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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1. 뉴스의 시대

 

프롤로그

알랭 드 보통은 『뉴스의 시대』를 통해 뉴스가 우리 삶에서 점하고 있는 지배적인 위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뉴스가 교묘하게 눈길을 회피하는 뉴스 자신을 꼬집으면서 말이다. 철학자 헤겔의 주장처럼 삶을 인도하는 원천이자 권위의 시금석으로서의 종교를 뉴스가 대체할 때 사회는 근대화된다. 또한 뉴스는 교육에 영향을 미친다. 교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간에, 보다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교육은 방송 화면과 전파를 통해 이뤄진다. 우리 대중은 계속 뉴스를 확인하는 걸까? 뉴스는 공포, 안정과 평화, 쾌락, 위안과 관련이 있다.

 

정치뉴스

언론기관 내부에는 공정하고 중립적인 ‘사실’ 보도가 가장 품격 있는 저널리즘이라는 편견이 광범하게 퍼져 있다. 정작 문제는 우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접한 그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사실의 정반대에 있는 것은 편향이다. 편향은 현실 위를 미끄러져 들어감으로써 더 명확하게 사건을 들여다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 쌍의 렌즈다. 우리의 임무는 편향된 시각이 생산한 더 믿을 만하고 유익한 뉴스에 올라타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언론이 칭찬받을 만한 지점은, 사실을 모으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그 사실들의 지적 편향을 통해 갈고닦은 타당성을 알아내는 기술이다. 소위 진지한 뉴스 매체들은 대중을 적절히 사로잡을 수 있는 방식으로 중요한 정보들을 전달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인상을 건축과 뉴스 두 가지 도구의 도움을 받는다. 건축은 공동체의 정신적 초상이 드러난다. 뉴스는 어떤 이야기를 조명하고 어떤 이야기를 빼버릴지 선택하면서 단지 현실을 선택적으로 빚어낼 뿐이다. 왜 언론은 어두운 면을 그렇게 과도하게 초점을 맞출까? 어째서 잔인함에 그렇게 초점을 맞추면서 희망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 걸까? 건축은 공손함, 현대성, 계급 간의 화합, 자연과의 조화를 웅변적으로 표현하면서 우뚝 서 있을 구조물을 창조한다. 건축이 그랬듯 뉴스도 달콤한 말을 건넬 수 있다. 늘 그러듯 대참사와 사악한 사건에 보도의 초점을 맞추면서도, 뉴스는 국가가 어려움을 헤치고 나아가며 진로를 정하는 데 필요한 작은 희망을 증류하고 응축하는 핵심적인 기능을 이따금 수행해야 한다. 뉴스는 사회의 악행을 폭로하고 그 고통을 직시함으로써 사회를 돕는 한편, 선함과 용서와 분별력을 갖춘, 구성원들이 기여하기를 원하는 가상의 공동체를 구축하는 중요한 임무 또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뉴스를 지속적으로 보면 우리는 두려움과 분노에 익숙해진다. 왜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을까? 분노는 겉보기에 어떤 상황에 대한 비관적인 반응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세상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징후다. 정치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정치의 핵심 영역에서 한 사람이나 한 정당이 단숨에 성취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어떤 문제의 경우 소위 유일한 ‘해결책’은 메시아적 리더, 국제회의 혹은 신속한 전쟁에 기대는 게 아니라, 100년 혹은 그 이상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는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다.

 

탐사 저널리즘은 집단과 개인을 파괴하는 모든 요인들에 대한 전 방위적인 관심에서 시작해야 한다. 뉴스는 무엇보다 정신 건강, 건축, 여가, 가조 구조, 연애, 회사 경영 방식, 교과과정과 신분질서 등을 취재해야 한다. 이런 영역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의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보다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뉴스의 가장 고귀한 약속은 무지를 줄이고 편견을 극복하게 하여 개인과 국가의 지성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반대로, 뉴스는 우리를 완전히 바보로 만든다고 비난받아왔다. 19세기의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판단하기에 신문들이 국민의 호기심과 지성에 저지르는 짓은 소름이 돋을 만한 것이었다. 플로베르는 신문이 새로운 종류의 우둔함(플로베르는 ‘la betise’라는 단어를 썼다)을 프랑스 구석구석 퍼뜨린다고 믿었다. 『보바리 부인』에서 가장 역겨운 캐릭터인 약사 오메는 뉴스의 열렬한 소비자로 날마다 ‘신문’(플로베르는 소설 내내 이 단어를 이탤릭체로 표시하는데, 이는 이 대상에 바치는 신흥 종교적 숭배를 조롱하고자 함이다)을 공부하는 특별 시간을 갖는 사람으로 소설 초반에 등장한다. 플로베르는 신문을 증오했다. 독자들의 정신은 각자의 특별한 여정, 탐구, 성찰을 멈추고 그 일들을 <르피가로>의 논설위원과 그 동류의 인간들이 솜씨 좋게 포장한 결론에 통째로 떠넘길 수 있다고 은근히 암시했다.

 

경제 문제를 토론할 때 주류 언론은 우리가 노동의 종말, 정의의 본질, 시장의 적절한 역할 같은 보다 고유하면서도 폭넓은 질문들은 제기하지 못하게 막는다. 뉴스 기사는 다른 식으로 깊이 상상하려는 우리의 의지뿐 아니라 그 능력까지 축소하는 방식으로 사안들을 특정한 틀에 가두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문제를 파고드는 이가 없다면, 불확실하지만 잠재적으로는 중요한 개인들의 사색은 위축되고 말 것이다. 물론 일부는 돈에 책임이 있다.

 

해외 뉴스

미래의 이상적인 언론은 이례적인 일들에 대한 관심이 보통의 삶에 대한 사전 지식에 좌우된다는 걸 인식하면서 특정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기사를 항상 주문하게 될 것이다. 아디스아바바의 거리 파티, 페루에서의 사랑, 몽골에서의 인척관계 등 인간 본성의 양상을 포함하는 기사 말이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해외 뉴스는 예술의 몇 가지 기교들을 기꺼이 채택해야 한다. 조지 엘리엇이 말했듯, 매체로서의 예술은 “경험을 증폭하고, 우리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넘어서는 동료 인간들과의 접촉을 확장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다. 엘리엇에 따르면 그로 인한 가장 큰 이점은 ‘공감 능력의 확장’이다. 우리와 ‘별개의 문제인 것에 주목하도록’ 애씀으로써 우리와 다른 나라의 국민들이 서로의 만남을 상상하고 실질적인 원조를 하며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하찮은 것에 주목한다.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것, 다른 사람들(쟁기질하는 사람과 목동, 여러분과 나, 그리고 바쁜 저널리스트)이 놓치고 지나가지만 우리의 무관심과 냉담함을 거두도록 하는 데 있어 본질적인 것 말이다.

 

경제 뉴스

역사적으로 현대 뉴스 매체는 자본주의의 은행, 중개업, 증권거래소 관련 시장 정보의 필요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발전해왔다.

 

셀러브리티 뉴스

누군가를 동경하려는 욕구는 우리 심성의 뿌리 깊고 중요한 특징이다. 무시하거나 비난한다고 해서 없앨 수가 없다. 아테네는 민주적 통치, 군사적 용맹, 지적 자유, 시민으로서의 영예, 예술적 표현과 스포츠 정신의 가치를 믿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 가치들을 집약적으로 구현한 뛰어난 사람들을 신봉했고, 조각상과 축제와 문학작품 등을 통해 칭송하고 기념했다. 페리클레스와 데모스테네스 같은 정치가, 올림픽 권투선수 필람몬과 전차 경주자 카브리아스, 음악가 멜라니피데스와 아나크레온은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행복) 또는 번영을 향한 실질적인 안내자로 간주되었다. 가톨릭도 이와 비슷하게 그 역사 속에서 일련의 훌륭한 개인들을 추앙해왔으며, 그들의 삶이 찬사와 모방심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랐다. 훌륭한 성품과 선행이 무엇인지 보여준 약 1만 명의 성인들은 가톨릭의 중심적 덕성인 겸손, 너그러움, 순결, 고상함, 절제, 인내, 근면함을 반영하는 이들이었다.

 

우리는 가톨릭의 예를 염두에 두면서, 우리 내면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덕성, 즉 용기 또는 활기, 지혜 혹은 창의성, 신뢰 혹은 용서 같은 미덕의 안내자로 적합한 셀러브리티를 찾아내고자 노력해야 한다. 셀러브리티 중에서 우리에게 진정 가치 있는 사람들, 우리가 보다 성공적이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도록 영감을 줄 수 있는 태도나 업적을 지닌 사람들을 골라내야 한다. 자신이 하찮고 무기력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격려와 영감을 얻기 위해 유명인들로 구성된 자유분방한 앙상블을 마음에 담아둘 수 있는 것이다.

 

셀러브리티 문화의 진짜 원인은 자아도취적인 얄팍함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친절함의 부족이다. 모두가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여러 정치적 이유로 인해 평범한 삶을 살면서는 품위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사회다. 험담을 늘어놓고 싶은 충동과 명성에 대한 욕망은 똑같은 아픔에서 비롯된다. 양쪽 다 관심의 결핍에 기인한 것이다.

 

재난 뉴스

매해 3월 말이면 고대 아테네 시민들은 디오니소스 극장이 들어선 아크로폴리스 남쪽 경사면에 모여 앉아, 탁 트인 하늘 아래에서 위대한 비극 작가들의 최신작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35년경에 저술한 『시학』에서 이런 이야기에 끌리는 인간적 매혹을 관대하게 바라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들이 잘 쓰이고 솜씨 좋게 상연될 경우, 사회 전체의 정서적이고 도덕적인 교육에 결정적인 자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거기 묘사된 잔혹행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들은 사람들을 교화하는 힘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즉 공포가 일컬은 비극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플롯이 잘 구성되고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위동기가 설득력을 갖춰 설명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비극의 임무는 본질적으로 품위 있고 호감 가는 인물도 결국엔 쉽사리 주위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뉴스의 진지한 임무가 여기에 있다. 끔찍한 사건에 대한 보도는, 인간의 혼란스러운 일면으로 인해 저질러버릴 수 있는 일들을 우리가 저지르지 않도록 최대한 격려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스 비극에서 코로서(choros, 합창대)는 수시로 사건에 개입하여 감정의 방향을 조정하고 등장인물의 행동에 풍부한 맥락을 부여했다. 코로스는 주인공이 어떤 죄를 저질렀건 간에 그에 대해 엄숙한 존경을 담아 표현하는 경향을 보인다.

 

『보바리 부인』이나 『햄릿』의 보바리와 햄릿을 보통의 범죄자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으로 승격시키고, 이들을 감옥에 갇힌 의사처럼 매몰찬 취급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걸까. 그건 바로 플로베르와 셰익스피어의 영혼이 지닌 관대함이다. 비극적인 사건을 보도할 때, 뉴스는 끔찍한 행동을 특정한 인물의 고유한 행동으로 보이도록 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플로베르와 셰익스피어는 우리가 끔찍한 행동으로부터 머리카락 한 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결론을 끌어낸다. 심각한 범죄 기록이 없는 건 대체로 운이 좋거나 환경이 좋아서일 뿐, 본성이 타락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깨끗한 양심이란 상상력이 충분하지 못한 이들의 전유물이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들은 이 점을 절대 잊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얼마나 사악하고 어리석고 육욕에 불타고 화를 잘 내며 맹목적일 수 있는지 알려주기를 즐겼지만, 그러면서도 복잡한 연민을 가질 여지는 남겨놓았다.

 

재난 뉴스, 끔찍한 사고는 동시에 삶에 새롭게 초점을 맞추는 계기를 제공한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삶의 의미를 회복시켜준다는 관념은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다. 유럽에서는 여러 세기 동안, 권력자의 서재와 침실에 진짜든 그린 것이든 인간의 해골을 장식품으로 놓아두었는데, 이 해골은 시선을 확실히 끌 수 있는 곳에 놓여 있어서 권력자가 맞수에게 시시한 복수를 꾀하거나 연인을 배반할 궁리를 하는 동안 그의 사고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끊을 수 있었다.

 

소비자 정보 뉴스

소비자 정보 뉴스는 우리가 돈을 제대로 쓰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진지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변화하길 바라는 것이다. 물질적 상품의 획득을 통해 각종 복잡한 심리적 목표를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우리의 야망이다. 물질적 오브제들은 미래의 심리 상태에 대한 약속이자 유인책이다. 이탈리아제 도심형 승용차는 매력적인 도도함과 쾌활함을 말해주고, 타이타늄으로 만든 탁상 스탠드는 의미 가득한 본질로 돌아가려는 바쁜 삶을 암시하며, 휴일 산악 하이킹은 망설임과 연약함의 종언과 더불어 새로우면서도 더욱 탄력적인 탄생을 약속한다. 이 물건들은 구매의 최종 목적에 대한 감동적인 심상을 제공할 수 있고, 그로써 거기에 닿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에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다.

 

예술은 진정 무엇을 위한 것인가? 예술은 치유의 힘을 가진 매체로, 관객들을 인도하고 독려하고 위로하며 더 나은 자기로 진화하도록 거든 다는 것이다. 어떤 작품에 정당한 가치가 있는데도 공감하기 힘들 다면, 우리는 그 작품을 우리에게 딱 맞는 시기에 만나지 못한 것이다. 예술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과 우리 내면의 욕구가 맞아떨어지는 소중한 순간에만 진정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는데, 문화 저널리즘은 바로 이런 순간들을 알아내고 알릴 수 있도록 지성을 갖춰야 하고, 그러면서 인류가 가진 가장 강력한 치유제를 조제하는 약사의 역할을 맡을 수 있어야 한다.

 

 

2. 여행의 기술

 

기대에 대하여

왜 사람들은 여행을 시작할까. 여행 장소에 대한 설명은 많지만 여행의 목적과 동기에 대해 설명한 책은 많지 않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여행의 목적과 동기에 대해 살피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행을 연구하게 되면 그리스 철학자들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렀던 것, 즉 “인간적 번영”을 이해하는 데에도 대단치는 않지만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생존투쟁을 벗어난 우리의 삶을 보다 직접적으로 직면하게 해준다. 여행은 이로써 우리 삶의 본질을 탐구하게 하고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터에서 벗어나 일시적인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사실 우리가 느끼는 만족의 지속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때로는 집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만족하고 삶을 즐기는 것이 좋은 여행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데제생트는 “상상력은 실제 경험이라는 천박한 현실보다 훨씬 더 나은 대체물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행을 위한 장소에 대하여

샤를 보들레르는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불렀다. 샤를 보들레르는 1821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는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다섯 살에 아버지를 잃었으며, 어머니는 1년 뒤 그가 싫어하는 남자와 재혼했다. 그때부터 보들레르는 기숙사 학교들을 떠돌게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반항을 한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다. 어른이 된 보들레르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어머니, 계부와 싸웠고, 연극에서처럼 검은 망토를 입고 돌아다녔으며, 방에는 들라크루아의 햄릿 석판화 복제본을 걸어놓았다. 그는 일기에서 “‘가정의 공포’라는 무시무시한 병”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느꼈던 외로움, 가족과 학교 친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고독한 삶을 살 운명이라는 느낌”으로 인해서 겪는 고통을 토로했다.

 

샤를 보들레르의 진짜 욕망은 떠나는 것이었다.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 보들레르는 자신의 집보다 여행을 하는 중에 잠시 머무는 곳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여행은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수단이 아니라 여행 자체가 욕구이자 목적이다. 지금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곳을 찾아야만 살 수 있는 사람, 새로운 장소가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

 

여행을 시작한다는 말은 여행할 장소로 떠난다는 말로 바꾸어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어디로 여행을 떠날까. 어떤 이들은 추운 겨울을 피해 따뜻한 남반구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어떤 이들은 새로움을 찾기 위해 이색적인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내적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여행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여행임을 깨닫기도 한다.

 

에드워드 호퍼는 외로움을 그렸다. 호텔, 도로와 주유소, 식당과 카페테리아, 기차에서 본 풍경, 기차 안과 열차의 모습이 주요 무대였다. 호퍼가 느낀 매력은 이해하기 쉽다. 보들레르와 호퍼는 고독, 도시 생활, 근대성, 밤이 주는 위로, 여행과 관련된 장소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다.

 

이국적인 것에 대하여

플로베르는 이국적인 것을 사랑했다. 이것이 또한 이집트에 대한 찬사의 기초이기도 했다. “이집트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아주 상스러운 말을 마음대로 써가며 대화를 나눈다. 심지어 아주 덕망 있고 존경받는 여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도 질이 낮은 매음굴에나 어울릴 것 같은 외설적인 표현을 쓰는 경우가 흔하다. 가장 고상하다고 하는 여자들도 남자들이 듣는 데서 자신이 천하게 보이든 말든, 우리나라에서는 매춘부들도 언급하기를 삼갈 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그것과 관련된 화제를 올린다.” 플로베르는 이집트와 낙타를 사랑했다.

 

호퍼는 시를 발견했다. 모텔의 시, 도로변 작은 식당의 시, 그의 그림들은 다섯 가지 여행 장소(호텔, 도로와 주유소, 식당과 카페테리아, 기차에서 본 풍경, 기차 안과 열차의 모습)에 대한 일관된 관심을 보여준다. 여기서 중심 주제는 외로움이다. 호퍼의 인물들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은 혼자 앉아 있거나 서 있다. 호퍼는 고립되어 있는 그림 속에 있는 여자와 공감해보라고 우리에게 권유한다. 호퍼는 우리를 그녀 편에, 내부인들과 대비되는 외부인들 편에 세운다. 영국의 문학 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주장하듯이 변화를 통해서 외부인은 내부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호기심에 대하여

훔볼트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훌륭한 신체 조건과 더불어, 생물학, 지리학, 화학, 물리학, 역사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추었다. 훔볼트는 5년간 유럽을 떠나 있었다. 그는 돌아와서 파리에 정착하여, 이후 20년간 신대륙의 적도 지역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30권의 여행기를 출간했다. 랠프 월도 에머슨은 이렇게 썼다. “훔볼트는 아리스토텔레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크라이턴 제독과 마찬가지로 이따금 세상에 나타나서 인간 정신의 가능성, 재능의 힘과 범위를 보여주는 경이로운 인간 정신의 가능성, 재능의 힘과 범위를 보여주는 경이로운 인간, 즉 보편적 인간의 한 예이다.”

 

홈볼트는 식물 지리론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 책에서 고도와 기온에 따른 식물의 분표를 규정했다. 그는 6개의 고도 지대가 있다고 설명했다. 해수면으로부터 해발 약 900미터까지는 야자나무와 바나나나무가 자랐다. 1470미터 높이까지는 양치류가 자랐으며, 2760미터까지는 떡갈나무가 자랐다. 그 다음에는 상록 관목이 자라는 지대가 나타났다. 3045미터에서 3780미터까지는 허브들이 자랐고, 3780미터부터 4260미터까지는 고산 풀과 이끼가 자랐다. 그는 흥분해서 4980미터 이상 올라가면 파리가 발견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기록했다.

 

“삶을 고양한다”는 표현은 원래 니체가 사용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873년 가을에 탐험가나 학자처럼 사실을 수집하는 일과 내적이고 심리적인 풍요를 목적으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을 이용하는 일을 구별했다. 그는 진정한 과제는 “삶”을 고양하기 위해서 사실들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괴테의 문장을 인용했다. “나는 나의 활동에 보탬이 되거나 직접적으로 활력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히 나를 가르치기만 하는 모든 것을 싫어한다.”

