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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득표'는 소용없다. 개표 결과가 51대49면 결국 51이 '당선'이다. 그러다보니 창졸간에 과거 권력이 되는 일도 허다하다. 이들 대개는 절치부심·전전긍긍 세월을 낚으며 4년을 보낸다. 사실상 '정치 백수'라 불러도 무방하다.

원외에 있는 이들을 우리는 '전직 의원'이라 부른다. 19대 총선이 불과 5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이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기대 심리와 뉴타운 역풍을 맞아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전멸하다시피 한 수도권 야권 인사들의 움직임이 눈에 띈다. 지난해 6·2 선거와 지난 서울시장 재선거를 통해 뒤바뀐 민심을 이미 확인했기 때문이다.

19대 총선을 앞두고 국회 '재취업'을 준비하는 원외 인사 중 '뉴 타입'에서 '고전파'까지 눈에 띄는 5인방을 꼽아봤다. 이들의 하루를 쫓다보면,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농담이 우스갯소리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시사IN 조우혜 정봉주 17대 의원(앞)은 "잊히는 게 가장 두려웠다"라고 말했다.

연예인형:내가 제일 잘나가, 정봉주

'서울 노원구 공릉동과 월계동을 지역 기반으로' 하던 한 전직 국회의원이 있었다. 말이 좋아서 전직이지, 아내 생일 때 케이크조차 아내의 지갑에서 카드를 '훔쳐' 사야 했던 정봉주 전 의원의 삶은 궁상스러웠다. 겉으로는 의연한 척했지만 사실 초조했다. "정치인은 잊히는 게 제일 두렵다. 자기 부고 기사 빼고 다 좋아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잖은가. 잊힐까봐, 그게 제일 두려웠다."

제18대 총선 낙선 이후 당에서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 인터넷 홍보본부장 등을 맡아왔지만 갈증이 났다. 정 전 의원은 자신의 '언로'가 되어줄 새로운 미디어에 대해 고민했다. 마침 그의 곁에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와, PD 출신 김용민 전 한양대 겸임교수가 있었다. "서너 번 해보고 반응 안 좋으면 내리자"라고 시작한 팟캐스트 방송 < 나는 꼼수다 > (나꼼수)는, 2011년 대한민국에서 피해갈 수 없는 하나의 '현상'이 됐다.

정 전 의원은 현재 자신의 상황을 네 글자로 설명한다. "전무후무." 심지어 정 전 의원은 기자에게 인터뷰 주제를 바꿔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잠룡들의 사생활, 어떤가?(웃음)"

그의 인기를 단적으로 가늠해볼 수 있는 게 바로 팬클럽 회원 수다. < 나꼼수 > 시작 전 회원 수 2000여 명에 불과하던 그의 팬클럽 '정봉주와 미래권력들(미권스)'은, 11월 말 현재 회원 수 11만7000여 명을 자랑한다(박근혜 의원의 팬클럽 회원 수는 6만5000여 명이다).

늘어나는 인기만큼 일정도 빡빡하다. 차 안에서 자는 게 집 침대에 누워 있는 것보다 더 편한 지경에 이르렀다. 전국 대학생들의 강연 요청은 물론 각 지역 위원장들이 자기 지역에 정 전 의원을 '모시기' 위해 안달이다.

그러나 정 전 의원의 총선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일단 BBK와 관련한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재판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12월22일 판결이 잡혀 있다. 형이 확정되면 10년간 정치를 할 수 없게 된다. 당에서 가장 걱정하는 상황이다. 다른 지역 선거를 도우면서 비례대표로 나가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받았다. 그 자신은 "방사능으로부터 지켜낸" 자기 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할 작정이다.

ⓒ시사IN 조우혜 한·미 FTA 찬반 논란이 뜨거워지면서 최재천 전 의원의 이름이 자주 회자되었다.

전문가형:나는야 공부 벌레, 최재천

11월3일 MBC < 100분 토론 > 'FTA 논란-여기서 끝냅시다' 방송이 나간 직후, 누리꾼들 사이에서 '백토대첩'이라는 이름이 붙은 동영상이 회자됐다. 14분 분량으로 편집된 이 동영상은 < 100분 토론 > 에 패널로 출연한 최재천 전 의원의 발언만 모아 따로 편집한 것이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논리는 명쾌하게 핵심으로 질러 들어갔다. 한·미 FTA 찬반 논란이 다시 한번 한국 사회를 달구는 동안, 그의 존재감은 새삼 사람들에게 각인됐다.

그동안 쌓아온 '내공'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참여정부 시절 여당 의원이었건만, 정부의 '미운털' 되기를 자초했다. 17대 국회에서 한·미 FTA 특별위원이었고, < 최재천의 한·미 FTA 청문회 > (2009년)라는 책도 펴냈다.

