기도 하다.

 

404쪽. 웨스턴조선호텔.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위해 만든 환구단 터. 소수의 건물만 남긴 채 환구단 시설을 거의 헐어버렸다.

 

 

 

 

 

 

  1. <여주> 명성황후 재조명…시리즈③ “명성황후 시해 진상규명과 일본의 사죄가 있어야 한다” http://www.yeoju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63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