 

여행 중에 “삶을 위하여” 지식을 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니체는 몇 가지 제안을 한다. 그는 독일 문화의 상태에, 또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어떤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이 이탈리아에 갔을 경우를 상상한다. 그들은 운, 인내심, 적당한 후원자가 있었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분위기와 가치를 바꿀 수 있었다. 이 여행객은 다른 문화에서 “과거에 ’인간‘이라는 개념을 확장하고 그 개념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었던 것”을 찾게 될 것이며, 그 결과 “과거의 위대함을 숙고함으로써 힘을 얻고, 인간의 삶이 영광스러운 것임을 느낌으로써 영감을 얻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니체는 또 두 번째 종류의 여행도 제안한다. 이는 우리의 사회와 정체성들이 과거에 의해서 형성되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과정에서 연속성과 소속감을 확인하게 되는 여행이다. 이런 여행을 하는 사람은 “덧없고 개별적인 존재를 넘어선 시야를 가지게 되며, 자신이 자신의 집, 종족, 도시의 정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오래된 건물들을 보며 “자신이 완전히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과거로부터의 상속자이자 꽃이자 열매로서 성장해왔으며, 따라서 자신의 존재는 용서받을 수 있고 또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행복”을 느끼게 된다.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윌리엄 워즈워스는 1770년에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북쪽 가장자리에 있는 코커머스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런던과 케임브리지에 가 있던 기간과 유럽 여행을 하던 기간을 빼면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평생을 보냈다. 그는 거의 매일 산 속이나 호숫가를 오랫동안 산책했다.

 

워즈워스의 도시에 대한 불만에는 매연, 혼잡, 가난, 추한 외관 등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맑은 공기 법안을 상정하고 빈민가를 정리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그의 비판이 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도시가 우리의 건강보다는 영혼에 미치는 영향이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도시가 생명을 파괴하는 여러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비난했다. 사회 위계에서 우리의 지위에 대한 불안,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질투, 낯선 사람들의 눈앞에서 빛을 발하고 싶은 욕망. 워즈워스의가 보기에 이런 혼잡하고 불안한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진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려워 보였다.

 

워즈워스에 따르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내부의 선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냇물과 숲이 우거진 웅장한 골짜기를 굽어보는 바위 가장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자연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도 의미심장하게 바꿀 수 있다. 워즈워스는 자연 속에서 살면서 자신의 성격이 경쟁, 질투, 불안에 저항하는 쪽으로 형성되어갔다고 주장했다.

 

숭고함에 대하여

숭고함은 우주의 힘, 나이, 크기 앞에서 인간의 약함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유쾌할 수 있고, 심지어 사람을 도취시킬 수도 있다. 에드먼드 버크는 스물네 살의 나이에 런던에서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숭고함과 아름다움에 관한 우리 이상들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썼다. “숭고함은 아름다움이라는 두 관념은 종종 혼동된다. 이 두 말은 서로 매우 다르고 또 정반대인 사물들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풍경은 힘, 인간의 힘보다 크고 인간에게 위협이 될 만한 힘을 보여줄 때만 숭고하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숭고한 장소들은 인간의 의지에 대한 도전을 보여준다. 숭고함과 아름다움은 거세된 수소와 거세하지 않은 황소와 같다.

 

하느님은 착하게 살았는데도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느냐는 욥의 질문을 받자 욥의 눈길을 자연의 엄청난 현상으로 돌린다. 하느님은 말한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놀라지 말라. 우주는 너보다 더 크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놀라지 말라. 너는 우주의 논리를 헤아릴 수 없다. 너보다 큰 것,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라. 세상이 너에게는 비논리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그 자체로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 모든 것의 척도는 아니다. 숭고한 곳들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하찮음과 연약함을 생각하도록 하라. 하느님은 욥에게 모든 일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끔 그의 이익과 반대되는 쪽으로 흐른다고 해도, 그의 마음에는 하느님이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신의 지혜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설 때, 의로운 사람은 숭고한 자연 광경을 보고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다음 우주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계속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눈을 열어주는 미술에 대하여

빈센트 반 고흐는 1888년 2월 말에 프로방스에 왔다.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으며, 불과 8년 전에 그림을 시작했다. 그전에는 교사가 되려고 했으며, 사제가 되려고도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프로방스로 오기 전에는 2년 동안 파리에서 동생 테오와 함께 지냈다.

 

반 고흐는 동생에게 파리에서 아를로 이사 온 이유를 두 가지 댔다. 첫째는 “남부를 그리고” 싶었고, 또 하나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남부를 “보도록”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반 고흐가 예술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해준다고 이렇게 굳게 믿게 된 것은 그 자신이 관객으로서 이런 힘을 자주 경험했기 때문이다. 반 고흐는 발자크, 플로베르, 졸라, 모파상을 읽었으며, 이 작품들을 통해서 프랑스 사회와 심리의 역동성에 눈을 뜨게 된 것에 고마워했다. 반 고흐는 『보바리 부인』을 통해서 지방에서 사는 중간 계급의 생활을 배웠으며, 『고리오 영감』을 통해서 파리의 가난하지만 야심만만한 학생들을 배웠다. 마찬가지로 그림 역시 반 고흐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벨라스케스는 그에게 회색을 볼 수 있는 지도를 주었다. 벨라스케스는 이베리아의 수수한 실내를 묘사했다. 반 고흐가 보기에 벨라스케스는 빛의 세계에서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반 고흐에게는 관객이 세상의 어떤 측면들을 좀 더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화가의 증표였다. 벨라스케스가 회색과 몸집이 큰 요리사의 거친 얼굴로 반 고흐를 안내해주었다면, 모네는 석양으로 안내를 해주었고, 렘브란트는 아침의 빛으로 안내해주었으며, 페르메이르는 사춘기 소녀들에게로 안내해주었다. 밀을 보고 밀레를 떠올렸고, 생-마리 드 라 메르의 젊은 여자들을 보면서 이탈리아 피렌체 화파의 화가 치마부에와 조토를 떠올렸다.

 

반 고흐의 그림을 본 뒤에는 프로방스의 색깔에도 뭔가 특이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기후와 관련된 이유도 있었다. 구름 없는 하늘, 건조한 공기, 물, 무성한 잎들이 결합하여 생생한 대조를 이루는 원색들이 이 지역을 지배한다. 반 고흐 이전의 화가들은 이런 대조를 무시하고, 클로드와 푸생이 가르친 대로 서로 근접한 색들만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 고흐가 프로방스 화가들 중에서도 독특했던 것은 그가 중요하다고 느껴서 선택했던 것이 독특했기 때문이다. 반 고흐는 그림 속에 그 사람에 대한 그의 고마움, 그의 사랑을 집어넣었다.

 

파스칼은 유명한 그림은 숭배하면서 풍경을 도외시하는 모습에 이렇게 말했다. “원래의 모습에는 감탄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닮게 그린 그림에는 감탄하니, 그림이란 얼마나 허망한가” 하지만 니체가 알고 있었듯이, 화가는 단지 재현만 하는 것이 아니다. 화가는 선택을 하고 강조를 한다. 화가는 그들이 그려낸 현실의 모습이 현실의 귀중한 특징들을 살려내고 있을 때에만 진정한 찬사를 받는다.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능력은 예술에서 현실 세계로 옮겨질 수 있다.

 

역사가들은 18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넓은 시골을 감상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대니얼 디포는 1720년대에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황량하고 무시무시하다”고 묘사했다. 존슨 박사는 스코틀랜드 서부 여행기에서 스코틀랜드의 고원이 “거칠고”, 처량할 정도로 “식물 장식”이 없으며, “가망 없는 황량함만 넓게 뻗어 있다”고 썼다. 당시 여행을 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해외로 갔다.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로마, 나폴리와 그 주변 시골이 가장 인기 있는 목적지였다. 휘슬러 이전에는 아무도 런던의 안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 여행을 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해외로 갔다.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로마, 나폴리와 그 주변시골이 가장 인기 있는 목적지였다. 예술은 단지 열광에 기여하고, 우리가 이전에는 모호하게만 또는 성급하게만 경험한 감정들을 좀 더 의식하도록 안내한다.

 

1727년 시인 제임스 톰슨은 잉글랜드 남부의 농촌 생활과 풍경을 예찬하는 <사계>를 발표했다. 이 시가 성공을 거두면서 스티븐 덕, 로버트 번즈, 존 클레어 등 다른 “농경 시인”의 작품도 각광을 받게 되었다. 리처드 윌슨은 트위크넘 근처에서 템스 강을 그렸고, 토머스 헌은 구드리치 성을 묘사했으며, 필립 드 루테르부르는 틴턴 사원을 그렸고, 토마스 스미스는 더웬트워터와 윈더미어를 화폭에 담았다. 

 

사실 예술 혼자서는 열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 또 예술은 예술가들에게만 있는 독특한 정서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단지 열광에 기여하고, 우리가 이전에는 모호하게만 또는 성급하게만 경험한 감정들을 좀더 의식하도록 안내할 뿐이다. 

 

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어떻게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을까? 온건한 한 가지 방법은 잃어버린 것을 기억나게 해주는 뭔가-그릇이나, 칠기 상자나, 샌들-를 사는 것이다.

 

존 러스킨은 1819년 2월 런던에서 태어났다. 어떤 장소의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그의 작업의 핵심이었다. 러스킨은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다섯 가지 핵심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동시에 시각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다. 둘째,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타고난 성향이 있다. 셋째,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 넷째,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에게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관해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해서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러스킨은 이를 위해서 『데생의 기초』(1857), 『원근법의 기초』(1859)라는 책을 쓰고, 런던의 노동자 대학에서 일련의 강연을 했다. 러스킨의 생각에 따르면, 아무런 재능이 없는 사람도 데생을 연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우리의 취향에 대한 설명을 얻게 되며, “미학”, 즉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는 능력도 생기게 된다. 러스킨은 4년 동안 가르치고 그림에 대한 교본을 쓰면서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일을 정리하여, 자신의 동기는 “사람들이 물질적 우주에서 신의 작품의 아름다움에 좀 더 관심을 가지게 하고 싶은” 욕망이었다고 설명했다. 러스킨은 많은 장소들이 미학적 기준이 아니라 심리적 기준에서 우리에게 아름답게 비친다는 점을 인식했다.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나 분위기를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이다.

 

나는 적어도 러스킨이 예술의 두 가지 목적이라고 말했던 것-고통을 이해하고, 아름다움의 근원을 헤아려보는 것-가운데 하나는 따라가보려고 시도했다. 러스킨은 영국의 시골을 여행하다가 제자들이 형편없는 그림을 제출하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보는 것이 그림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나는 학생들이 그림을 배우기 위해서 자연을 가르치기보다는, 자연을 사랑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라고 가르치겠습니다.”

 

습관에 대하여 

파스칼은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호기심 많은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대비된다. 반면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는 파스칼의 견해에 동감할만한 사람이다. 훔볼트가 여행에 나서기 9년 전인 1790년 봄, 스물일곱 살의 프랑스인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는 자신의 침실을 여행하고, 나중에 그것을 『나의 침실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는 1763년 프랑스의 알프스 비탈에 자리 잡은 그림 같은 소도시 샹베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성이 열정적이고 낭만적이었으며, 책, 특히 몽테뉴, 파스칼, 루소의 책을 좋아했고, 그림은 특히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집 안 광경을 그린 그림들을 좋아했다. 사비에르와 형제지간인 정치 이론가 조제프 드 메스트르는 『나의 침실 여행』을 소기해면서 “내 동생은 탐험가들만큼 용감하지도 않고 부유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훨씬 더 실제적인 여행 방법을 발견했을 뿐이다.”라고 옹호했다. 사비에르는 감히 여행을 떠나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여행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 여행은 생각도 해본 일이 없는 더 많은 사람들, 폭풍이나 강도나 절벽을 무서워하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방 여행을 권했다.

 

드 메스트르는 문을 잠그고 분홍색과 파란색이 섞인 파자마로 갈아입는다. 그는 짐을 챙길 필요도 없이 방에서 가장 큰 가구인 소파를 여행한다. 평소의 무기력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소파를 바라보며 그 특질 몇 가지를 재발견한다. 소파 다리의 우아함에 감탄하며, 그 푹신푹신한 곳에 웅크리고 사랑과 출세를 꿈꾸며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을 기억해낸다.

 

우리가 여행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는 심리에 더 좌우될 수도 있다. 여행하는 심리란 무엇일까?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가 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는 분홍색과 파란색이 섞인 파자마를 입고 자신의 방 안에 있는 것에 만족하면서, 우리에게 먼 땅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가 이미 본 것에 다시 주목해보라고 슬며시 우리의 옆구리를 찌른다.

 

3. 공항에서 일주일을

 

접근

혼돈과 불규칙성이 가득한 세계에서 공항 터미널은 우아함과 논리가 지배하는 훌륭하고 흥미로운 피난처로 보인다.

 

출발

능력을 주입할 수는 있지만, 인간애를 법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항공사의 생존은 회사로서는 생산하거나 통제할 수도 없고, 또 심지어는 엄격히 말해서, 돈으로 살수도 없는 특질에 의존하는 셈이다. 이런 특질은 세미나나 직원 혜택에서 나오는 거시 아니다. 25년 전 체셔의 한 집, 두 부모가 자비와 유머로 미래의 직원을 기르던 집을 지배하던 사랑의 분위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는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네로 황제를 위하여 쓴 『분노에 관하여』라는 논문, 그 중에서도 특히 분노의 뿌리는 희망이라는 명제가 떠올랐다. 우리는 지나치게 낙관하여, 존재에 풍토병처럼 따라다니는 좌절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노한다.

 

게이트 너머

멜라니 클레인은 『질투와 감사』에서 잠재적인 죄책감은 인간 본성에 본래 내재하는 부분으로까지 추적해 들어갈 수 있으며, 그 기원은 부모 가운데 자신과 동성인 존재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살해 욕망이라고 말했다.

 

보안구역을 무사히 통과하는 것은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제지도 받지 않고 탐지기를 통과하여 터미널 반대편으로 들어가면 마치 고해를 한 뒤 교회를 떠나거나 속죄의 날에 유대교 회당을 떠날 때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잠시나마 죄의 짐이 완전히 또는 일부라도 덜어졌다는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

 

근처의 다른 서가에는 고전 소설들이 다양하게 꽂혀 있었다. 이 책들은 놀라운 상상력을 동원하여 배치되었는데, 저자나 제목이 기준이 아니라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나라를 기준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밀란 쿤데라는 프라하의 안내자로 제시되어 있고, 로스앤젤레스와 산타페 사이의 작은 도시들의 감추어진 특징을 드러내는 일은 레이먼드 카버에게 맡겨졌다.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무엇이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향하게 됩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우리가 마음속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삶의 길을 따라가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죠.”

 

요즘 값비싼 차와 와인, 옷과 식사는 싼 것보다 값에 비례한다고 생각할 만큼 좋은 경우가 드물다. 현대의 디자인과 대량생산 과정이 세련되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영국항공의 콩코드 룸은 이례적이었다. “이 세상의 노고와 소란은 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부, 권력, 탁월한 위치를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그렇게 묻고 스스로 대답을 했다. ”공감하고, 만족하여, 찬동하면서 관찰하고,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는 대상이 되기 위해서이다". 콩코드 룸을 만든 사람들은 이런 야망에 감동적일 정도로 정확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콩코드 룸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아주 평범해 보였다. 그럼에도 콩코드 룸으로 뿜어져 들어오는 정화된 공기 속에는 뭔가 모르게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맴돌고 있었다. 과거의 카스트 제도를 철폐하고 교육과 기회에 누구나 다가갈 수 있게 하려고 싸웠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만이 아니라 부의 분배에도 진정한 정의의 요소를 도입한 능력주의 사회를 구축한 것처럼 보인다. 근대에는 빈곤이 가련한 것일 뿐 아니라, 응당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재능이 있고 숙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우아한 콩코드 룸에 들어갈 수 없느냐 하는 문제는 난제이다.

 

기독교는 근대 능력주의 체제에 내재한 관념, 즉 미덕이 반드시 물질적 성공을 가져다준다는 관념을 거부했다. 예수는 지고의 인간이자 가장 축복받은 존재였음에도 지상에 사는 동안 내내 가난했으며, 바로 이 예 자체가 올바름과 부 사이의 직접적인 등식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이야기는 소멸한 것도 아니고 잊힌 것도 아니다. 결국 능력주의 체제와 기독교 신앙 체제 가운데 선택은 부유한 기업가와 상대적으로 가난한 청소부의 지위 사이의 상대적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응집력이 있는 하나의 산업으로서 민간항공 분야 전체를 생각해본다면 역사상 이 분야는 이윤을 낸 적이 없다. 책 출판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을 인세 보고서로 판단하는 것이 부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항공사를 손익 계산서에 따라 평가하는 것도 부당해보였다.

 

도착

지혜로운 여행사라면 우리에게 그냥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물어보기보다는 우리 삶에서 무엇을 바꾸고 싶으냐고 물어볼 수도 있을 텐데. 순례는 내적 진화를 촉진하고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수행하는 외부 세계 답사로 규정되었다. 기독교 이론가들은 순례의 위험, 불편, 비용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이나 다른 눈에 보이는 불리한 점들이 오히려 여행의 영적 동기를 더 생생하게 기억나게 해주는 체제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답사를 쉽게 잊지 못하도록 도와주는 시련에 불과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다. 그래서 우리는 점차 행복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과 동일시하는 일로 돌아간다. 우리는 짐을 싸고, 희망을 품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구를 회복한다. 곧 다시 돌아가 공항의 중요한 교훈들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1/13(월)~1/15(수) 바르셀로나 – 행복의 건축

 

 

우아하고 유쾌했던 24시간의 짧은 런던 체험을 마치고 히드로공항으로 향한다. 민영화된 히드로공항은 비행기 티켓 값을 더 지불한 만큼 많은 혜택을 제공한다. 히드로공항 라운지에는 샤워와 스파, 다양한 주류와 음식,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평등의 가치를 더 중요시하는 인천공항과는 다르게 히드로공항은 일반 승객들의 평등권보다 돈을 더 지불한 사람들의 자유권을 우선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천공항의 라운지보다 히드로공항의 라운지는 더 많은 편의시설을 제공하고 패스트트랙을 통해 일반 승객들의 기다림은 자본으로 해결될 수 있는 사안으로 여기게 한다.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한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넓은 농지는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숭고함과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숭고함은 우주의 힘, 나이, 크기 앞에서 인간의 약함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유쾌할 수 있고, 심지어 사람을 도취시킬 수도 있다. “숭고함과 아름다움이라는 두 관념은 종종 혼동된다. 이 두 말은 서로 매우 다르고 또 정반대인 사물들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풍경은 힘, 인간의 힘보다 크고 인간에게 위협이 될 만한 힘을 보여줄 때만 숭고하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숭고한 장소들은 인간의 의지에 대한 도전을 보여준다. (예 거세된 수소와 거세하지 않은 황소의 비유)

 

욥은 숭고함에 생각한다. 하느님은 착하게 살았는데도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느냐는 욥의 질문을 받자 욥의 눈길을 자연의 엄청난 현상으로 돌린다. 하느님은 말한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놀라지 말라. 우주는 너보다 더 크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놀라지 말라. 너는 우주의 논리를 헤아릴 수 없다. 너보다 큰 것,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라. 세상이 너에게는 비논리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그 자체로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 모든 것의 척도는 아니다. 숭고한 곳들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하찮음과 연약함을 생각하도록 하라. 하느님은 욥에게 모든 일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끔 그의 이익과 반대되는 쪽으로 흐른다고 해도, 그의 마음에는 하느님이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신의 지혜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설 때, 의로운 사람은 숭고한 자연 광경을 보고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다음 우주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계속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야자수 나무와 열대 식물은 우리를 이국적인 세계로 초대한다. 하늘에서 보았던 숭고함은 땅에 발을 내딛으며 아름다움으로 변한다. 바르셀로나 거리 건축물의 더 높은 층 높이의 천정 고는 아름다운 아치형 발코니를 만들고 발코니의 펜스는 카탈루냐 건축물의 고전적이지만 색다르고 다채로운 매력을 선사한다. 전통 건축물과 현대 건축물의 조화와 바르셀로나의 도시 설계는 건축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4. 행복의 건축

 

행복을 위한 건축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덧없음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시인 라이너 마리아와 릴케와 함께 이탈리아의 백운암 산맥을 산책하던 일을 회고한다. 아름다운 여름날이었다. 꽃들이 만발하고 초원 위에서는 화려한 색깔의 나비들이 춤을 추었다. 이 정신분석학자는 야외에 나와 기뻤다(그 주 내내 비가 내렸기에). 하지만 그의 동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보며 걸었다. 산책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릴케가 주변의 아름다움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나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자면, 릴케는 “이 모든 아름다움과 인간이 창조했거나 창조할 아름다움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프로이트는 릴케에게 공감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곧 스러질 것이라 하더라도 뭔가 매력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심리적 건강성의 증표였다. 그러나 릴케의 입장은 비록 불편하기는 하지만, 아름다움에 가장 깊이 사로잡힌 사람들이 특히 아름다움의 덧없는 본질을 의식하고 또 그것 때문에 슬퍼할 수 있다는 점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반대로 건축을 향한 열정이 극에 이르면 유머주의가 될 수도 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빈에서 누이 그레틀을 위한 집을 지으려고 3년 동안 학계를 떠났다가 그 일이 생각보다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논리철학 논고>의 저자이기도 했던 이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철학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장담하는데, 훌륭한 건축가가 되는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스타일로 지을 것인가?

