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이 글은 (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 편, 2004)에 게재된 방학진의 '이랬던 조선일보가 1 - 친일편'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 3.1 운동의 사생아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3.1만세운동의 위력을 실감한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통치가 기존의 위압적인 방식으로는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한다. 이른바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대전환하여,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무관 총독제를 문무관 총독제로 전환한다. 이후 조선 총독으로 새로 부임한 총독 사이토(齊藤實)는 '문화의 발달과 민력(民力)의 충실'을 내걸고 본격적인 문화통치를 실시하는데, 조선인 관리의 임용 범위를 넓히는 한편 "언론, 출판, 집회 등에 대하여서는 상당한 고려를 두어 민의 창달에 기할 것"을 천명한다. 이 결과 총독부 정책을 홍보하던 ..
디지틀 조선일보(조선닷컴)는 2005년 5월 2일 영문판에서 동해를 ‘Sea of Japan’(일본해)로 표기했다. 이 기사는 5월 1일 북한이 동해에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내용으로 조선닷컴은 '북한, 일본해에 미사일 발사'(North Korea Apparently Fires Missile into Sea of Japan)라는 제목의 VOA(미국의 소리)방송 기사를 전재하면서 본문은 물론 제목에서도 버젓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했다. * 님께서 2008년 6월 9일 제보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http://www.realcjd.net/bbs/view.php?id=nippon&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
조선일보는 ‘민족지’로서 역할을 하다가 194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폐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전투기 한 대 값이 10만원이던 당시 일제로부터 100만원을 받고 폐간했다. 더욱이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에 실린 ‘폐간사’를 보면, 조선일보는 ‘일제의 동아 신질서 건설의 위업을 성취하는데 협력하고자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힘을 내어 열심히 일했다’며 자신들의 친일 행위를 자화자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도 사주 방응모는 잡지 을 통해 일제를 위해 그야말로 ‘숙야분려’했다. http://www.realcjd.net/bbs/view.php?id=nippon&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
조선일보가 10월 23일 2면에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고 “케이블TV 뉴스 전문 채널 YTN의 시청률이 지난 6월부터 연속 추락하고 있다”며 “구본홍 YTN 사장이 지난 7월 취임한 이후 노조가 구 사장의 출근 저지 투쟁을 하며 발생한 ‘YTN 사태’의 여파가 시청률 하락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조선일보는 시청률 조사시관인 AGB 닐슨미디어리서치의 월별 케이블TV 채널 시청률 결과를 들어 "YTN은 올 6월에는 0.765%(시청 점유율 6.9%)로 200여 개 전체 케이블 채널 가운데 4위였으나 이후 하락세로 돌아서 지난달에는 0.551%(시청 점유율 3.45%)까지 떨어지며 9위로 밀려났다"며, 이에 대해 시청률 조사 기관 관계자가 "시청자들은 방송에서 '사장 반..
11월 18일 ‘조중동 광고불매운동’을 벌인 누리꾼들에 대한 재판 중 ‘피해업체’ 증인으로 출석한 모 여행사 광고담당 직원이 증인석에 앉자마자 “법정 밖에서 기다리던 중에 피고인 측 사람들로부터 폭행을 당해 신변의 위협을 느껴 증언을 못하겠다”고 주장했다. 피고 측 일부 방청객이 자신에게 욕설을 하며 “팔꿈치로 얼굴을 가격했다”는 것이다. 이에 재판부는 증인이 지목한 방청객 2명을 퇴장시키고 나머지 증인들이 방청객과 마주치지 않도록 별도의 통로에 대기시켰다. 그러나 당시 현장에 있던 피고 측 방청객들과 목격자들의 주장은 이 여행사 직원의 주장과 완전히 다르다. 여행사 직원이 먼저 피고 측 방청객들에게 반말과 욕설을 했고, 이 때문에 언쟁이 벌어졌지만 여행사 직원을 협박, 폭행했다는 주장은 사실 무근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