그의 사무실 한쪽에는 FTA 관련 자료와 책이 허리께만큼 쌓여 있었다. 페이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두께의 책을 최 전 의원이 펼쳐 보여줬다. 형광펜 표시와 메모가 빼곡했다. 다시금 꺼내 읽고 공부한 흔적들이다. "현역이 아니니까 새로 나온 자료 구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 외교통상위 의원들에게 사정도 하고, 기자들도 통하고, 예전 자료들도 꺼내고…. 얼마 전에는 쌍코(여성 전용 커뮤니티)에서 FTA와 관련해 강의를 해달라고 요청이 왔더라.(웃음)"

그는 유명한 애서가이자 다독가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책에 관한 책'을 내기도 했다. < 최재천의 책갈피-나는 이 책을 이렇게 읽었다 > 라는 제목의 책이다. "얼마 전 출판사(폴리테이아)에 갔는데 편집자가 웃더라. 책이 한두 권씩이지만 꾸준히 나간다는 거다. 정치인 책이 이런 건 처음 봤다나.(웃음)"

지난여름 중앙당에서 활동 보고 감사가 들어왔을 때, 그는 권당 1000쪽에 가까운 지역활동 보고서를 3권이나 만들어 제출해 당직자들을 기함하게 하기도 했다. '기록'은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증거'이다.

진수희 현 의원(한나라당)과는 내년에 '3차전'을 벌일 예정이다. 역대 전적 1승1패. 수도권 민심이 야권으로 많이 기울었다지만, 승부는 아직 가늠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갑·을 두 지역구로 나뉜 서울 성동구는 '합구'라는 변수가 있다. 재개발로 인한 인구 유출 때문인데, 30만명 이하로 인구가 떨어지면 당장 임종석 전 의원과 '집안 싸움'부터 치러야 할지 모른다.

ⓒ시사IN 조남진 김현미 전 의원은 "아줌마를 만나면서 세상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집중형:아줌마를 만나다, 김현미

"40대 낙선은 보약"이라고 했다. 비례대표로 2004년 제17대 국회에 입성했지만, 지역구 선거는 2008년 제18대에 처음 치러봤으니 낙선은 좋은 경험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러나 '김윤옥 여사 명품 시계' 사건으로 인한 송사가 김현미 전 의원의 발목을 잡았다. 법원과 검찰이 있는 서울 서초동을 출퇴근하면서 신나게 놀겠다는 애초의 계획을 접어야 했다. 2010년에야 사면 복권됐다. 2009년 '정치적 아버지'인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1년이 안 되어 진짜 아버지 역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2008년 낙선한 의원 20여 명을 모아 경제 공부를 시작했다. "민주정부 10년의 업적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체감하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서 '개선'에 실패했다. 공부를 하면서 그 답을 찾았다."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한국 최초의 야권연대가 고양시 선거에서 이뤄졌다. 그는 통합의 '산파' 구실을 자처했다.

정치 활동에 기지개를 켜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백수 며느리'였지만 바빴다. 당 지역위원장도 맡고 있던 터였다. 당장 집에 모시고 사는 92세 시어머니를 돌봐줄 요양보호사를 구했다. 그리고 요양보호사 영숙씨와의 만남은 김 전 의원에게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책 속이나 신문 기사에서 볼 수 있는, 말로만 외쳤던 '서민'을 영숙씨를 통해 비로소 체감했기 때문이다.

"선거운동 도와줬던 분들도 '서민'이었는데, 한번도 그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대해서 물어본 적 없다는 생각이 번쩍 들더라. 이를테면 '언니는 월급 얼마 받아?' '몇 시간 일해?' 같은 것들…. 내가 아줌마들 만나면서 세상을 많이 이해하게 됐다. 이제는 아줌마들 만나면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웃음)"

< 강한 아줌마, 약한 대한민국 > (2011년) 책은 그렇게 쓰였다. '88만원 세대'인 청년을 걱정하는 책도, 고령화 시대 노인을 걱정하는 책도 있는데, 아줌마라는 '계급'은 소외돼 있었다. 장관 부인이라도 계급장 떼고 나가면 100만원 버는 게 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줌마의 현실인데 말이다. 가감 없이 그들을 만나고, 그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출판사(메디치) 대표는 "정치인이 저자가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책이다"라고 말했다.

17대 국회 당시 삼성·BBK 등 '저격수'로 악명 높던 그였다. 그는 19대 국회에 입성하면 중앙의 큰 문제보다 근본적인 바닥 문제에 집중하고자 한다. 아줌마가 아줌마를 만나면서 피부로 깨달은 문제들을 입법으로 풀어나갈 계획이다.

ⓒ시사IN 조우혜 민병두 전 의원은 내년 총선에서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과 맞붙게 된다.

고전형:'빌딩치기' 하는 민병두

"민병두처럼만 해라." 19대 총선 출마를 준비하는 '도전자'들에게 한 정치권 인사는 요즘 그렇게 조언한다. 얼마나 지역 바닥을 훑고 다녔는지, 서울 동대문구에 차고지가 있는 택시기사들은 민병두 전 의원이 택시를 타면 미터기조차 켜지 않는다. 민 전 의원이 고사해도 막무가내다. 민병두 전 의원은 '10당9락(하루 10시간 지역구를 돌아다니면 당선하고, 9시간이면 낙선한다)'을 신조로 삼았다. 지역구를 샅샅이 훑고 다니는 '전형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효과가 나타났다. 9월 펴낸 < 병두 생각-복지국가는 시대정신 > 출판기념회 때는 3000명 가까이 몰려들었다.