건축에서 아름답게 짓는 것을 늘 그렇게 어렵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서양의 역사에서, 계속 이어지는 기간은 아니지만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름다운 건물은 고전적인 건물과 동의어였다. 다시 말해서 대칭을 이루는 신전식 정면, 장식 기둥, 반복되는 비율을 갖춘 구조물이었다. 그리스인들은 고전 스타일을 만들어냈고, 로마인은 그것을 복제하고 발전시켰으며, 천 년의 간격을 두고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교육받은 계급들은 이 스타일을 재발견했다. 고전주의는 반도로부터 북쪽과 서쪽으로 퍼져나가면서 지방색을 띠고 새로운 재료로 표현되었다. 고전주의 스타일의 건물은 헬싱키와 부다페스트, 서배너와 상트페테르부르크처럼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공존했다. 이 감수성은 실내장식에도 적용되었으며, 고전적인 의자와 천장, 침대와 욕조가 탄생했다.

 

엔지니어들의 철학은 건축이라는 전문직이 기왕에 대변했던 모든 것과 대립되었다. “유용하고,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것을 뭔가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건축의 의무다.”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은 그렇게 주장했다. “건축이 단순한 집짓기와 구별되는 것은 장식 때문이다.“ 조지 길버트 스콧 경도 그렇게 말했다. 베네치아의 총독 궁이 위대한 건축으로 분류될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그 지붕의 조각들, 전면에서 볼 수 있는 흰색과 분홍색 벽돌들의 섬세한 배치, 건물 전체에 걸쳐 끝이 가늘어지는 늘씬한 뾰족 아치를 자랑하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건축 전문직에게 위대한 건축의 본질은 기능적으로 불필요한 데 있는 셈이었다.

 

로마인들은 콜로세움에 기둥들을 보탰다는 이유로 부정직하다고 생각했다. 엔지니어라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우아하게 조각된 값비싼 돌덩이들은 위층을 지탱하는 척만 했지, 사실 구조물 전체가 아치들로만 지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8년 봄 파리에서 피에르와 에밀리 사부아라는 이름의 부부는 41살의 스위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를 찾아가 자신들과 어린 아들 로세를 위해 시골집을 설계해 달라고 부탁했다. 집이 들어설 곳은 파리 서부 푸아시에 있는 숲이 우거진 땅으로, 센 강을 굽어보는 곳이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그때까지 건축가로 일하면서 개인주택을 15채 지었으며, 건축에 관한 분명한 관점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빌라 사부아의 지붕에 있는 구조물은 급수탑이나 가스 실린더를 닮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반원형의 보호벽을 갖춘 테라스다. 과학과 항공학의 영향은 집 내부까지 이어진다. 가구도 거의 없다. 르 코르뷔지에가 고객들에게 그들의 소유물을 최소로 유지하라고 권했다. 사부아 빌라는 사부아 부부가 반대를 했음에도 르 코르뷔지에는 평평한 지붕이 물매가 있는 지붕보다 더 좋다고 고집했다. 평평한 지붕이 건축비도 싸게 먹히고, 관리도 용이하고, 여름에도 시원하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가족이 이사한지 불과 일주일이 안 되어 지붕에서 아들 로제의 침실로 물이 샜다.

 

르 코르뷔지에는 미래의 주택들이 금욕적이고 깨끗하며, 규율과 검약이 지배하는 곳이기를 바랐다. 그는 모든 장식에 대한 혐오 때문에 영국왕족과 그들이 매년 의회 개회를 위해 타고 가는 장식이 화려한 황금마차를 가엾게 여겼다. 르 코르뷔지에는 그들에게 그 조각을 새긴 괴물 같은 것을 도버의 절벽으로 밀어버리고 대신 이스파노 수이자 1911 경주용차를 타고 영토를 돌아다닐 것을 권했다.

 

르 코르뷔지에에게는 진정으로 위대한 건축-능률의 추구라는 동기에 따라 움직이는 건축이라는 뜻이다-의 예를 4만 킬로와트짜리 전기터빈이나 저압 환기팬에서 찾는 것이 더 쉬웠다. 어떤 잡지 기자가 애용하는 의자가 무엇이냐고 묻자 르 코르뷔지에는 조종석 의자를 들면서, 1909년 봄 파리 상공에서 비행기를 보았을 때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날아야 한다는 요구 때문에 비행기에서는 모든 불필요한 장식이 사라졌으며, 그 때문에 비행기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가장 성공적인 건축물이 되었다고 말했다. 비행기의 기능이 나는 것이라면 집의 기능은 무엇인가? 르 코르뷔지에의 말을 따르면 집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1. 더위, 추위, 비, 도둑, 호기심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켜주는 피난처. 2. 빛과 태양을 받아들이는 그릇. 3. 조리, 일, 개인생활에 적합한 몇 개의 작은 방.” 엔지니어의 기풍에 지배되던 모더니즘은 건축에서 아름다움이라는 문제에 결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고 주장했다. 집에서 요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기 기능을 하는 것이라는 답이었다.

 

건축이 해주는 이야기에 관한 존 러스킨의 생각은 건물이 우리가 분석하고 평가하는 개념들과 전혀 관련이 없는 단순한 시각적 대상이라는 생각을 버리게 된다. 건물은 말을 한다. 그것도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주제들에 관해 말을 한다. 디자인된 물건은 모두 자신이 지지하는 심리적 또는 도덕적인 태도에 대한 인상을 심어준다. 본질적으로 디자인과 건축 작품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그 내부나 주변에서 가장 어울리는 생활이다. 따라서 어떤 건물이 아름답다고 묘사하는 것은 단순히 미학적으로 좋다는 뜻 이상이다. 건물이 마음을 다독여주기를 바랄 수도 있고 흥분시켜주기를 바랄 수도 있으며, 조화의 느낌을 풍기기를 바랄 수도 있고 절제의 느낌을 풍기기를 바랄 수도 있다. 우리는 건물이 우리를 과거와 연결시켜주기를 바랄 수도 있고 미래의 상징 역할을 해주기를 바랄 수도 있다. 아름답다는 느낌은 좋은 생활이라는 우리의 관념이 물질적으로 표현되었을 때 얻는 것이다.

 

말하는 건물

조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삶의 핵심적 주제를 희미하게나마 포착한다. 돌에 새겨진 모성을 느끼는 것이다. 주전자에는 펭귄이 있으며, 탕관에는 건장하고 자존심 강한 인물이 있으며, 책상에는 우아한 사슴이 있으며, 식탁에는 황소가 있다. 우리는 피부조직이나 근육의 극히 미세한 측면들을 근거로 성격을 판단한다. 눈은 기계적인 의미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표정이 사과에서 독선으로 바뀔 수 있다. 걱정하는 이마와 집중하는 이마는 동전 하나의 폭으로 갈라진다. 우리는 살아 있는 형태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연역해내는 데 익숙하다. 곡선 버팀대는 편안함과 장난스러움을 이야기한다. 직선 버팀대는 진지함과 논리를 이야기한다. 직선적인 나무의자는 안정되고 상상력 없는 사람이 자신의 생활 반경 내에서 행동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곡선을 그리는 의자의 구불구불한 모습은 간접적으로나마 구김살 없고 멋을 부리는 사람이 드러내는 편안한 우아함에 상응한다.

 

시간이 흐르면 로코코의 세밀한 장식도 혁명적 보복으로 파괴된 귀족적 퇴폐의 단순한 상징으로 보기보다는 그 나름의 맥락에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다. 따라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작품이란 우리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투사를 견딜 만한 내적 자산을 갖춘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런 작품은 좋은 특질을 단지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현한다. 따라서 시간적이고 지리적인 기원을 넘어 살아남고, 최초의 관객이 사라지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자신의 의도를 전달할 수 있다. 이런 위대한 작품은 우리의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속 좁은 연상의 밀물에 썰물 위에 우뚝 서서 자신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다.

 

우리가 감탄하는 건물은 결국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가 귀중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상찬한다. 즉 이런 건물을 재료를 통해서든, 형태를 통해서든, 색채를 통해서든, 우정, 친절, 섬세, 힘, 지성 등과 같은 누구나 인정하는 긍정적인 특질들과 관련을 맺는다. 우리는 침실에서 평화를 연상하려 하고, 의자에서 관대와 조화의 비유를 찾고, 수도꼭지에서 정직하고 솔직한 분위기를 구한다. 우리는 우아하게 천장과 만나는 기둥, 지혜를 암시하는 낡은 돌계단, 부채꼴 채광장으로 장난스러움과 예의바름을 동시에 보여주는 조지 왕조 시대의 문간에서 감동을 받는다.

 

시각적 취향과 우리의 가치 사이의 친밀한 제휴를 가장 투명하게 표현하는 사람은 스탕달이었다.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 그의 경구는 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미학에 관한 학문적 몰두와 구별하고 대신 그것을 우리가 전인으로서 윤택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특질들과 통합해주는 미덕이 있다. 행복의 추구가 우리 삶의 밑바닥에 있는 과제라면, 그것은 아름다움이 암시하는 핵심적 주제일 수밖에 없다.

 

스탕달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다양한 목표를 고려하여 ‘행복’이라는 큼지막한 말을 사용했다. 스탕달은 인류가 윤리적인 취향만이 아니라 시각적 취향을 놓고도 늘 갈등을 일으킨다는 점을 이해했기 때문에 이렇게 덧붙였다. “행복을 바라보는 관점만큼이나 아름다움의 스타일도 다양하다.” 건축이나 디자인 작품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번영에 핵심적인 가치를 표현한다는 사실, 우리의 개인적 이상이 물질적 매체로 변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집, 기억과 이상의 저장소

 

(기억) 

어떤 장소의 전망이 우리의 전망과 부합되고 또 그것을 정당화해준다면, 우리는 그곳을 ‘집’이라는 말로 부르곤 한다. 집은 공항이나 도서관일 수도 있고, 정원이나 도로변 식당일 수도 있다. 집을 사랑한다는 것은 또 우리의 정체성이 스스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물리적인 집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의미의 집도 필요하다.

 

딴 세상 같은 벽과 레이스 같은 천장의 목적은 아무리 맨송맨송한 가슴이라도 형이상적 떨림을 그럴 듯한 느낌으로, 아니,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초기 이슬람을 섬기며 일하던 건축가와 화가들 역시 그들의 종교의 주장을 뒷받침할 물리적 배경을 창조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이런 장식은 깔개나 컵에서는 기분 좋을 정도로 복잡하다고 느껴지지만, 공간 전체에 적용하면 최면적인 효과를 낸다. 이슬람 건축가들은 건물에 자신들의 종교를 상징적으로만이 아니라 문자로도 적어 놓았다. 나자리 왕조의 알함브라 궁전 회랑은 코란의 인용문들을 보여준다. 판벽에 꽃무늬 같은 고대 아라비아 문자로 새겨진 그 글은 이런 내용이다. “자비로운 신의 이름으로, 그는 유일신이며, 전체 신이다. 그는 낳지도 않았고,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와 비길 자는 없다.” 이것은 눈높이로 응접실을 감싸고 있는 수많은 찬가의 한 예일 뿐이다.

 

(이상) 

1575년 베네치아는 화가 파울로 베로네세에게 총독궁의 주실인 살라 델콜레지오의 새 천장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그 방은 행정장관이 회의를 열기도 하고, 저명인사와 대사들을 영접하기도 하는 곳이었다. 베로네세는 중앙 패널에서 이 도시를 침착하고 아름다운 바다의 여왕으로 묘사했다. 두 시녀가 여왕의 시중을 들었는데, 한 시녀는 정의를 상징했고(저울을 들고 있다) 또 한 시녀는 평화를 상징했다(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졸고는 있지만 꽤 사나워 보이는 사자를 묶은 줄을 쥐고 있다). 가장자리의 작은 패널들은 이를 보완하는 베네치아의 미덕들을 보여준다. 고분고분한 양이 무릎에 발을 얹고 있는 금발의 젊은 하녀는 온유다. 그녀 옆에서 성 베르나르의 목을 쓰다듬는 우수에 잠긴 갈색 머리의 처녀는 충실이다. 이들 건너편에서 짧은 드레스를 입고 사과, 포도, 오렌지가 흘러넘치는 풍요의 뿔을 든, 뺨이 발그레하고 약간 통통한 처녀는 번영이다. 그녀 맞은편에서 한쪽 가슴을 드러내고 사악해 보이는 독수리(아마 투르크나 스페인을 나타낼 것이다)의 깃털을 뽑으며 태연하게 웃음을 짓는, 땋은 머리에 단단해 보이는 처녀가 절제다. 베로네세의 천장으로 보건대 베네치아 공화국은 정의와 평화와 온유와 충실이 넘치는 곳이었다.

 

이상에만 눈을 맞추었을 때 생기는 곤혹스러운 결과는 그것이 결국 우리를 슬프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빵 몇 덩어리를 부지런히 나르는 엄숙한 표정의 소년을 그린 피터르 데 호흐의 그림이나 존 우드 2세가 바스에 세운 로열 크레센트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게 될 순간을 예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시들게 하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과 우울이 뒤섞인 묘한 것이다.

 

기독교 철학자들은 아름다움이 자극하는 슬픔에 특히 민감했다. 중세의 사상가인 생 빅토르 후고는 이렇게 말했다. “눈에 보이는 대상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때 우리는 물론 기쁨을 경험한다. 그러나 동시에 엄청난 공허함도 경험한다.” 종교의 설명을 따르면, 심리학적으로 흥미로운 만큼이나 이성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이런 슬픔을 느끼는 것은 아름다운 것들이 한때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흠 없는 삶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성스러운 것의 한 조각이며, 그것을 보면 우리가 누릴 수 없는 삶에 대한 상실감과 갈망 때문에 슬퍼진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을 사고 싶다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지만 우리의 진정한 욕망은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기보다는 그것이 구현하는 내적인 특질을 영원히 차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보자면, 그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대상과 장소를 물리적으로 소유하기보다는 내적으로 닮는 것이다.

 

(이상이 변하는 이유) 

왜 아름다운 것을 향한 마음이 바뀔까? 1907년 독일의 젊은 미술사가 빌헬름 보링거는 <추상과 감정이입>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그런 변화를 심리학적 관점에서 설명해 보려했다. 보링거는 인간의 역사에서 예술에는 오직 두 가지 기본 유형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추상적 예술’과 ‘사실적 예술’이다. 추상 예술은 비잔티움, 페르시아,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콩고, 말리, 자이레에서 인기를 누렸다. 추상예술은 대칭, 질서, 규칙성, 기하의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 보링거는 이와 대조적으로 사실적 예술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미학을 지배했으며, 경험을 떨림과 색채로 손에 잡힐 듯이 전달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보링거 이론의 가장 강력한 측면은 한 사회가 한 가지 미학적 스타일에서 다른 스타일로 충성심을 옮겨가는 이유데 대한 설명이다. 보링거는 그것을 결정하는 요인이 그 사회에 결여된 가치에 있다고 믿었다. 조화, 고요, 율동과 융합된 추상예술은 주로 차분함을 갈망하는 사회-법과 질서가 흔들리고, 이념이 변하고,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혼란 때문에 신체적인 위협을 강하게 느끼는 사회-에서 호소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내적, 외적 질서를 달성한 사회, 그래서 그 안의 삶이 예측 가능하고 또 지나치게 안정적인 사회에서는 그와 대립되는 갈망이 생겨난다. 시민들은 일상과 예측가능성의 숨 막히는 손아귀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하며, 심리적 갈증을 달래고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강렬한 느낌을 다시 확인하려고 사실적 예술로 돌아가게 된다.

 

1923년에 프랑스의 기업가 앙리 프뤼게는 유명하지만 아직 상대적으로 검증이 덜 된 당시 36살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에게 자신의 육체노동자들과 그 가족을 위한 주택들을 지어달라고 위임했다. 보르도 근처 레제와 페사크에 있는 프뤼게의 공장들 옆에 자리 잡은 이 주택단지는 모더니즘의 모범이 되었다. 모두 장식이 없는 상자 모양으로 지었으며, 거기에 긴 직사각형의 창, 평평한 지붕, 아무 장식도 없는 벽이 달려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특히 이 건물들에 이 지역이나 농촌을 나타내는 표시가 없다는 사실을 자랑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노동자들을 위해 설계했으며, 산업과 과학기술에 대한 그의 찬탄은 콘크리트로 지은 작은 장식 없는 넓은 면과 그대로 드러난 백열전구에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곳에 입주한 세입자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위대한 건축가의 설계를 망친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도 않고, 꽃무늬 벽지를 바르고, 자신의 출신 고장에서 하던 대로 말뚝 울타리를 세웠다. 그런 뒤에는 앞뜰에 다양한 장식용 분수와 땅신령을 세웠다. 입주자들의 취향은 건축가의 취향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을지 모르지만, 이런 취향들을 현실적으로 표현하는 행위 뒤에 놓인 논리는 똑같았다. 유명한 모더니스트 르 코르뷔지에와 마찬가지로 공장 노동자들 역시 자신의 생활에서 불충분한 특질들을 환기시키는 스타일을 사랑한 것이다.

 

건물의 미덕

 

(질서) 

“당신들은 이 건조한 숫자들이 시와 대립한다고 불평하기 좋아하지!“ 르 코르뷔지에는 우리가 그런 설계도나 대칭을 이루는 다리, 건물, 광장의 형태에 내재한 아름다움을 간과하는 것에 절망하며 그렇게 비난했다. “이런 것들은 아름답다. 일관성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자연이나 인간 도시 한가운데서 이곳이야말로 기하가 있는 장소이며, 실용적인 수학이 지배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기하는 순사한 기쁨이 아닐까?”

 

기하가 자연에 대한 승리를 대표하기 때문에 기쁨이라는 것이다. 감상적인 독법이 제시하는 것과는 달리 자연은 사실 우리가 생존을 위해 의지하는 질서와 대립한다. 자연은 그냥 내버려두면 망설임 없이 우리 도로를 짓밟을 것이며, 건물을 할퀼 것이며, 우리 벽에 제멋대로 덩굴을 뺏어, 우리가 신중하게 짜 놓은 기하학적 세계를 원시의 혼돈으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 자연의 길은 인간의 작업을 부식하고, 녹이고, 약화시키고, 더럽히고 갉아먹는 것이다. 결국 자연이 승리를 거둘 것이다. 우리는 머리 한쪽 구석에서 이런 불가피한 재앙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거리의 아름다움에 특히 민감하다. 그곳에서 우리의 생존의 핵심을 이루는 특질들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질서를 향한 충동은 삶을 향한 충동과 동의어임이 드러난다.

 

1849년 존 러스킨은 시각적 조화가 갑자기 사라진 사태에 당황하여 그렇게 말했다. 러스킨은 “작업장이나 교회를 지을 때마다 새로운 건축이 반영되는” 것보다 더 해로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물었다. 러스킨은 건축이 ‘한 학파’의 작품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오두막에서 왕궁에 이르기까지, 예배당에서 바실리카에 이르기까지, 한 나라의 건축의 모든 특징은 그 언어나 주화와 마찬가지로 함께 사용해야 한다.”

 

이탈리아 알프스 높은 곳에서는 또 하나의 건물이 농촌과 도시, 농업적인 것과 산업적인 것 사이의 만만치 않은 긴장을 해소해준다. 헤르초크와 드 뫼롱의 스톤 하우스는 콘크리트 틀을 드러내놓고 있으며, 그 안에 주변의 산비탈에서 캐온 돌들을 모르타르 없이 쌓았다. 칸의 예일 센터와 마찬가지로 헤르초크와 드 뫼롱의 집은 이전에도 서로 연결이 될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두 가지 미학적 실-두 가지 종류의 행복이기도 하다-을 재료로 아름다운 무늬를 짜 조화의 효과를 얻어낸다.

 

(균형) 

루이스 칸이 뉴헤이번에 지은 예일 영국미술센터의 로비에는 콘크리트 벽과 거기에 박아 넣은 영국 떡갈나무 판벽의 상호작용 덕분에 또 다른 대립문들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떡갈나무의 힘, 오랜 수명, 고상한 영국인들이 이상화하는 성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콘크리트를 사용하면서 이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졌다. 이 재료는 속도, 경제성을 구현하며, 강화 콘크리트는 야만적인 힘도 보여준다. 칸은 완전히 대립되는 세계에서 온 손님 두 사람을 맞이한 지혜로운 주인처럼, 이질적인 요소들이 서로의 미덕을 인정하고 서로에 대한 의심을 넘어서도록 도왔다. 칸은 콘크리트를 벗겨 두는 것을 창피해하지도 않고, 그 궁핍과 완고를 강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대신 우리에게 그 코끼리 같은 회색의 덩어리에서 새로운 종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라고 권유한다. 동시에 시간이 떡갈나무에 부여한 따뜻한 색조, 맑음 줄무늬 결을 한껏 드러내어, 마음 놓고 떡갈나무가 주는 유서 깊은 기쁨을 맛보고 찬양하게 해준다.

 

광택제를 칠하지 않은 나무에서는 인간의 성실을 본다. 금박을 입힌 판벽에서는 인간의 쾌락주의를 본다. 꽃무늬가 새겨진 유리창과 검은 콘크리트 블록(위트레흐트 대학 도서관의 외벽에서 볼 수 있다)은 남성적 특질과 여성적 특질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쌍둥이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가 건축에서 중시하는, 그리고 ‘아름답다’라는 말을 붙이는 균형은 심리적 수준에서는 정신 건강이나 행복이라고 묘사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결론이 나온다. 건물과 마찬가지로 우리 내부에도 대립물들이 존재하며, 우리는 대체로 이것들을 성공적으로 다루며 살아간다.

 

균형이 잡힌 건물들은 다르게 생각해 보라고 간청한다. 예를 들어 사치와 소박 사이의 전통적 대립을 보라. 사치라는 관념은 웅장, 거만, 오만과 연결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소박은 불결, 무능, 투박 등 여러 가지와 동등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18세기 말 경에 장식된 스웨덴의 스코가홀름 장원 저택의 내부는 이 두 가지 특질을 짝짓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통념과 당당히 맞선다. 가구는 세련된 로코코 스타일로 장식되어 있으며, 부드러운 귀족적 곡선에 꽃장식 조각이 돋보인다. 그러나 눈을 바닥으로 돌리면 특이한 것이 보인다. 의자들이 그 분위기와 어울리는 바닥과 만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실제로는 거칠고 광택제도 바르지 않은 나무판자들, 건초 보관 창고에서나 눈에 띌 만한 그런 판자들을 보게 된다. 이 장원 저택은 새로운 인간적 이상을 제시한다. 여기에서는 사치가 퇴폐를, 인간의 민주주의적 진실들과 접촉을 잃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소박이 고상이나 세련과 종합될 수 있다.

 

(우아) 

우아란 건축물이 힘만 쓰는 것이 아니라 세련되고 경제적인 모습으로 저항의 행동을 할 때-지탱하거나, 가로지르거나, 보호할 때-드러나는 특질이다. 자신이 넘어선 난관을 강조하지 않는 겸손함을 보여줄 때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천재가 단순해 보이게 만들어 놓은 복잡함에서 기쁨을 느낀다. 우리가 어떤 스위스의 집이 우아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 창문들이 콘크리트 벽과 물 흐르듯이 연결되어 있고, 집을 짓는 데 흔히 나타나는 소란스러움이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창문 또한 건축적인 우아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다. 여기서 결정적 요소는 유리와 그것을 지탱하는 틀의 관계다. 관찰력이 예민한 방문자라면 파리의 앙리 라브투스트의 비블리오테크생트 제니비에브의 튼튼한 아치들 안에서 주철로 만든 일련의 작은 꽃들을 발견할 것이다. 이 꽃들이 우아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을 만드는 데 특별히 공을 들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쁘고 종종 무관심한 세상에서 이 꽃들은 인내와 관용, 어떤 다정함, 나아가서는 사랑의 표시다. 숨은 동기가 없는 친절의 표시다. 건축가는 그 꽃들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고 우리의 이성을 매혹시킬 수도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만들어 놓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 꽃들은 또 예의의 표시, 힘든 과제를 의무적으로 이행하는 태도 이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충동의 표시이기도 하다. 나아가 희생의 표시이기도 하다.

 

(일치) 

건물이 자신의 각 부분과 조화를 이룰 뿐 아니라 그 배경과도 조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없는 장소와 시대의 중요한 가치와 특징에 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건물이 자신의 문화적 맥락을 반영하는 것은 기후적인 조건에 대응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임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무시하는 건물은 열대에서 열리지 않거나 산 속에서 닫히지 않는 창문이 달린 건물처럼 곤혹스러움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J. W. 괴테는 <독일 건축에 관하여>(1772)에서 독일은 그 ‘본질’에서 기독교도의 나라이며, 따라서 새로운 독일 건물에 어울리는 유일한 스타일은 고딕이라고 선언했다. 괴테는 어떤 성당을 보자마자 이렇게 썼다. “독일인은 ‘저것이 독일 건축이다. 우리의 건축이다’ 하고 크게 외칠 수 있으며, 이것을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떤 나라도 하나의 스타일을 소유하거나, 선례 때문에 어떤 스타일에 묶이지 않는다. 한 나라의 건축적 정체성은 그 나라 전체의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그 땅이 지시한다기보다는 창조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민족적 스타일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무엇을 민족적 스타일로 삼을 것이냐이다.

 

제대로 맥락을 잡은 건물이라면 그 시대와 장소의 가장 바람직한 가치와 가장 높은 야망 가운데 일부를 체현한다고 규정할 수 있다.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이상을 담은 저장소 역할을 하는 건물인 셈이다. 그런 건물의 속성은 똑같은 맥락에서 존경을 할 만한 모범적 인물의 속성에 비유할 수 있다. 오스카 니마이어는 자신의 건축 작업이 그 시대의 가장 계몽된 브라질 사람들의 전망과 태도를 공유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건축은 그들의 나라의 식민지 과거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 짐과 특권에 감사해야 하며, 현대 과학기술에 공감해야 하며, 그러면서도 건강한 장난기와 관능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건축이 브라질의 “하얀 해변, 거대한 산-아름답게 그을린 여자들”과 친근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니마이어는 말했다.

 

(자기인식)

르 코르뷔지에는 도시가 유례없는 위기를 맞은 순간에 파리 계획을 입안했다. 『내일의 도시와 그 계획』과 『빛나는 도시』라는 제목의 책에 포함된 그의 성명은 과거와 극적인 단절을 요구했다. “기존의 중심부는 쓰러져야 한다. 모든 위대한 도시는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 중심을 재건해야 한다.” 도시의 땅의 50퍼센트까지 공원으로 만들 계획이니 녹지도 풍부할 터였다. 르 코르뷔지에는 “운동장이 문간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 새로운 도시는 단지 공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거대한 공원이 될 터였다. 동시에 르 코르뷔지에는 도시의 거리를 없앨 계획이었다. 그는 차와 사람 양쪽의 정당한 요구가 늘 불필요하게 타협을 본다는 사실에 분개하면서, 이 둘을 나눌 것을 권했다. 르 코르뷔지에에게 비논리적 도시의 축도는 파리보다도 뉴욕이었다.

 

얄궂게도 르 크로뷔지에의 꿈 덕분에 태어난 것이 현재 역사적 파리를 둘러싸고 있는 디스토피아적인 주택단지들이다. 관광객들은 도시로 들어가는 길에 그 황무지 같은 단지들을 보고 혼란과 공포에 싸인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길을 돌린다. 지상 열차를 타고 가장 폭력적이고 타락한 단지로 가 보면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에서, 더 넓은 의미에서 인간 본성에서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르 코르뷔지에는 2699명의 이웃 가운데 불과 몇 명이 파티를 열거나 총을 사기로 결정했을 때 상황이 얼마나 까다로워질지 잊었다. 잿빛 하늘 밑에 강화 콘크리트가 얼마나 칙칙해 보일지 잊었다. 누군가 엘리베이터에서 불을 냈는데 집이 44층에 있을 경우 얼마나 답답할지 잊었다. 그는 또 슬럼가에는 싫어할 만한 것이 많이 있지만, 거리 계획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잊었다. 우리는 둘레에서 연속적인 선을 이루는 건물들에 감사한다. 밖에 나와도 방안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건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빽빽하게 들어찬 것도 아닌 풍경, 가장자리나 선을 무시하고 타워들이 흩어져 있는 풍경에는 왠지 맥 빠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연과 도시화 각각의 진정한 즐거움을 모두 부정해 버리는 풍경이다. 이런 환경은 불편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학대할 위험, 타워들 사이의 들쭉날쭉한 땅에 나와 타이어에 오줌을 누고, 차를 태우고, 마약을 맞을 위험, 다시 말해서 풍경으로부터 아무런 이의 제기도 받지 않고 자신의 본성의 가장 어두운 면을 모두 드러낼 위험도 훨씬 커진다.

 

르 코르뷔지에는 자동차와 보행자를 구분하고 싶은 성급한 마음에 언뜻 보기에는 대조적인 이 두 세력 사이에 묘한 상호의존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지나쳤다. 자동차의 속도를 늦추어줄 보행자가 없으면 차는 과속하기 쉽고 보행자는 약해지고 고립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각기 다른 시설들(주택, 쇼핑센터, 도서관) 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것은 주민들은 우연한 발견의 기쁨을 빼앗기며, 어떤 흔들림 없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행군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묵지근한 분위기의 주택가에 상점과 사무실이 들어서면서 상당한 활기가 돌기도 한다. 아무리 하찮은 것을 팔더라도 장사를 하는 사람과 마주치면 우리 혼자서 끌어내기가 쉽지 않은 에너지가 몸 안으로 흘러들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르 코르뷔지에는 잊은 것이다.

 

나쁜 건축이란 결국 설계만큼이나 심리 파악의 실패이기도 하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곳들은 겸손과 끈기를 갖춘 드문 건축가들의 작품이다. 그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자신의 욕망에 관해 캐 묻는다. 기쁨을 이해하면,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 끈기를 갖고 논리적 설계도로 바꾸어 놓는다. 이런 겸손과 끈기가 결합되어 그들은 우리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던 요구까지 충족시키는 환경을 창조할 수 있다.

 

들의 미래

도널드 킨이 쓴 <일본 문학의 즐거움>에서 그는 일본의 미감은 서양과 매우 다르다고 말한다. 대칭보다는 불규칙성, 영원한 것보다는 덧없는 것, 장식적인 것보다는 단순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지배해 왔다는 것이다. 킨은 그 이유는 기후나 유전자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다만 자국의 미감을 적극적으로 형성해 온 작가, 화가, 이론가들의 활동 결과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낭만주의적인 믿음에 따르면 우리는 각자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에 관한 적당한 관념을 갖게 된다고 하지만, 우리의 시각적이고 감정적인 기능은 무엇에 주목하고 무엇을 높이 평가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줄 외적인 안내자를 항상 요구하는 것 같다. 우리의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많은 것들 가운데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어떻게 가치를 할당할지 판단하는 데 도움을 주는 힘을 우리는 ‘교양’이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 만한 실행 가능한 모범을 제시하는 데는 보통 건물 몇 동과 책 한 권이면 충분했다. 보통 ‘이탈리아 르네상스’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으로 알려진 발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참가자들이 이루어낸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니체는 그것이 실제로는 불과 백 명 정도가 해낸 일이라고 말한다. 또 교과서에서 ‘고전주의의 재탄생’이라고 부르는 혁신 작업은 그보다 적은 수의 옹호자들에게 의존했다. 브루넬레스키의 고아원이라는 단 하나의 건물과 레오네 바티스타 알베르트의 <건축론>(1452년)이라는 한 권의 논문만으로도 세계는 새로운 감수성의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팔라디오 스타일을 영국의 풍경에 박아 넣는 데는 콜런 캠블의 <영국의 건축가들>(1715년) 단 한 권이면 충분했고, 20세기의 환경을 구축한 많은 것들의 출현을 결정하는 데는 르 코르뷔지에의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1923년) 200여 페이지면 충분했다. 어떤 건물들-슈뢰더 하우스, 판스워스 하우스, 캘리포니아 케이스 스터디 하우스 등-은 자신의 규모나 건축 비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이제 아무도 루이 14세처럼 행동할 수가 없다.

 

들 덕분에 우리 집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처녀지보다 열등하지 않을 수 있다. 벌레와 나무들 덕분에 그것들을 덮어버린 건물은 가장 지혜로운, 최고의 행복을 약속할 수 있다.

 

 

5. 불안

 

(지위)

(지위로 인한 불안)

(명제) 지위로 인한 불안은 비통한 마음을 낳기 쉽다. 지위에 대한 갈망은 다른 모든 욕구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이 상황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1) 원인

 

사랑결핍

(높은 지위를 바라는 마음) 어떤 동기 때문에 높은 지위를 구하려고 달려드는가? 돈, 명성, 영향력에 대한 갈망이 주로 손에 꼽힌다. 돈, 명성, 영향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기라기보다는 사랑의 상징으로서-그리고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더 중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은 두 가지 커다란 사랑 이야기로 규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성적인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이 주는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사랑의 중요성) 사랑의 결핍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누군가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고 바구니라도 보내주면 갑자기 인생이란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환희에 젖는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지 아니면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는지 결정한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의 인격을 신뢰할 수도 없고 그 인격을 따라 살 수도 없다.

 

속물근성

 ‘속물근성(snobbery)’이라는 말은 영국에서 1820년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 자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옆에 sinenobilitate(이것을 줄인 말이 ‘s. nob.’이다), 즉 작위가 없다고 적어놓는 관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말은 처음에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곧 근대적 의미, 즉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지위의 상징들을 다급하게 갈망하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 즉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팔고 다니거나 호사스러운 장식물에 연연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는 천박한 가구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그 다수는 런던의 잭슨 앤드 그레이엄이라는 회사의 작품이었다. 이 사회에서는 화려한 장식을 과시하는 물건을 가진 사람들이 존경을 받았다. 사실 사치품의 역사는 탐욕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감정적 상처의 기록으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이 역사는 남들의 경멸에 압박감을 느껴 자신에게도 사랑을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텅 빈 선반에 엄청난 것들을 전시하려 했던 사람들이 남긴 유산이기 때문이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기대

(물질적 진보) 중세 근대 초기 유럽 인구 대다수는 농민 계급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가난했고, 영양 상태가 부실했고, 추위와 공포에 시달렸고, 마흔 살 생일을 맞이하기 전에 고통을 겪다가 죽곤 했다. 평생 일을 해도 그들의 손에 남는 값비싼 소유물은 암소나 염소나 항아리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8세기 초 영국에서 서양의 위대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농경 기술(윤작, 과학적 품종 개량과 토질 강화) 덕분에 농작물 생산은 급격히 늘어난다. 영국의 소비자 혁명은 19세기까지 이어지며 더 확장되었다. 유럽과 미국 전역에 거대한 새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파리의 봉 마르셰와 오 프랭탕, 런던의 셀프리지와 휘틀리, 뉴욕의 메이시가 이때 생겼다.

 

(평등, 기대, 선망) 서양 문명 2000년의 장점은 이제 익숙하다. 무엇보다도 부, 식량, 과학 지식, 소비 물자, 신체적 안전, 기대 수명, 경제적 기회 등이 증가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구의 보통 시민에게 지위로 인한 불안의 수준이 높아졌다. 자리, 성취, 수입을 놓고 걱정이 늘어났다는 뜻이다.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소비자 혁명과 민주적 혁명에 감탄하는 사람이라도 그들이 창조한 근대적인 평등사회가 부딪힌 문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이 문제를 처음으로 깊이 생각해본 사람으로 꼽힌다. 1830년대의 어린 미국을 돌아본 이 프랑스의 법률가이자 역사가는 새로운 공화국 국민의 영혼을 잠식하는 예상치 못했던 병을 분별해냈다. 미국인은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이런 부에도 불구하고 계속 더 많은 것을 요구했으며,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을 볼 때마다 괴로워했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1835)의 ‘왜 미국인은 번영 속에서도 그렇게 불안을 느끼는가’라는 제목의 장에서 불만과 높은 기대, 선망과 평등의 관계를 끈질기게 분석한다.

 

“출생과 운에 따른 모든 특권을 폐지했을 때, 모든 사람이 직업 선택의 자유를 누릴 때, 야망이 큰 사람은 위대한 일을 쉽게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자신이 비범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을 통해 금세 교정되고 마는 망상이다.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자살률 증가를 걱정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자살은 드문 대신 광증이 다른 어느 곳보다 흔하다고 한다.”

 

“귀족 계급의 지원을 받는 왕이 나라를 다스렸을 때 사회는 그 참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맛보기 어려운 몇 가지 행복을 누렸다. 민중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신분 외에 다른 가능성은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지도자와 동등해지기를 기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엄혹한 환경에서 살아갔지만 반감을 품지도 모욕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신이 정해준 불가피한 고난이라고 생각했다. 농노는 자신의 열등한 위치가 불변의 자연 질서의 결과라고 여겼다. 그 결과 운을 불평등하게 타고난 여러 계급 사이에 일종의 친선 관계가 확립되었다. 사회는 불평등했지만, 그것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타락하지는 않았다.”

 

토크빌은 귀족사회와 민주사회는 구성원들의 빈곤 개념이 다르다며, 이 점은 하인이 주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귀족사회에서 하인은 선뜻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런 하인들은, 토크빌의 표현을 빌리면, “드높은 생각, 강한 자부심과 자존심”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는 언론과 여론이 하인들도 사회의 정상에 올라설 수 있다고, 그들 역시 산업가나 판사나 과학자나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무자비하게 부추겼다.

 

토크빌이 미국 여행을 하고 나서 몇 십 년 뒤 사회 구성원에게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는 사회에서 생기는 문제를 심리적인 각도에서 탐사한 사람은 미국인 윌리엄 제임스였다. 제임스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성공을 거두어야만 우리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자존심과 가치관을 걸고 어떤 일을 했는데 그 일을 이루지 못했을 경우에만 수모를 느낀다.