민 전 의원은 신문기자 출신이다. 열린우리당 창당과 더불어 영입 제의를 받고, 17대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해 전략기획담당을 맡았다. 초선이고 비례였지만, 언론 노출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방선거 대패, 대선 대패…. 당시 여권의 상황은 그야말로 '아수라'였다.

18대에 출마할 지역구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나간다면 책임을 다하는 자리, 가장 어려운 자리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민 전 의원이 몸을 담은 지역구가 서울 동대문을이었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15대 때부터 내리 4선을 한 지역구다. 동대문을 지역은 민주개혁 세력이 1979년 선거에서 이겨본 게 마지막인, 서울 강남 서초보다도 어려운 곳이었다.

선거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제대로' 지역구 밭을 갈아보고 싶었다. 각종 조언이 이어졌다. 17대 때 하던 대로 당직 따위를 맡아 언론 노출도를 높여서 인지도를 쌓으라는 쪽과, 철저하게 밑바닥으로 내려가라는 조언이 맞섰다. 민 전 의원은 후자를 택했다. "대개 정치인들은 잊히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잊히는 것에서 길이 나온다고 생각한 4년이었다."

일단 낙선 인사를 다니는 것부터 시작했다. 낙선 후 두 달 넘게 매일 인사를 다녔다. '떨어진' 민병두가 인사를 다니는 것을 지역 사람들은 처음에 잘 이해하지 못했다. 당선 인사를 하러 온 줄 알고 등을 쓸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른바 '빌딩치기'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주로 보험 영업하는 사람이나, 신문보급소 영업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동대문에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이 흔치 않았다. 대개 5층 정도의 건물을 위층부터 아래층까지 샅샅이 훑었다. 민 전 의원이 인사를 하러 들어가면 "우린 신문 안 봐요"라고 손사래를 치곤 했다. 괘념치 않았다. "불러주지 않는 자리도 그냥 간다. 처음에는 쑥스럽고 창피했는데, 그게 정치인이더라."

내년 총선 역시 큰 이변이 없다면 홍준표라는 '거물'과의 싸움이 예정되어 있다. 민 전 의원은 자신감을 내비쳤다. "지난번에는 크게 졌지만, 이번에는 해볼 만한 싸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사IN 조우혜 내년에 국회 입성을 노리는 노회찬 전 의원의 발목을 잡는 건 '안기부 X 파일' 사건이다.

인맥 협찬형:지역문제 연구소장, 노회찬

"넘어지고, 엎어지고, 멍도 들었다." 진보정치계 '스타'인 노회찬 전 의원이 지난 4년을 표현한 말이다. 민주노동당과의 분당, 진보신당 탈당, 통합연대까지 노 전 의원은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리고 이제야 통합진보 정당의 '건설'을 목전에 두고 숨 고르기를 하는 중이다.

노 전 의원은 오전에는 마들연구소 일을, 오후에는 주로 진보정당 통합과 관련된 일을 논의하며 보내고 있다. 밤에는 전국 각지의 강연과 집회를 다닌다. 서울 노원구의 옛 이름인 마들을 따서 마들연구소를 만든 게 2008년 말. 마들연구소가 주관해 진행한 '명사 초청 월례특강'을 다녀간 사람만 39명이다. 봉준호 영화감독,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박재동 화백, 현기영 소설가, 배우 권해효·김여진씨, 그리고 박원순 서울시장까지…. 다녀간 이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만 보던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에 주민 반응도 좋다.

마들연구소는 이런 특강 외에도 영세 상인 보호 캠페인이나, 뉴타운 문제 개선을 위한 조사 및 활동, '나눔과 돌봄'이라는 자원봉사단까지 운영 중이다. 연구소 활동을 통해 '지역구 관리'라는 덤을 얻는 셈이다.

그러나 노 전 의원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안기부 X파일' 사건이다. 그는 2005년 당시 도청 테이프에서 삼성그룹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것으로 언급된 전·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인터넷에 공개했다가 기소됐다. 지난 10월 파기환송심에서 대법원은 그에게 징역 4월,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노 전 의원은 다시 상고한 상태이다. 최근 이 사건과 관련한 손해배상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그는 "같은 상황을 다시 만난다고 해도, 그때와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노 전 의원은 19대 국회에서 민주노동당·국민참여당·통합연대를 통해 건설될 통합진보 정당이 원내 교섭단체 구성이 가능한 20석 이상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무감어수감어인(無監於水監於人)',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지 말고, 사람 마음에 비친 제 모습을 보라는 이 말을 노 전 의원은 요즘 마음에 새기고 있다.

장일호 기자 / ilhostyle@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