 

“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 밀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실제 성취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자존심 = 이루 것 / 내세운 것)

 

장 자크 루소는 날카롭고 기묘하지만 섬뜩할 정도로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놀랍게도 야만인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4)에서 다들 야만인과 근대의 노동자 가운데 노동자가 더 낫다고 생각이 과연 정말인지 질문했다.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능력주의

(실패에 관한 유용한 옛이야기 세 가지)

①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 책임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가 크다

② 낮은 지위에 도덕적 의미는 없다

③ 부자는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강탈하여 부를 쌓았다.

 

(불안을 일으키는 새로운 성공 이야기 세 가지)

① 빈자가 아니라 부자가 쓸모 있다

② 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토머스 페인은 『인간의 권리』(1791)에서 이렇게 말한다. “문학과 과학에 세습제를 적용하면 이 두 분야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생각하며 혼자 웃음을 짓곤 한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정부에도 적용시켜본다. 세습적인 통치자는 세습적인 작가만큼이나 모순적이다. 호메로스나 유클리드에게 자식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설사 있었다고 해도, 그들이 완성시키지 못한 작품을 아들이 완성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나폴레옹도 페인과 생각이 같아, 통치 초기부터 ‘개방적 인재등용’이라고 이름 붙인 제도를 시행하여, 서양에서는 이 방면에서 가장 앞선 지도자로 꼽히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도 그의 사상은 사라지지 않고 유럽과 미국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갔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모든 사람이 저마다 부리고 쓸 수 있는 힘을 타고 났으므로 그 힘에 맞게 각자 마땅히 가야 할 자리에 가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토머스 칼라일은 부자의 자식들은 돈을 낭비하고 빈자의 자식들은 교육도 받지 못하는 것에 분개했다. “게으른 귀족에 대해서, 잉글랜드의 땅의 소유자들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까?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잉글랜드가 낸 세를 마음껏 소비하고 잉글랜드의 자고 사냥이나 하는 것인데.” 19세기의 많은 개혁가들과 마찬가지로 칼라일이 원하던 것은 모두가 경제적으로 평등한 세상이 아니라 엘리트와 가난한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불평등한 세상이었다. 칼라일이 원하던 것은 능력주의 사회였다.

 

19세기와 20세기의 사회법에서는 능력주의 원리가 승리를 거두었다. 수입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훌륭한 중등교육, 나아가서 많은 경우 대학교육까지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미국이 1824년에 처음으로 진정한 공립 고등학교를 세워 앞장을 섰다. 1890년에는 2,500개로 늘어났다. 1920년대에는 SAT(학력평가시험) 제도가 개발되면서 대학교육이 능력주의 노선을 따라 개혁된다. 이 제도를 만든 하버드 대학 총장 제임스 코넌트와 정부교육평가부장 헨리 촌시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능력주의적 시험을 개발하여 모든 학생의 지능을 공정하고 냉정하게 평가하고, 이것으로 대학 입학에서의 학벌, 인종차별, 속물주의를 끝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철저한 능력 위주 체제를 향한 진전은 느리고, 또 가끔 우연에 좌우되고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19세기 중반부터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는 빈자와 부자의 상대적 미덕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공평한 면접과 시험에 따라 일과 보상을 나누어준다면, 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이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세속적 지위가 내적 자질과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니며, 루소와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부유하고 권세 있는 자들이 반드시 부패한 수단으로 그러한 지위에 올라간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능력과 세속적 지위 사이에 신뢰할 만한 관련이 있다는 믿음이 늘어나면서 돈에도 새로운 도덕적 가치가 부여되었다. 부자는 단지 더 부유할 뿐 아니라,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세기에 특히 미국에서 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이 돈에 대한 견해를 바꾸었다. 낮은 지위는 이제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그래 마땅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③ 가난한 사람들은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의 등장』(1958)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자신에게 모든 기회가 열려 있음을 안다……만일 되풀이하여 ‘바보’라는 낙인이 찍히면 허세를 부릴 수가 없다……이제는 자신이 열등한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와는 달리 기회를 박탈당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열등하기 때문에 말이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게 된다.

 

불확실성

 (불확실한 요인들) 변덕스러운 재능, 운, 고용주, 고용주의 이익, 세계 경제

 

기계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 않는다. 석탄 사용을 중단하고 천연가스를 사용해도 도태된 에너지자원은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신의 가격이나 존재를 줄이려는 시도에 감정으로 대응하는 습관이 있다. 노동자는 화장실에 들어가 흐느끼기도 하고, 실적 미달에 대한 두려움을 술로 달래기도 하며, 해고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이런 감정적인 반응을 보면 지위를 부여하는 격투장 내에 공존하는 두 가지 요구가 드러난다. 하나는 사업의 일차적 목적은 이윤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경제적 요구다. 또 하나는 피고용자가 경제적 안정, 존경, 종신직을 갈망하도록 이끄는 인간적 요구다.

 

고용의 이런 불안정이 문제가 되는 것은 돈 때문만은 아니다. 다시 처음 이야기한 주제로 돌아가 본다면 그것은 사랑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일을 기준으로 남들이 우리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와 세상의 불확실한 조건 사이의 불균형은 지위에 대한 불안을 끈질기게 들쑤시는 다섯 번째 이유가 되는 것이다.

 

2) 해법 

철학 - 사랑결핍의 해법

 (명예와 약점)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제1차 세계대전 무렵 자취를 감출 때까지 결투의 관행 때문에 유럽인 수십만이 목숨을 잃었다. 17세기에는 스페인에서만 5,000명이 죽었다. 셔베리의 허버트 경의 말에 따르면, 1608년 프랑스에서 “결투에서 다른 사람을 죽여보지 못한 사람을 바라볼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잉글랜드에서는 “검을 쥐어보지 않은 자”는 신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어느 사회에서나 지위, ‘명예’의 유지는 모든 성인 남성의 일차적 과제가 되었다. 전통적인 그리스 촌락 사회에서 명예는 티메(time)라고 불렀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샤라프(sharaf)라고 불렀고, 힌두인은 이차트(izzat)라고 불렀다. 어느 경우에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폭력도 불사해야 한다고 여겼다.

 

명예의 문제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눈으로 바라볼지 모르지만, 그러는 우리도 그런 사람들의 정신구조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공유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의 경멸에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지위를 부정당할 때, 예를 들어 일에서 어떤 목표에 이르지 못하거나 가족을 부양하지 못할 때 우리는 온라, 티메, 샤라프, 이자트를 잃어버린 전통적인 공동체의 구성원과 똑같이 괴로움에 시달릴 수 있다.

 

(철학과 약점의 극복) 소크라테스가 장터에서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본 행인이 물었다. “그렇게 욕을 듣고도 괜찮습니까?” 소크라테스는 대답했다. “안 괜찮으면? 당나귀가 나를 걷어찼다고 내가 화를 내야 옳겠소?” 철학자들은 남들이 우리를 보는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모욕은 근거가 있든 없든 우리에게 수치를 준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철학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라는 후광 없이도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고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철학은 불안도 종류에 따라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데미아 윤리학』(기원전 350년경)에서 인간 행동은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보통 극단으로 흐르는 오류를 범한다고 설명한 뒤, 지혜로우면서도 침착한 중도를 이상으로 제시하며 이성의 도움을 받아 중도에 이르는 것을 행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적인 염세주의) 샹포르는 그의 이전과 이후의 여러 세대의 철학자들의 염세적 태도를 반영하여 이렇게 간단히 정리했다. “여론은 모든 의견 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다.”,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 생각, 어디서나 받아들여지는 관념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믿어도 좋다. 다수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소품과 단편집』(1851)에서 다른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는 욕망에서 가장 빠르게 벗어나는 방법은 그들의 진정한 성격을 파악하는 것인데, 대부분의 경우 이들의 성격은 지나치게 야만적이고 어리석다고 말했다.“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모든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이 줄어들수록 더 낫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피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해서 벗을 사귀고 싶은 욕망이 없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샹포르는 이렇게 말한다. ”혼자 사는 사람을 두고 사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것은 밤에 봉디 숲에서 산책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 산책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철학자들은 함께 모여 연구를 한 것도 아닌데 입을 모아 외부의 인정이나 비난의 표시보다는 우리 내부의 양심을 따르라고 권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서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술 – 속물근성의 해법

 (머리말) 아널드의 『교양과 무질서』는 우선 예술에 대한 몇 가지 공격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다수가 보기에 예술은 “인간의 곤궁에 바르는 향기 나는 고약이며, 세련된 무위의 정신을 숨 쉬는 종교로, 이 종교의 신자들은 악의 뿌리를 뽑는 일을 거들기를 거부한다. 예술은 종종 실용적이지 못하다거나, 일부 비평가들의 좀 더 친숙한 표현을 빌리면, 구름 잡는 이야기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아널드의 말에 따르면 위대한 예술은 구름 잡는 이야기이기는커녕, 삶의 가장 깊은 긴장과 불안에 해법을 제공하는 매체다.“ 예술이 아무리 비실용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예술은 무엇보다도 존재의 부족한 부분을 해석하고 그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보라. 아널드는 제안한다. 거기에서 ”인간의 잘못을 없애고, 인간의 혼돈을 정리하고, 인간의 곤궁을 줄이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 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 아널드는 이런 태도의 핵심을 이루는 선언으로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한다. 예술은 ”삶의 비평“이다.

 

(예술과 속물근성) 제인 오스틴은 1813년 봄에 『맨스필드 파크』를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출판했다. 오스틴은 사회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표준 렌즈, 즉 부와 권력을 크게 보여주는 렌즈를 인격의 특질을 확대해 보여주는 도덕적 렌즈로 바꾼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주인공 페니는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임이 드러나는 반면, 다른 가족은 작위와 교양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혼란에 빠지게 된다. 토머스 버트람 경은 속물근성 때문에 자녀 교육을 망치며, 딸들은 결혼을 했다가 감정적인 대가를 치르며, 부인은 심장이 돌처럼 굳는다. 맨스필드 파크의 위계가 거꾸로 뒤집히는 것이다. 오스틴은 “아주 가는 붓으로 작업을 하여 많은 노동을 한 뒤에도 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아주 작은 (5센티미터 폭의) 상아”라는 겸손하면서도 유명한 말로 자신의 예술을 묘사했다. 그녀의 예술은 그녀의 말에 따르면 “한 마을의 서너 가족”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 삶을 비평하고, 그럼으로써 그 삶을 바꾸려는 시도다.

 

조지 엘리엇은 『미들마치』(1872)의 서두에서 눈에 보이는 분명한 공적만을 존중하는 경향을 언급하면서 그녀의 여주인공의 지위와 성 테레사(1512~1582)의 지위를 비교하는, 언뜻 무모해 보이는 일을 감행한다. 스페인의 성자만큼 똑똑하고 창조적이지만 자신의 잘못과 불리한 사회적 조건 때문에 위대한 행동으로 자신의 특질을 표현하지 못한 사람, 따라서 내적 자아와 비례하지 않는 지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도 세상에는 많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미들마치』가 이야기하려는 것도 19세기 전반기에 영국의 한 도시에 살았던 바로 그런 여자 도로시아 브룩의 삶이다. 이 소설에서 엘리엇은 “영적인 숭고함”이라도 “오랫동안 인정받은 행위”와 연결되지 않으면 무시해 버리는 세상의 습관을 비판한다. 엘리엇은 도로시아가 비록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결혼을 했고 눈에 띄게 이루어놓은 일이 없기는 하지만, 가정에서 우회적인 방식으로 드러난 그녀의 인격이 아빌라의 성 테레사 못지않게 성스럽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잡-밥티스트 샤르댕은 1746년에 <회복기 환자의 식사>를 그렸다. 그는 재능 있는 화가였지만 신기하게도 빵조각, 깨진 접시, 칼과 포크, 사과와 배, 나아가서 평범한 부엌과 거실에서 자기 할 일을 하는 노동 계급이나 중하층 계급 인물들에 관심을 쏟았다. 프랑스의 미술 아카데미가 규정한 규칙에 따르면 이것은 위대한 화가가 그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카데미는 1648년 루이 14세가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중요성을 기준으로 여러 장르의 회화의 등급을 정했다. 이 위계의 꼭대기에는 역사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고결한 면을 표현하거나 성경의 교훈적 이야기를 묘사하는 그림이었다. 그 다음이 초상화, 그 가운데도 왕이나 왕비의 초상이었다. 세 번째는 풍경화였다. 마지막에야 경멸적으로 ‘풍속화(genre scenes)’라고 부르던, 귀족이 아닌 사람들의 가정생활을 그린 그림이 자리 잡았다. 예술의 위계는 화가의 스튜디오 바깥 세계의 사회적 위계와 직접적으로 일치했다. 그러나 샤르댕의 예술은 여자가 집 안에서 하는 일 또는 오후 햇빛에 반짝거리는 낡은 도기를 하찮게 여기는 인생관을 전복해 버린다. “샤르댕은 배 한 알이 여자만큼 생명으로 가득할 수 있고, 물 단지가 보석만큼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그렇게 말했다.

 

회화의 역사에는 샤르댕과 같은 정신을 가진 화가가 몇 명 있다. 이들은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교정하는 역할을 했다. 웨일스의 화가 토머스 존스도 그런 예다. 19세기 덴마크 화가 크리스텐 쾨브케는 우리가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전복적 관념을 갖춘 세 번째 위대한 화가다. 샤르댕이나 존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쾨브케의 예술에는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지배적인 물질적 관념에 도전하는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 일상생활을 묘사한 위대한 화가들은 제인 오스틴이나 조지 엘리엇처럼 세상에서 무엇을 존경하고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속물적 관념을 교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비극) 삶을 망친 사람들에 대해 수군거리는 말은 가혹하기 짝이 없다. 만일 수많은 예술 작품의 주인공들-오이디푸스, 안티고네, 리어, 오셀로, 엠마 보바리, 안나 카레니나, 헤다 가블러, 테스-도 그들의 운명이 동료나 동창들의 입에 오르내렸다면, 그 과정을 잘 헤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신문에서 그들을 건드렸다면 훨씬 더 괴로웠을 것이다. 비극은 처음 생겨날 때부터 위대한 실패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조롱이나 심판은 삼간 특별한 예술 형식이 있다. 이 형식의 장점은 파국을 맞이한 사람들-불명예스러운 정치가, 살인자, 파산자, 감정적으로 강박감에 사로잡힌 사람-의 행동의 책임을 면제해주지는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어떤 수준의 공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이 마땅히 이런 공감을 받아야 하지만, 실제로 받는 일은 드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기원전 350년경)에서 효과적인 비극의 핵심 요소를 규정하려고 했다. 우선 한 사람의 중심인물이 있어야 하고, 줄거리가 비교적 압축된 시간에 전개되어야 하며, “주인공의 운의 변화”가 “행복한 상태에서 비참한 상태로 가는 것”이어야 한다. 이보다 더 눈에 더 두드러지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비극의 주인공은 윤리적 수준에서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 좋은 자질과 더불어 어떤 약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지나친 자만심이나 격한 기질이나 충동이 있는 사람).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 즉 판단의 잘못이라고 부른 것, 또는 일시적인 맹목, 또는 현실적이거나 감정적인 과실 때문에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여기에서 가장 끔찍한 페리페테이아(peripeteria), 즉 운의 역전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귀중하게 여기던 것을 모두 잃고 거의 언제나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내놓는다.

 

다른 사람들의 실패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공감은 우리 역시 어떤 상황에서는 그들과 같은 재앙에 말려들 수 있다는 느낌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이다. 비극 작가들은 저항할 수 없는 진실로 우리를 이끈다. 역사상 인간이 저지른 모든 어리석은 일은 우리 자신의 본성의 여러 측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예술 형식 개념에 가장 완벽하게 들어맞는 희곡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으로, 기원전 430년 봄 디오니소스 축제 때 처음 공연되었다.

 

1848년 여름 노르망디의 많은 신문에 같은 내용의 짧은 기사가 났다. 루앙에서 멀지 않은 ‘리’라는 작은 도시에서 쿠튀리에 집안에서 태어난 스물일곱 살의 젊은 여자 델핀 들라마르가 결혼생활의 따분함에 불만을 품고 있던 차에 불필요한 옷가지 구매와 사치스러운 살림으로 큰 빚을 지고 바람까지 피우다가, 감정적이고 경제적인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비소를 먹고 자살을 했다. 유족으로는 어린 딸과 수심에 찬 남편 외젠 들라마르가 있다. 외젠 들라마르는 루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리에서 보건소 공무원으로 일했으며, 환자들의 사랑을 받고 공동체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이 신문 기사를 읽은 사람들 가운데는 스물일곱 살의 야심에 찬 소설가 귀스타프 플로베르도 있었다. 마담 들라마르의 이야기는 플로베르가 1851년 9월 『보바리 부인』을 쓰기 시작하여 6년 후 파리에서 출간했다.

 

델핀 들라마르 사건이 신문 기사로 났을 때 지방의 보수적 논평가들은 이것을 젊은이들 사이의 결혼 경시 풍조, 사회의 상업화, 종교적 가치 상실의 예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플로베르에게 예술은 조악한 도덕주의의 정반대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예술은 인간의 동기와 행동을 깊이 탐사하는 영역이고, 이 영역에서는 어떤 사람을 성자나 죄인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조롱했다. 플로베르는 편안한 해답을 바라는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며, 외려 그것을 즐기는 느낌까지 준다. 엠마를 긍정적인 빛 속에 제시하는가 하면 어느 새 아이러니가 섞인 말로 그녀를 깎아내린다. 엠마를 이기적인 쾌락주의자라고 여긴 독자가 그녀에게 인내심을 잃을라치면 플로베르는 독자를 다시 그녀에게 데려가 그녀의 감수성에 대한 이야기로 독자를 울게 만든다.

 

우리는 플로베르의 소설을 덮으면서 우리가 사는 방법을 배우기도 전에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 행동이 엄청난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잘못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이 무자비하다는 사실에 대해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게 된다.

 

(희극) 1831년 여름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 왕은 자신만만했다. 1년 전 그가 권좌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던 7월 혁명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은 사라지고 번영과 질서가 찾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 필리프의 평온을 흔드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1830년 말, 샤를 필리퐁이라는 이름의 스물여덟 살짜리 무명화가가 라 카리카튀르라는 풍자 잡지를 발간하여, 그곳에 왕의 얼굴을 배 모양으로 그려놓은 것이다. 필리퐁은 루이 필리프가 부패와 무능의 상징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필리퐁은 왕을 배로 묘사한 죄로 총 2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로부터 30년 전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권력을 누렸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역시 해학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1799년 권좌에 오르면서 파리의 모든 풍자 신문의 폐간을 명령했으며, 경찰 총수 조셉 푸셰에게 만화가들이 자신의 외모를 마음대로 다루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때는 필리퐁의 역할을 잉글랜드 풍자만화가 제임스 길레이가 대신했다. 나폴레옹은 1802년 아미앵 조약을 체결할 때 자신을 그리는 모든 풍자만화가는 살인범이나 위조범과 똑같이 다룰 것이며, 프랑스로 인도하여 재판에 회부하겠다는 조항을 넣으려 했지만 잉글랜드 쪽 협상자들은 어리둥절해하며 그 요청을 거부했다.

 

만일 유머가 단지 장난에 불과하다면 루이 필리프와 나폴레옹은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인식한 대로 농담은 비판의 한 방법이다. 유머는 불만을 제기하는 데 특별히 효과적인 방법이다. 겉으로는 즐거움만 주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은근히 교훈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1905)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농담을 통해 장애 때문에 공개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적의 우스꽝스러운 부분을 활용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계속해서 농담을 통하여 위험한 메시지가 “농담의 형태가 아니라면 결코 듣지 않을 사람의 귀에도 들어가게 할 수 있다. …… 그래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비판할 때 농담을 특별히 애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웃음은 최고의 익살꾼의 손에 쥐어지면 도덕적 목적을 획득하며, 농담은 다른 사람들이 성격과 습관을 바꾸도록 촉구하는 수단이 된다. 농담은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고, 더 공정하고 더 멀쩡한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새뮤얼 존슨이 말했듯이 풍자는 “악이나 어리석음을 비난하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존 드라이든의 말을 빌리면,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다.

 

정치 – 기대와 능력주의의 해법 

(이상적인 인간형) 사회마다 각기 특정한 종류의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 높은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들이 계속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지위에 대한 불안을 촉발하는 요인들도 바뀌어간다. 이상적인 지위는 오래전부터 계속 바뀌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정치라는 말을 사용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집단이 스스로 존엄을 얻고자 이전 체제에서 이익을 보던 사람들과 맞서 공동체의 명예체제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집단은 투표함, 총, 파업, 때로는 책을 이용해 높은 지위를 누릴 정당한 권리를 가진 사람이 누구냐에 대한 공동체의 관념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현대의 지위 불안에 대한 정치적 관점) 경제적인 능력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진정한 능력이란 연봉이라는 매개 변수로 말끔하게 포착할 수 없는 모호하고 복잡한 특질이라고 주장해왔다. 조지 버나드 쇼는 『지적인 여자를 위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안내』(1928)에서 쇼는 소득을 근거로 어떤 사람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일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부의 차이로 인해 비참한 결과가 생기는 것을 가능한 한 막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존 러스킨은 『이 최후의 사람에게』(1862)에서 비꼬는 투로 부자와 성격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부자가 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근면하고, 결단력 있고, 자신만만하고, 열의가 있고, 신속하고, 조직적이고, 분별력 있고, 상상력이 없고, 둔감하고, 무지하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완전히 어리석고, 완전히 지혜롭고, 게으르고, 무모하고, 겸손하고, 사려 깊고, 둔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예민하고, 아는 것이 많고, 앞일을 생각하지 않고, 예상할 수 없게 충동적으로 사악한 모습을 보이고, 꼴사나운 악당이고, 드러난 도둑이자 완전히 자비롭고 의롭고 경경한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부자가 되는 사람이나 빈자가 되는 사람이나 딱히 범주를 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러스킨과 쇼보다 300년 전에 미셸 드 몽테뉴는 비슷한 맥락에서 삶의 결과들을 결정하는 우연적 요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변덕스러운 의지에 따라 우리에게 영광을 베푸는 우연”의 역할을 잊지 말라고 충고했다. “나는 우연이 능력보다 앞서서 한참 앞서서 행진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냉정하게 평가해본다면 우리 자신을 자랑하거나 창피해할 이유가 그리 많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부란 나비에서부터 책이나 미소에 이르기까지 뭐든지 풍부한 상태를 의미한다. 러스킨은 부에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부에 강박감도 느꼈다. 그러나 그가 염두에 두었던 부는 특별한 종류였다. 그는 친절, 호기심, 감수성, 겸손, 경건, 지성-그는 이런 일군의 특징을 단순한 게 “삶”이라고 불렀다-에서 부유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이 최후의 사람에게』에서 부에 대한 일반적인 금전적 관점을 버리고 “삶”에 기초한 관점을 채택하라고 호소했다. “삶, 즉 사랑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보통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실 그들의 금고 자물쇠만큼이나 부유하지 못하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부유할 수가 없다.” 조지 버나드 쇼는 러스킨 탄생 백주년 강연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의 독설과 카를 마르크스의 고발은 러스킨의 저작에 비교하면 시골 사제의 진부한 소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러스킨주의자들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기존 질서에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가장 철저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매슈 아널드는 『교양과 무질서』(1869)에서 러스킨이 그랬던 것처럼 세계 최고의 산언 선진국 백성에게 부는 행복을 확보하는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행복은 “내적인 영적 활동이며, 그 특징은 친절과 빛과 삶과 공감이 확대된다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정치적 변화) 연구를 해보면 지위와 관련된 근대의 이상 역시 자연스럽지도 않고 신이 주신 것처럼 보이지도 않게 된다. 그것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생산과 정치 조직의 변화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 이후 유럽과 북미로 퍼져나갔다. 신문과 텔레비전에 주입되어 있는 물질주의, 기업가 정신, 능력주의에 대한 열망은 체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그리고 다수는 이 체제에 의해 생계를 유지한다. 이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지위와 관련된 이상 때문에 생기는 불편이 기적적으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정치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용한 것을 가르쳐준다. 그 결과 피해의식, 수동적 태도, 혼란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기독교 

(죽음) 톨스토이의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주인공은 오래전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식었고, 자식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며, 그의 출세나 도와줄 사람이나 높은 지위에 있어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외에는 친구가 없다. 이반 일리치는 지위에 목을 매단 사람이다. 이반 일리치는 고등법원 판사라는 직위를 즐기지만, 그것은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존중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반은 이제 살날이 몇 주 안 남은 상태에서 자신이 지상에서 얻은 시간을 낭비했고, 겉으로는 품위가 있지만 속으로는 황폐한 삶을 살았음을 인식한다. 이반 일리치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아무도 그에게 그가 바라는 동정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기독교적인 죽음의 경고(memento mori)의 훌륭한 전통 안에 자리 잡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세속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휘스트와 저녁 파티보다 진실과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톨스토이는 죽음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을 살핀 기록인 『참회록』(1882)에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로 세계적인 명성과 부를 얻은 뒤인 쉰한 살 때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가치나 신의 가치를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가치를 따라 살았으며,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강해지고, 유명해지고, 중요해지고, 부유해지고자 하는 불안한 욕망을 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죽음을 생각하자 이전의 야망들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심이 생겼다. 결국 그의 의문을 가라앉힌 답은 신이었고 톨스토이는 여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살게 된다.

 

광대한 풍경 역시 폐허와 마찬가지로 불안을 다독여주는 효과가 있다. 폐허가 무한한 시간의 대표자이듯이 이런 풍경 역시 무한한 공간의 대표자로, 거기에 비추어보면 우리의 허약하고 수명도 짧은 몸은 나방이나 거마와 마찬가지로 보잘것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은 우리 자신을 더 중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느끼는 불안의 좋은 치유책은 세계의 거대한 공간을 여행하는-실제로 또는 예술작품을 통하여-것일 수도 있다.

 

(공동체) 모든 인간이 귀중하다는 인식을 회복할 수 있을 때, 그런 인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과 태도를 조성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어둡게 보지 않는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된다. 이것이 공동체의 윤리에 적용할 수 있는 기독교적 통찰이다. 이상적인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존엄과 자원의 기본적 평등 덕분에 승자 옆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제어되고 경감된다. 성공하여 피어날 것이냐 아니면 실패하여 시들 것이냐 하는 이분법의 그 가혹한 칼날도 약간은 무디어지는 것이다.

 

(두 도시) 모든 사람이 서로 연관이 없는 두 가지 종류의 지위를 가진다. 하나는 직업, 소득, 평판으로 결정되는 세속적 지위다. 또 하나는 사람의 영혼과 심판의 날에 신의 눈에 드러나는 장단점으로 결정되는 영적 지위다. 사람들이 부와 미덕을 구분한다면, 또 중요한 사람이냐 아니냐만 따지지 않고 선한 사람이냐 아니냐도 따진다면, 그것은 많은 부분 수백 년 동안 자신의 자원과 위신을 이용하여 지위의 의로운 반배에 대한 몇 가지 특별한 관념을 옹호해온 기독교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보헤미아 

1845년 7월, 19세기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보헤미안 가운데 한 사람인 헨리 소로우는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시 근처 월든 호수의 북쪽에 자신의 손으로 지은 통나무집으로 이사했다. 그의 목표는 외적으로는 평범하지만 내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부르주아지에게 물질적으로는 빈약하더라도 심리적으로는 풍족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치품, 생활에 편리한 물건들은 필요불가결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인류의 향상에 장애가 된다.” 소로우는 그렇게 쓰고 난 뒤에, 물건을 소유하는 것과 존경할만한 사람이 되는 것을 연결시키는 사회적 태도를 뒤집고자 이렇게 덧붙인다. “사람은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복해진다.” 소로우가 월든 호수에 머문 뒤 미국에 막 등장한 산업사회에 전달한 메시지의 기조는 소로우 전이나 후의 거의 모든 보헤미안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소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영혼에 필요한 것을 사는 데 돈을 필요하지 않다.”

 

주류 문호와 갈등하면서도 자신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보헤미안들의 통찰이다. 그래서 보헤미안들은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을 고르는 데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보헤미안들은 대도시에 살면서 지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피하고 대신 진정한 친구들과 매일 접촉할 수 있는 동네에 모여 살았다. 보헤미아의 역사에는 그들의 우정으로 유명해진 장소의 이름들이 찬란하게 빛난다. 몽파르나스, 블룸스베리, 첼시, 그리니치빌리지, 배니스 비치.

 

1844년 매사추세츠에서 일단의 유토피아적인 보헤미안 화가들이 프루트랜즈(Fruitlands)라는 이름의 공동체 농장을 세우고, 돈이나 일 자체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예측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 공동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 새로운 농부들은 실제적인 일에 뛰어들기를 머뭇거리는 바람에 첫 여름이 끝나자 계획과는 달리 호메로스나 페트라르카를 읽는 대신 몸과 영혼을 모두 유지하기 위한 다급한 투쟁에 들어가야 했다. 농장 건설 몇 년 전에 보스턴에서 앨콧을 만난 에머슨은 프투트랜즈 회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교의는 모두 영적이지만, 늘 마지막에는 ‘돈을 좀 더 보내주실 수 없습니까?’ 하고 말한다.” 최소한의 부르주아적 규율조차 완강하게 거부한 결과 이상주의마저 맛이 가버리게 되었다는, 귀에 익은 보헤미안의 실패담을 남기고.

 

보헤미아의 기여를 요약하자면 그들이 대안적인 삶의 방식 추구에 정통성을 부여했다고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주류가 과소평가하고 간과하는 가치들이 적절한 권위와 위엄을 부여받았다. 보헤미아는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방법을 옹호했다. 보헤미아는 법률가, 기업가, 과학자라는 역할 모델에 시인, 여행가, 에세이스트를 보탰다. 보헤미아는 이런 인물들 역시 그 기행과 빈곤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름으로 높은 지위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산업가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철학자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6. 영혼의 미술관

 

방법론 

(예술의 일곱 가지 기능) 

① 기억 - 미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방식이며, 우리 주변에는 일시적이고 아름다운 경험이 많은데, 그런 경험을 마음에 담으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② 희망 – 가장 지속적으로 인기를 누리는 미술의 범주는 쾌활하고, 즐겁고, 예쁜 것들이다. 만일 세상이 좀 더 따뜻한 곳이라면, 우리는 예쁜 예술작품에 이렇게까지 감동하지 않을 테고, 그런 작품이 그리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③ 슬픔 –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의외로 중요한 기능들 중 하나는, 고통을 보다 잘 견디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데 있다.

 

④ 균형회복 – 예술의 한 역할이 우리의 정서적 균형을 회복시켜준다는 데 있다는 생각은, 왜 사람들의 미학적 취향이 그렇게 다른가라는 곤란한 질문에도 답이 되어줄 법하다. 예술은 인성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우리를 보다 도덕적으로 만들어준다. 현대에 들어서부터 ‘도덕성’은 대단히 골치 아픈 말이 되었다. 현대의 민주주의적 정치사상에 깔린 핵심 전제 중 하나는, 사람은 누구나 간섭받지 않고, 도덕적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 권위의 변덕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대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크라시아 즉 ‘의지의 박약’이라 부른 결함 때문에 고생한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예의바르게 행동하길 바라지만, 압력을 받으면 옆길로 샌다. 우리는 더 훌륭해지길 바라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동기를 잃어버린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 자신의 인격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라고 격려하는 예술작품을 통해 우리는 막대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⑤ 자기이해 – 알렉산더 포프는 시의 한 핵심 기능을, 우리가 어설픈 형태로 경험하는 생각들을 붙잡아 거기에 명료한 표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예술은 자기 인식을 누적시켜, 타인에게 그 결실을 전달하는 훌륭한 수단이다. 집을 어떻게 꾸밀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고약하게 해석하면, 단지 과시하려 애쓰는 것, 다시 말해 내가 얼마나 굉장하고 크게 성공했는지 보여주려고 애쓰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냥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중요한 뭔가를 드러내 보이길 원한다. 즉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성격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⑥ 성장 – 마음 깊숙이 들여다보면 세계의 예술품 중 불편할 정도로 많은 작품들이 이질적이고 혐오스럽게 다가온다. 피카소는 벨라스케스의 작품(라스 메니나스 – 시녀들)을 단지 차가운 존경심으로 대우해야 할 신성한 대상이라고 느끼는 대신, 그는 큰마음을 먹고 그 작품과 어울려 유희하고 유희를 교양 결핍과 무지가 낳은 슬픈 결과가 아니라 그 작품과 교유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았다. 벨라스케스는 매우 성숙하고 부유하고 유력한 어른들의 세계한복판에 작고 어린 공주를 세워놓고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귀엽고 순진하게 묘사했다. 피카소는 자발성과 단순성을 복구했다. 기하학적 형태들에 자체적인 생명력을 부여했다. 이질적인 예술 덕분에 나는 내 안의 종교적 충동, 내 상상력이 허락하는 한에서의 귀족적인 면, 통과의례를 경험해보고픈 욕구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런 발견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의식을 확장시킨다.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점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⑦ 감상 – 우리의 주된 결점,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 원인 중 하나는 우리 주위에 늘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 있다. 예술에는 파악하기 어려운 일상의 진정한 가치에 경의를 표하는 힘이 있다. 예술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인생을 이끌어야 할 때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일깨워줄 수 있다.

 

(예술의 핵심은 무엇인가?) 예술과 관계를 맺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예술이 우리를 도와 더 나은 삶, 더 나은 자아로 이끌어준다는 확신이다. 예술이 심리적 취약점을 폭넓게 보완할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나쁜 기억의 교정책(기억), 희망의 조달자(희망), 슬픔을 존엄화하는 원천(슬픔), 균형추(균형회복), 자기 이해로 이끄는 길잡이(자기이해), 경험을 확장시키는 길잡이(성장), 감각을 깨우는 도구(감상)

 

(우리는 무엇을 훌륭한 예술로 간주하는가?) 누구나 작품의 명성과 개인의 영혼을 움직이는 힘 사이에 놓인 간극을 한 번쯤은 경험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걸작이 여러 면에서 우리의 내적 필요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관련된 개념들은 저절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 개념들은 후원, 이데올로기, 돈, 교육이 뒤얽힌 복잡한 체계에 대학교육과 박물관의 지원사격이 더해진 결과이며, 이 모든 것이 예술작품의 무엇이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좌우한다.

 

① 기술적 해석 – 예술을 기술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 방향으로 맨 처음 발을 뗀 화가들에게 특권을 부여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렇게 중요한 건 ‘스푸마토’ 즉, 외곽선을 사용하지 않고 형체들을 보여주는 회화기법을 선도적으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브라크가 중요한 건 하나의 대상을 여러 관점에서 묘사해보려는 아이디어를 폭넓게 탐구한 최초의 화가였기 때문이다. 세잔은 관목들을 환기시키기 위해 구획을 나눠 색칠하는 방법을 썼다. 하나의 추상적 패턴을 형성하는 최초의 그리고 중요한 색책의 흔적들이었다.

 

② 정치적 해석 – 예술작품이 존엄, 진리, 정의, 그리고 정당한 경제적 배분 등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중요시하고 강조할수록 그 작품을 좋게 본다.

 

③ 역사적 해석 – 과거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에 따라 예술작품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④ 충격가치 해석 – 예술은 분쇄와 충격을 촉발하는 능력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기도 한다.

 

⑤ 치유적 해석 – 예술은 심리 치유에 도움이 되는 정도에 따라 중요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관점이다. 우리가 그 작품을 좋게 보는 이유는 그 작품이 우리의 영혼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예술을 창작해야 하는가?) 종교와 정부는 영혼과 사회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이해한 뒤 그에 따라 예술의 방향을 지시하고자 했다. 그들에게 예술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을 위한 프로파간다에 불과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예술적 의제는 위안, 자기 이해, 성취를 추구하는 개인을 돕는 데 맞춰질 것이다. 예술은 기념하고, 희망을 주고, 고통에 존엄하게 공감하도록 하고, 균형 회복과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자기 이해와 소통을 돕고, 감상을 고취하고, 그 지평을 넓히고자 할 것이다. 우리는 슬픔에 품위 있게 공명하고 우리의 외로움과 혼란을 덜어주는 예술의 힘을 찾을 필요가 있다.

 

(예술은 어떻게 사고 팔아야 하는가?) 미술관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주요 능력은 판매 수완이 아니라 고객의 내면에 무엇이 부족한지 진단하는 능력이다. 미술상은 개인이 균형을 회복하는 데 어떤 종류의 작품이 필요한지 확인하고, 그 필요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충족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예술은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가?) 예술을 보고 생각하는 주된 방법들 중 기술적, 정치적, 역사적, 충격가치적 해석 접근법들에 대한 강좌의 임무는 문제의 작품들이 그 창작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우리에게 최대한 많은 지식을 전달하는 데 있다. 강좌는 의도적으로 개인적인 것들을 배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작품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거나, ‘나는 1300년에서 1500년 사이의 어느 화가, 조각가와 어떤 문제와 쟁점을 공유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신경 써서 피하고 있다.

 

어떤 작품의 의미가 사실은 매우 직접적이라면? 또한 작품의 중요한 임무가 그 메시지가 속해 있는 곳인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의미를 확장하는 것이라면? 학자들은 그들이 감탄하는 작품의 정신을 어떻게 하면 관람객의 심리적 약점과 보다 긴밀히 연결시킬 수 있을지 연구해야 한다. 예술이 어떻게 상심한 마음을 위로하는지, 개인의 슬픔을 어떻게 큰 시야로 보는지, 어떻게 자연에서 위안을 찾게 해주는지, 어떻게 우리의 감수성을 훈련시켜 타인의 필요를 감지하게 하는지, 어떻게 성공적인 인생의 올바른 이상을 우리의 마음에 분명히 제시하는지, 어떻게 우리가 자신을 이해하도록 돕는 지 분석해야 한다.

 

(예술작품은 어떻게 전시해야 하는가?) 오늘날 대형 미술관의 전시실은 학술적이고 역사적인 방식으로 ‘북이탈리아 유파’에서 출발해 ‘계몽주의 예술’을 통과한 뒤 ‘19세기’로 넘어간다. 이 방식은 범주를 학술적으로 구분하려는 태도를 반영하며, 문학 강좌를 ‘미국 소설’이나 ‘알레고리에서 사실주의로’와 같이 정하는 방식과 같다. 관람객이 품고 올 수도 있는 필요의 범위는 안중에 없다. 미술관은 예술가의 작품을 통해 그들이 사랑했던 것을 우리도 사랑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곳이다. 진정 이상적인 미술관이라면 훌륭하고 중요한 것들을 매우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널리 보급하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높은 벽 뒤에 보물을 쌓는 일에 열정을 쏟는 대신, 예술작품의 가치를 이 세계에 보다 널리 전파하는 데 전념할 것이다.

 

사랑

 (우리는 더 잘 사랑할 수 있을까?) 예술의 사명을 정의하자면 그 임무들 중 하나는 우리에게 연인이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델포트의 안뜰을 그린 피터르 더 호흐의 그림은 참을성 있고 성숙한 사랑의 능력을 강화하는 데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된다. 깊은 감사의 마음이 엿보이는 고요하고 겸손한 순간을 면밀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호흐는 우리 주위의 덜 좋은 본보기들에 적절히 대응하며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기대를 형상화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좋은 연인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좋은 연인이 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는 생각에는 값싸고 부조리한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는 듯 느껴진다. 우리가 진실한 사랑을 자연스러움과 연결시키는 낭만주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할 줄 아는 건 감탄하는 것과 다르다. 연습을 안 하면 좀처럼 도움이 안 되는 자질이 필요하다. 상대방 말에 예의바르게 귀 기울이는 능력, 인내심, 호기심, 회복력, 관능, 이성 같은 것 말이다.

 

플라톤 철학에서는 선이란 사람에게서 보이든 책이나 의자 디자인에서 보이든 근본적으로는 같은, 전이 가능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한 영역에서 선을 알아보면, 다른 영역에서도 그것을 더 민감하게 알아보고 격려할 수 있게 된다. 미래의 미술관에서, ‘사랑 전시실’은 다음과 같은 성품들에 대한 우리의 감탄을 이끌어내기 위해 예술적 자원을 이용할지도 모른다.

 

(세부에 주목하는 능력) 판 데르 휘스는 꽃과 잎을 묘사하는 데 심형을 기울였다. 흰 붓꽃은 순결을 암시하기 위해 존재하고, 유리잔에 꽂혀 있는 일곱 송이의 보라색 꽃은 예수의 마지막 일곱 단어를 상징한다. 판 데르 휘스가 붓꽃의 그림자에 세심하게 마음을 썼듯, 우리 성격의 미세한 면, 신체의 움직임, 엉뚱한 지리학적 이해에도 그렇게 마음을 써줄 사람을 찾게 되길 갈망한다.

 

① 인내 – 리처드 롱의 서체는 소박하고 단어는 명료하다. 인내는 스릴과 거리가 멀다. 사실 인내는 흥분하지 않고 지내고, 욕구 충족을 미루고, 지루함과 무덤덤함을 견디는 능력이다. 좋은 연인 관계는 인내에 달려 있음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즉각적인 만족(말다툼에서 이기기, 상대방에게 죄책감 안기기, 내 고집대로 하기)을 버려야 한다. 그런 포기들이 물방울처럼 모이고 쌓일 때 연인들은 그들의 순례를 마칠 수 있다.

 

② 호기심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메모와 스케치는 우리에게 사랑의 중요한 일면을 가르쳐준다. 레오나르도는 경험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바라보고, 세계의 진정한 다양성과 개체성을 존중하는 태도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가르쳐준다.

 

③ 회복력 – 주디스 커의 유쾌한 동화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1968)를 보면, 소피와 소피의 엄마와 함께 차를 마시러 느닷없이 호랑이가 등장한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회복력이다. 불운하고도 아주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끝나진 않는다. 문제에 맞는 해결책은 어딘가에 있고, 예상치 못한 일은 적응하면 된다. 어려움은 기회로 바뀐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소피의 부모로, 나약해지거나, 쉽게 흥분하거나, 격노하지 않는 그들만의 삶의 조용한 방식은 믿음직하다. 단숨함, 정직함, 겸손함은 모두 이런 것을 의미한다.

 

④ 관능 – 관능은 촉감과 움직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즐기는 것이다. 사실 연인 관계가 발전할수록 관능적 안락함-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흔드는 즐거움, 서로 애무를 주고받는 즐거움-을 찾기는 어려워진다. 오스카르 니에메예르의 카오아스 저택은 그런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세심하게 환경을 조성했다. 카노아스 저택은 관능을 세련되고 성숙한 삶의 일부로 변환한다. 관능을 젊은 사람, 야한 사람, 예쁜 사람만의 전유물이라고 보는 대신, 회계사나 공공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도 자신의 육체를 즐길 수 있는 장소를 창조했다.

 

⑤ 이성 – 이성(또는 좀 더 부드럽게 표현하면 ‘합리성’)은 좋은 연인이 되는 것과 무관하고 심지어 그에 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브루넬레스키는 매우 합리적인 건축가다. 이 아케이드에서 그는 명료한 이성을 위해 존재하는 모든 요소를 설계했다. 브루넬레스키의 태도에는 매력적인 공공건물을 창조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목표가 있다. 인간관계에서 단단하고 건설적이 주체가 되려면 이성이 필요하다는 것. 친한 사이에서는 고충과 좌절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피렌체 고아원은 해명하고 정당화하려는 우리의 욕구가 관계의 건설적인 부분이 될 수 있다고 자애롭게 약속한다.

 

⑥ 전체적 관점 - 푸생의 그림에서 그 유명한 방주는 수평선 위의 회색 얼룩으로 보일 뿐이다. 푸생은 비관론자다. 푸생은 고통은 정상이라 믿으며, 대부분의 희망은 이뤄질 수 없고, 생존만이 가능한 성취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간의 삶이란 한 조각 재앙 같다는 신의 환멸적인 태도를 공유하게 된다. 인생은 대게 나쁜 쪽으로 흘러간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면, 즉 좋은 관계란 생득권이라기보다는 일어나기 드문 경우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것을 덜 당연시하게 된다. 행복은 당신이 아주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대홍수>와 그런 유의 이미지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때 우리는 우울해지기보다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가지려 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고통은 의미가 달라진다. 상심은 부당하게 당신을 겨누어 날아온 잔인한 일격에서 일반적인 경험으로 바뀐다.

 

(흥분해도 될까?) 고대 그리스 예술에서 페이거니즘은 육체적 매력을 대하는 태도다. 기독교도들과 비교할 때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내적 우수성뿐 아니라 외모의 우수성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특이했다. 페이거니즘은 육체의 아름다움을 믿고, 우리의 외적 형태가 하는 약속을 낙관적으로 받아들인다. 미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칼론(kalon)은 육체적인 사랑스러움과 내면의 우수함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리스인들 이후로 일련의 미술가들이 이 페이거니즘 정신을 따랐는데, 보티첼리, 티치아노, 클림트, 피카소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육체와 정신을 분리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육체적 외피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더 높은’ 가치에 반하는 것도 아니다. 예술사적으로 보면 이는 하나의 사조이기도 하지만, 인간 정신의 여러 가닥을 성숙하게 통합한 증거이기도 하다. 현대에 이르러 포르노그래피와 예술을 구분하는 현상을 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들에겐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만 있었다. 페이컨 아티스트들은 섹스와 미덕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섹스를 허락해도 더 높은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며, 오히려 섹스를 끌어들이면 그런 가치들을 굳건히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교훈이다.

 

우리는 인간 본성을 보다 통합적으로 보는 감각을 이끌어낼 수 있다. 에로틱한 흥분을 즐길 수 있는 능력, 정서적 친밀감을 바라는 우리의 욕구, 안정된 가정생활을 바라는 우리의 갈망은 우리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끌고가지 않는다. 이 작품들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최고의 사랑이라고 자연스레 상상하는 상태의 한 측면이 바로 육체와 정신의 조화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 쉽게 지루해지고, 사람이든 사물이든 일단 알고 나면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없다고 선언하는 보편적 경향이 인간적 약점이다. 19세기 평범한 프랑스인에게 아스파라거스는 식재료나 내다팔 작물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1880년 에두아르 마네가 아스파라거스 몇 줄기를 섬세하게 묘사하자, 세계는 이 먹을 수 있는 여러해살이 개화식물의 조용한 매력에 이목을 집중했다. 오랜 된 연인 관계에서 현재에 안주하는 습관을 깨고자 할 때 우리는 마네가 그의 채소에서 발휘했던 변형의 상상력을 우리의 연인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겹겹이 쌓인 습관과 타성 밑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면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연인이 쇼핑 카트를 밀거나, 심통 난 어조로 전기 회사를 욕하거나, 직장에서 풀이 죽어 퇴근하는 모습을 너무 자주 본 탓에, 그 혹은 그녀의 내면에 모험적이고, 충동적이고, 장난스럽고, 지적이고, 무엇보다 사랑할 가치가 있는 차원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잊고 만다.

 

(여행을 위한 용기) 예술의 도움으로 우리는 어려움에 대한 인식과 소중한 것을 거머쥐는 성공 사이에 연결점이 있음을 파악한다. 예술은 사랑의 교훈을 담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우리의 마음 앞에 붙들어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연

 (자연을 추억하다) 자연은 마음 같아선 항상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만 실제로는 거의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무엇이다. 영국 미술가 해미시 풀턴은 30년 동안 세계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산책을 기록했고, 시간, 장소, 경로, 주된 기상학적 조건에 대한 목록을 만들었다. 코로는 그림 속 풍경에 둘러싸인 느낌을 우리에게 전한다. 클로드 역시 시골을 사랑했고, 분명 코로와 몇 가지 주요 관심사를 공유했다. 둘 다 덤불과 언덕과 옅게 구름 낀 하늘을 좋아했다. 하지만 클로드는 특별히 거리감에 관심을 쏟는다.

 

(남부의 중요성) 17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구에서 상대적으로 추운 북부 지역은 수많은 사건의 중심이었고, 그들의 정신은 우리의 문명을 빚어냈다. 현대의 상상력을 지배한 건 이성, 과학, 육체가 아닌 정신, 순간의 쾌락이 아닌 지연된 만족, 집단의 요구가 아닌 개인의 필요 같은 북부의 가치들이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에게 이 북부의 우세함은 오히려 정반대쪽에 대한 짙은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1780년대에 괴테는 이탈리아를 처음 방문하고는 무척 감격한 나머지 그때까지 그의 인생에 일어난 모든 일을 한탄했다. 괴테를 로마로 끌어들인 건 단지 고대 유적과 르네상스 미술이 아니었다. 그는 그곳에서 새롭게 변신한 그 자신을 좋아했다. 그는 과일을 많이 먹었고 파우스티나라는 이름의 로마 처녀와 사랑에 빠져 따뜻한 오후를 그녀와 침대에서 보냈다. 그는 딱딱한 관료 생활을 로마의 예술가들이 누리는 보다 자유로운 삶과 맞바꾸었다. 니체도 1876년에 나폴리 만에 있는 소렌토로 향했다. 이 여행은 그의 사고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니체는 고수하던 신그리스도교적 비관주의에서 멀어져 인생을 보다 긍정하는 헬레니즘을 수용했다. 시인 코널리도 남부를 사랑했다.

 

괴테, 니체, 코널리 같은 사람들에게 남부는 행복이었다. 하지만 장기간 체류하기는 불가능했다. 북부로 돌아왔을 때 남부의 가치들을 어떻게 내 것으로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그 답은 경험을 간직하고 전달하는 최고의 수단, 바로 예술에 있다.

 

엘리자베스 데이비드는 남부를 캐서롤 접시에 담아 간직했다. 19세기 초 프로이센의 건축가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은 남부를 벽돌과 모르타르에 담아 간직하고자 했다. 1세기 후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에도 같은 정신이 살아 숨 쉰다. 그는 그리스와 터키에 장시간 머물렀다. 신전들 외에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하얗게 칠한 바닷가 마을의 집들과 그 단순하고 혼란스럽지 않고 장식 없는 설계에서 스며 나오는 정신이었다. 모더니즘은 대체로 강철, 유리, 콘크리트를 이용해 헬레니즘 지역의 새하얀 건축을 북부 기후 지역에 재창조하려는 시도다. 르코르뷔지에는 파리 외곽의 사보아 빌라 위층에 이른바 ‘일광욕실’을 설계하고, 처음에는 내키지 않아 하던 고객들에게 좋은 삶에는 건물의 콘크리트 경사로 사이에서 정기적으로 일광욕을 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식시켰다. 프로이센에서 퍼골라가 그랬던 것처럼 일드프랑스에서도 일광욕 테라스가 썩 필수적이거나 실용적인 공간으로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건축물들은 바깥 날씨에 상관없는 영혼의 쾌락주의를 주장하고 있었다.

 

남부가 우연하게 잊혔다고 결론지어선 안 된다. 추운 기후에서의 삶이 강요하는 요구사항들은 우리가 북부의 가치관에 의지할 이유가 충분함을 의미한다.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딜레마 중 하나는 이성과 육체, 본능적인 삶과 지적인 삶의 본래적 긴장을 어떻게 적절히 다룰 것인가이다. 좋은 삶은 분명 남부와 북부의 상반된 요구들이 현명한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가을을 예견하다) 자연은 생명의 동인이자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힘이다. ‘자연의 순리대로’ 살 필요가 있다고 말할 때, 이는 우리르 젊음의 열정과 햇빛의 아름다움에 내맡기는 것은 물론이고, 가을과 내리막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함을 의미한다. 얀 호사르트의 나이든 남녀의 초상에서 두 사람의 얼굴은 각기 약간 다른 방식으로 그들이 끌고 온 삶의 무게를 보여준다. 남자의 모자에는 작은 금색 배지가 꽂혀 있고, 배지에는 그들보다 훨씬 젊은 남녀의 벌거벗은, 확실히 에로틱한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작품은 노년이 아니라 젊은 시절 봐야 할 이미지를 담고 있다. 예술은 우리에게 미래의 소식을 전해주곤 한다.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우리 마음에 얼마만큼의 가중치로 작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예술은 우리가 이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도와준다. 얀 호사르트의 그림의 금색 배지는 한때 그들이 젊은 관람자인 당신과 같았고 지금은 이와 같다면, 당신 역시 언젠가 그들처럼 될 것이니 아직 시간이 얼마간 남아 있는 지금 이 진실을 마음에 담아두라는 교훈을 준다.

 

고대 세계에서 아르카디아는 이상적인 시골, 즉 소박하고, 정직하고 달콤한 삶이 있는 곳으로 통했다. 하지만 삶은 이렇듯 행복하고 올바른 듯 보이는 곳에서도 당신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런 죽음에 대한 이미지들은 죽음을 진지하고 현실적으로 느끼게 해 현재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침착히 판단하게 하려는 큰 뜻이 있다.

 

가을의 나무는 반성의 자료다. 나무는 우리 자신이 자연계의 리듬에 구속되어 있음을 보라고 요구한다. 이는 우리에게도 죽음이 찾아온다는 뼈아픈 인식을 완전히 달래진 못해도, 웬만큼은 누그러뜨린다. 죽음은 특별한 참사가 아니며, 나만의 저주나 형벌이 아니다.

 

(아름다움을 보는 감각) 예술은 품위를 높여준다. 아름다움은 현재 우리가 예술 덕분에 아무 문제없이 미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들 외에 다른 어딘가에도 있을 거란 느낌은 항상 존재해왔다. 산은 본래 매력적이라고 우리는 습관처럼 가정하지만, 대체로 예술가들의 오랜 노력 덕분에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는 면도 있다.

 

1844년 미국 작가 랠프 왈도 에머슨은 『시인』이라는 수필을 발표했다. 에머슨은 점점 더 자주 눈에 띄는 철도, 공장, 운하, 창고, 기중기를 역겨워하며 외면하는 향수에 젖은 시인들의 태도를 개탄했다. 그는 그들과 대조적으로 “진정한 시인은 벌집이나 기하학적 거미집 못지않게 그런 것들 역시 자연의 위대한 질서에 충분히 포함된다고 본다”고 말한다.

 

현대 예술가들의 힘든 과제는 근대적인 풍경의 매력에 우리가 눈뜨도록 하는 것이며, 근대적 풍경의 특징은 단연 공학과 산업에 있다. 급수탑, 고속도로, 조선소에 아름다울 게 어디 있느냐고 항의하고 싶은 충동이 들지만,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예술가들은 한 때 순결하고 숭고한 자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최전선에서 우리를 도왔듯이, 근대적 풍경의 특이한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일에도 앞장서왔다.

 

(새로운 자연 예술가) 예술사를 통틀어 미술가들은 자연에서의 경험을 표현하는 일을 자신의 과업으로 여겨왔다. 자연의 일부를 이미지화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20세기 예술에서 가장 환대받고 흥미를 끄는 발전상 중 하나로 우리가 ‘미술가’라는 말을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게 된 현상을 들 수 있다. 미술가는 반드시 자연이나, 그 밖의 어떤 것을 재현해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다. 미술가는 우리가 자연 또는 그 밖의 어떤 것을 보다 즉각적이거나 유의미한 방식으로 직접 볼 기회를 창조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새로운 접근법을 주창하는 주요 인물로 미국의 미술가 제임스 터렐을 꼽을 수 있다. 터렐의 작업은 회전축 역할을 한다. 예술은 자연의 기념물을 창조하거나 재현하는 행위에서 자연을 더 가깝게 또는 더 의미 있게 지각하는 기회를 창조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그림을 보는 대신 이제는 실물을 본다. 하지만 미술가의 역할은 여전히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 경험은 창조적인 마음의 통찰력과 상상력이 빚어내고 조직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미술가는 예술의 참된 역사적 사명, 즉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감각적으로 더 잘 이해시키는 사명에 관심이 있느냐다. 미래의 미술가는 예술이 항상 전념해왔던 가치들을 증진하는 사건의 기회를 창조할 것이고, 그 범주에는 탑, 분화구, 만찬, 혹은 유치원이 포함될 수 있다.

 

 (자본주의 개혁의 길잡이, 예술) 자본주의에는 수많은 단점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뚜렷이 양극화된 두 종류의 공상에 쉽게 사로잡힌다. 일부는 빅토리아 시대 사회개혁가가 경제를 생각한 것처럼, 돈은 죄악이고 자본주의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끌린다. 반대편에선 1960년대 자유연애 지도자처럼, 시장의 폐해에 완전히 눈을 감고 시장경제를 찬양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막대한 생산력을 우리의 필요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더 정확히 이해하는 데 투입할 줄 아는 경제를 원한다. 예술은 그런 진보에 큰길을 열 수 있다.

 

(취향의 문제) 우리가 자본주의라 부르는 경제 체제는 소비자가 직접 선택해 구입할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를 시장에 내다팔아 이윤을 얻는 과정이 그 핵심이다. 생산자는 소비자가 돈을 내고 살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공급하고자 한다. 문제는 잘못된 상품에 열광하면서 기꺼이 돈을 내고 구입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데 있다. 이 때 ‘잘못되었다’는 건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의 초점은 외부효과(경제 활동과 관련해 의도하지 않게 발생하는 이익이나 부작용), 즉 기업이 사회에 떠넘기는 숨겨진 비용에 있다. 카지노는 우울증, 가정의 고통 그리고 알코올중독을 유발할 수 있지만, 카지노를 소유한 사모펀드 그룹은 그런 문제들에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저질 햄버거는 비만 및 질병과 결부되지만, 기업의 대차대조표에는 병원비가 기재되지 않는다.

 

호주 서부의 퍼스에 프리 다무르 저택은 보잘 것 없는 취향을 잘 나타낸다. 금전적인 면에서 그들은 메디치가의 어느 공작에도 뒤지지 않았지만, 메디치가는 경제적 자원을 이용해 세계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고상한 수준의 건물들을 창조한 반면, 그들은 눈에 거슬리다 못해 결국 철거했을 때 애도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건물을 창조했다. 프리 다무르의 실패는 사실 햄버거 체임점과 카지노 로비, 아둔한 텔레비전 프로와 수준 낮은 신문지상에 펼쳐지는 현상의 확대판이다. 잘못은 화폐시스템 자체라기 보다 소비자의 취향에 있다. 메디치가의 예배당과 프리 다무르의 극명한 대조는 자본주의의 고통스러운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전세계의 많은 분야 중 오늘날 자동차가 수십 년 전보다 조금이나마 좋아진 데는 몇몇 비평가들이 지칠 줄 모르고 대중의 감성을 일깨우며 자동차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교육했다는 이유가 한몫을 한다. 우리는 우리가 끌고 다니는 차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음식, 미디어, 건축, 레저 등에 돈을 소비할 때도 까다로워야 한다. 우리는 전반적으로 취향을 고양시켜주는 프로젝트의 정당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예술사의 중요한 순간들에 등장하는 인물의 역할을 편안하게 인정해야 한다. 바로 비평가들이다.

 

(취향 교육에서 비평가의 역할) 1920년대 영국에는 현대미술에 돈을 쓰는 건 고사하고, 그런 미술을 좋아하는 게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미 주도적인 견해는 거의 만장일치로 돌아서 있었다. 이 극적인 변화의 동력은 비평가 허버트 리드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이었다. 그는 기사와 책을 쓰고, 라디오에 출연하고, 전시회를 개최하고, 런던에 현대미술학회를 설립하고, 전국의 강연장을 돌며 벤 니컬슨, 파블로 피카소, 바버라 헵워스 같은 위대한 현대미술가들의 가치를 옹호했다. 자동차 분야의 제러미 클라크슨처럼 허버트 리드는 예술을 사랑하면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지에 대한 주된 의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끝 무렵에 캉브레메르 부인의 오류를 지적하고 놀림감으로 삼은 것처럼 우리는 자신의 취향이 웬만하다고 자부하지만 실은 캉브르메르 부인과 더 비슷하다. 캉브레메르 부인은 자신의 마음을 모른다. 이는 용서할 수 있는 일이다. 진짜 문제는 자신의 관심사를 모른다고 겸손하게 인정하지 않는 태도, 약점을 가리기 위해 뒤집어쓴 오만에 있다. 캉브르메르 부인(사실은 많은 사람들)은 예술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믿을 만한 경험에 기초해 평가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생각하고 느끼기 위해 수고해 본 적이 없고, 다소 공황 상태에서 단지 현재 이럴 것이라고 상상하는 유행을 모방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허버트 리드는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의심과 무지에 깊이 공감하는 위치에서 시작했고, 그에 따라 친절함을 교육 전략의 한 핵심으로 삼았다. 그는 품위 있고, 지적이고, 선량한 사람들이 예술을 잘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여겼다. 그는 프루스트처럼 그들을 놀림감으로 삼지 않았다. 리드는 작전상 사람들이 이미 인정하고 승인하는 것들로 시작했다. 그는 라파엘로(1930년대에 대단히 큰 존경과 폭넓은 찬사를 받던 미술가)의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사실 그가 좋아했던 현대 미술가 바버라 헵워스처럼 추상 구성을 충실히 따랐다고 즐겨 지적했다.

 

진정으로 뛰어난 비평가는 우리가 어떤 작품을 좋아하거나 싫어할 때 왜 개인적으로 그렇게 공명하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도록 도와준다. 바로 우리는 자신이 왜 어떤 것을 사랑하거나 미워하는지 자동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비평은 눈에 보이는 장면 뒤로 들어가 진정한 이유를 찾는 과정이다. 좋은 비평가는 우리가 어떤 작품에 감동할 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탐지할 줄 알고, 그 감동을 말로 표현할 줄 안다. 미술 비평가이자 철학자인 월터 페이터는 1869년 『포트나이틀리 리뷰』에서 모나리자의 미소의 힘이 실제로 어디에서 나오는지 설명했다.

 

“그녀는 앉아 있는 곳 주변의 바위들보다 더 오래되었다. 뱀파이어처럼 그녀는 무수히 죽어 죽음의 비밀을 알고 있으며, 깊은 바다로 들어간 적이 있어, 그들이 몰락한 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고, 미로 같은 항로를 따라 동방의 상인드로가 거래했으며, 레다처럼 트로이의 헬레나를 낳았고, 성 안나처럼 동정녀 마리아를 낳았다.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게 수금과 피리의 소리 같으며, 변화하는 표정을 빚어내고 눈꺼풀과 손을 물들이고 있는 그 우아한 자태로만 살아 숨쉰다. 영생의 환상은 만 가지 경험을 쓸어모은 오래된 환상이며, 근대 사상은 인간성이란 관념이 모든 유형의 생각과 생명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 관념 안에 그 모두가 요약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 모나리자는 오래된 환상의 화신이자 근대 사상의 상징으로 존재하는 듯 하다.”

 

미사여구를 걷어내고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모나리자의 얼굴을 좋아하는 이유는 광대한 경험과 평온함을 합쳐놓은 듯한 인상을 주는 데 있다. 비평은 우리가 느끼는 좋음과 싫음의 기초를 최대한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노력이다. 때로는 단지 싫은 부분에 집중해 기준 미달인 점을 지적하고 조롱하는 듯 보이지만 이 부정적 입장은 감탄할 가치가 있는 측면들을 확인하는 훨씬 더 중요한 사업의 부차적인 부분에 불과하다. 취향의 개선이란 사람들의 삶의 어떤 부분에 항상 좀 더 불만족을 느끼게 됨을 의미한다.

 

(진보한 자본주의를 향하여) 우리가 향하는 목표는 진보한 자본주의다. 기업체들이 경제적 현실과충빈히 조화를 이루어 이윤을 내고 외부의 자원을 받지 않고서 그들 자신의 활동을 유지하고 확대하지만, 더 나아가 최적의 재화와 용역을 제공하는 데도 초점을 유지하는 체제를 말한다. 진정으로 가치 있고 존경할 만한 일에도 전념하는 기업문화가 필요하다. 현재 이 말은 대개 모순처럼 들린다. 좋은 일과 돈벌이는 동시에 할 수 없다는 걱정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19세기 중반 사업가이기도 한 어느 예술가가 이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윌리엄 모리스였다. 애석하게도 상황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모리스는 선한 자본주의의 예수 같다. ‘대중의 취향을 평가절하해서 돈을 잃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우리에겐 계몽적인 간섭을 허용하지 않고 시장을 개선할 방도가 필요하다. 세계가 더 긴밀히 상호 연결됨에 따라 소비자들이 더 활발히 정보를 교환하고 자신의 취향을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허버트 리드가 강연과 책을 통해 미술 분야에서 이뤘던 취향 개선은 이제 예리한 눈을 가진 방대한 인터넷 시민군 덕분에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진보한 투자) 나세르 데이비드 할리리는 세계 최고의 갑부 중 한 명이다. 그는 런던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란계 사람으로, 쇼핑몰을 비롯한 상업 및 주거 시설을 건설하고 판매해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그는 상당한 액수를 떼어 자선사업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 미술관과 파리의 아랍세계연구소에서 개최하는 전시회들을 후원해왔고, 옥스퍼드 대학교에 큰돈을 기부해왔으며, 이슬람 걸작들을 중심으로 수집한 미술 소장품들을 런던의 빅토리아앤드앨버트 미술관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제공해왔다.

 

재산축적과 미술을 결합한 할릴리의 행보는 앤드루 카네기나 앤드루 멜런 같은 위대한 부호들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 그들처럼 할릴리도 진선미를 추구하는 목적과 무관하게 경제의 낮은 영역에서 돈을 벌었다. 그러나 일단 부유해진 뒤부터 그는 높은 대의들에 온 마음을 쏟고 있으며 그 중 미술이 단연 돋보인다.

 

우리는 다른 행보를 제안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돈을 버는 일상의 직업 안에서 진리와 친절과 아름다움을 대중에게 더 생생하고 접근하기 쉽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편이 더 값지고 진실하지 않을까? 문제의 일부는 지위 부여에 있다. 대중적인 제스처와 함께 예술에 큰 돈을 기부하는 사람들에겐 명예와 명성이 돌아간다. 진보한 자본주의는 수익 창출에 관심을 두면서도 높은 목표를 위해 기꺼이 수익을 희생할 줄 아는 새로운 부류의 후원자를 요구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훌륭한 결과물로써 명예를 얻고자 하는 갈망을 충분히 활용할 줄 모른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삶이 훌륭하고 가치 있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고 느끼고 싶어하는 욕구를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영예, 품위, 후세의 사랑이다.

 

18세기 독일에서 괴테와 실러는 어지간한 수입을 보장해주는 좋은 계약 조건에 관심을 기울였다. 명예는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가 아니었고, 좋은 집에서 살거나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조건을 불필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일단 안정감을 느낄 만큼 돈이 쌓이자, 모든 사업을 순전히 경제적 수익으로만 평가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성공한 사업가들은 돈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사랑과 존경을 위해 돈을 추구한다. 책임 있는 사회라면 명예를 얻기 위한 이 갈망이 얼마나 강력한지 인식하고, 전체의 이익을 위해 그 갈망을 적절히 이용할 것이다. 세련된 형태의 자본주의라면 부자들은 수익을 약간 낮추는 데 만족할 테고, 그로 인해 보통 사람들은 훨씬 더 품위 있는 직장과 가정, 테니스 라켓과 토스터를 살 수 있는 쇼핑센터를 즐기며 고마워할 것이다.

 

(예술가들이 말하는 직업에 관한 조언) 일에서 더 큰 의미를 찾으려는 욕구는 본인의 경력을 극적이고 무모해 보이는 일탈로 이끌 만큼 강력할 수 있다. 첫째, 사람들은 크든 작든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거나 사람들에게 기쁨, 이해, 위안을 안겨주어 이 세계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보탬이 된다고 느낄 수 있는 직업을 원한다. 둘째, 좀 더 도전적인 면에서, 의미 있는 직업은 본인의 가장 깊은 재능 및 관심과 일치한다고 느껴져야 한다.

 

어려움은 정상적이라는 것, 우리는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게서 많이 배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은 타고난 결함들을 극복하라고 요구한다. 예술의 임무는 우리의 슬픔에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굴욕, 자기회의, 금전적 불안은 우리가 싸워나가야 할 인생의 문제들이지만, 그건 우리가 멍청하거나 무능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종교의 역사에서 가르침을 얻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고통의 이미지들에 반복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경의를 표하는 습관을 정착시켜야 한다. 기독교 예술은 고통과 슬픔이란 삶이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결과가 아니라 옳은 일을 하고자 할 때 흔히 따라오는 부산물임을 상기시켜주는데 있다.

 

푸생의 <샘에서 발을 씻는 남자가 있는 풍경>은 모든 종류의 노동에 관한 진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푸생은 우리의 과도한 기대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의미 있는 일을 하든, 관리직에 있든, 야심찬 사업을 벌이든, 창조적인 활동을 하든,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무관하게 속사정은 대개 그리 매혹적이지 않다는 것이 푸생의 메시지이다. 노동은 대단히 가치 있고 잔잔히 순항하고 있을 때조차 대개 반복적이고, 지루하고, 인정과 보상이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정치

 (정치 미술은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가?) 서양의 19세기와 20세기의 정치 미술은 주로 강자에 맞서 약자의 편을 들었다. 그 시기의 예술은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에 초점을 맞췄고, 정치적 변화를 촉구하는 마음으로 공감과 분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소외된 공동체들에 발언권을 주고자 했다.

 

정치 미술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단지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선 안 된다. 그 잘못을 아주 생생하게 부각시켜 개혁의 필요성을 일깨울 정도로 강함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나쁜 정치 예술의 대표적인 부류는 그저 무력하기만 한 게 아니라, 명백히 위험하다. 그 예술은 그릇된 대의를 위해, 즉 희생할 가치가 없는 조국과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하는 정권을 위해 싸우라고 선동한다. 그리고 악한 자들을 좋게 생각하라고 우리를 꾄다. 올바른 정치 미술은 사회의 맥박을 감지하고, 집단생활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그 문제들을 날카로운 지성으로 분석하고, 선택한 예술 매체에 최상의 기술과 혼을 담아 관람자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수많은 미술가들이 우리의 사회적 고립을 주요 주제로 다뤄왔다. 2012년 영국계 독일인 미술가 티노 세갈은 정치 미술을 최신 형태로 발전시켜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터빈홀에서 발표했다. 세갈은 미술가로서 지성과 독창성을 발휘한 동시에 전통적 수단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그 일을 해냈다. 그는 영국인의 삶에 널리 퍼져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문제에 주목했다. 영국인은 남들과 솔직하게 대화하는 법을 거의 모르고 자신의 나약함을 초연하고 풍자적인 태도 뒤에 감추길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정치 미술가의 임무는 집단의 성격을 분석한 뒤 이를 보다 품위 있게 만드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도 되고 심지어 자원봉사자들을 교육시켜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걸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 역시 좋은 예술, 좋은 정치일 수 있다.

 

 

(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20세기 말의 역사가 던져준 놀라운 교훈 중 하나는 자부심의 결핍이야말로 심각한 문제라는 점이다. 자신의 공동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픈 욕망은 본래 자연스럽고 좋은 충동이다. 자부심을 느낄 줄 아는 우리의 능력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도 예술의 임무다. 집단적 자부심이 중요한 것은 한 개인으로서는 자부심을 느낄 기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리적 약점은 본성적으로 다소 불가피하게 집단적인 어떤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무엇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는지 모른다는 데 있다.

 

자부심은 정체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호주의 정체성이 안고 있는 딜레마에 대해 보다 나은 해답을 찾으려면 건축가 글렌 머컷의 작품들로 눈을 돌리는 게 좋겠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주에 직접 설계한 집에 머컷은 자신이 사랑하는 나라의 친숙한 건축요소들을 모두 활용했다. 골이 진 철판, 원추형의 커다란 물탱크, 헛간과 차고의 문들이다. 이 요소들은 농촌의 특징일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생활하는 교외에서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다. 머컷은 이 흔한 요소들을 아름다운 구성으로 결합했다. 물탱크는 대개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을 편리하게 받을 수 있는 곳에 있거나, 눈길을 줄 가치가 없다는 전제하에 또는 명백하게 실용적인 구조물의 미적 가치에 주목한다는 건 조금 어색한 일이기 때문에 잘 안보이는 곳에 설치한다. 머컷은 요소들이 갖고 있는 사랑스러울 수 있는 면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머컷은 실용적인 요소들이 아직까지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거나 적절한 기술로 주택 설계에 통합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우리가 그저 변변찮게 여기던 건물 양식에 어떤 존엄성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할까?) 1956년 브라질 건축가, 오스카르 니에메예르는 브라질의 새 수도, 브라질리아를 건설하는 계획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도록 초빙되었다. 그가 설계한 건물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건물로 단연 국회의사당이 꼽힌다. 유리와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설계된 이 건물은 브라질이 지향하는 이상이다. 이 건물이 주장하는 말에 귀기울이면, 미래에 브라질은 이성이 우세하고, 질서와 조화가 지배하고, 고상함과 평온함이 정산인 나라가 되리라 믿게 된다.

 

벨라스케스의 그림 <브레다의 항복>을 보면, 오른쪽 스페인 장군 스피놀라가 패장 위스티뉘스 판 나사우에게서 네덜란드 남부의 도시 브레다의 열쇠를 받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하나의 이상이다. 승리한 장군은 적의 장점을 인정하고 그들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최상의 행동 기준이 우리보다 너무 높은 데 있고 너무 어렵고 너무 힘들다고 생각한다. 이때 예술은 희망에서 멀어지는 우리를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

 

기원전 430년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청중에게 우리는 누구인지 묻는다. “우리는 미를 추구하고 사치를 피한다. 우리는 배움을 찬미하고 현학에 무감하다. 우리에게 부는 사용 가치를 위한 목표일 뿐, 공허한 자랑거리가 아니다. 또한 가난의 굴욕은 가난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태만함에서 나온다.” 그는 일련의 태도를 설명하고 있다. 아테네 사람들은 돈, 성공, 실패, 아름다움을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정치’라는 말에 두 개의 다른 의미가 있음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는 정치는 입법, 통치, 정책 연설문, 선거, 정당이며, 이는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모습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는 폴리스, 즉 도시에서 날마다 펼쳐지는 집단생활이다. 집단생활로의 정치의 측면을 예술을 통해 어떻게 개선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한 단서를 미술 평론가 니콜라우스 페브스너는 제시했다. 1955년 페브스너는 BBC 라디오의 <리스 강의>에서 강의했고, 후에 강의 내용을 『영국 미술의 영국성』이라는 책으로 묶어 출간했다. 그는 영국 예술의 영국성, 그리고 정체성을 영국의 튜린(뚜껑이 있는 움푹한 그릇), 의자, 서가, 문손잡이에서 발견했다. 그릇은 솔직하고, 단아하고, 검소하지만 고상하고, 튀지 않는다. 페브스너는 그릇과 접시와 장롱이야말로 국가적 정체성이 주요하게 집약된 곳이라고 강조한다. 이 생각은 국민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정체성을 창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치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정부는 전쟁기념관이나 상징적인 공공 건물에만 관심을 쏟지 말고, 도로 시설, 공원 벤치, 그리고 튜린의 현대적 등가물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자동차 미니는 북적이는 섬, 과시에 대한 반감, 거창한 성명보다 실용적 해결책을 선호하는 정신, 소가족, 체면, 준법정신을 암시한다.

 

종교 예술이 예수를 신이라는 멀고 애매모호한 개념으로부터 끌어내려 일상의 삶과 가까워지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처럼, 세속의 예술도 국가적 자부심이라는 멀고 애매한 개념을 볼에서 딸기를 떠먹을 때나 파티에 가려고 옷을 입을 때마다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하나의 실체로 전환시킨다.

 

(검열을 위한 변명) 우리는 검열이라는 개념을 재검토해 검열이 중요한 사상에 대한 무지몽매한 억압이 아니라 모두의 이익을 위해 이 세계를 조직하려는 진지한 시도일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현재의 위험은 악의에 찬 권력이 고귀한 진리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엉뚱하고 무익하고 하찮은 것들에 압도되어 진짜 중요한 것에 집중하지 못한 채 혼돈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는 흔한 말과는 달리 삶의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기본 덕목이 아니다. 매력적인 환경에 필요한 것은 재능, 약간의 사고, 그리고 약간의 규정뿐이다. 세계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충동은 ‘무엇이 아름다운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주장 때문에 힘을 잃는 경우가 너무 빈번하다. 왜 셰익스피어는 시리얼 박스에 적힌 문구보다 훌륭한가, 왜 어린아이들을 상냥하게 대하는 게 좋은가, 왜 용서가 분노보다 좋은 가 등등. 우리는 이런 진리들을 입증할 수 없는 것처럼 미의 중요성도 입증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을 대단히 적절하고 타당한 진리로 여긴다. 검열을 찬성하는 주장의 핵심에는 현대 세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심하는 태도가 놓여 있다. 이제는 선택적이고 체계적인 검열이 더 큰 과제로 다가온다.

 

(이제……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목표는 작품 속에 강하게 나타나 있는 선함을 적극 유통시키는 데 있어야 한다. 예술의 혜택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예술을 언제 밀쳐두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일정 시점이 되면 우리는 미술관이나 공원 안의 조각품을 떠나 예술의 진정한 목적인 삶의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 예술에서 참으로 귀중하고 그래서 좀 더 현실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큰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술의 혜택에 주목하면 인간관계와 관련된 우리의 능력들을 어떻게 증진시키고 돈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개선하고, 우리의 본래적 자아에 대처하며 우리의 꿈을 정치적으로 구현하는 노력에 어떻게 일조하는지 알 수 있다. 예술에 대한 진정한 열망은 그 필요성을 줄이는 데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예술이 나타내는 이상들을 흡수한 뒤, 아무리 우아하고 의도적이어도 단지 상징적으로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가치들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예술작품이 조금 덜 필요해지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술을 위한 의제 – 가상의 작품 의뢰 전략) 1. 사랑의 미덕 2. 사랑의 갈등 3. 섹슈얼리티 4. 슬픔, 불안 5. 불안정, 질투 6. 희망 7. 인간의 수명 8. 죽음의 경고 9. 노동의 즐거움 10. 노동의 슬픔 11. 타인 12. 자부심

 

7.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오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

1920년대 『랭트랑지장』이라는 신문은 1922년 여름에 기고자들에게 특별히 공들여 만든 질문을 하나 내놓았다.

 

“어느 미국인 과학자가 이 세계는 곧 멸망할 것이라고, 최소한 유럽 대륙의 상당 부분이 파괴될 것이며, 그것도 매우 갑작스럽게 벌어져서, 수억 명이 사망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만약 이 예언이 확실해진 때로부터 파국의 순간 사이의 기간 동안, 과연 이 예언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마지막으로 그 최후의 기간에 귀하께서는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1913년에 제1권이 간행된 이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는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에는 귀하가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죽음의 위협에 놓인다면, 삶이란 갑자기 우리에게 너무 훌륭해 보일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계획과 여행, 정사, 연구 등을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감춰놓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뭐든지 끝없이 미루기만 하는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그런 것들은 결국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두가 영원히 불가능해질 위협에 처한다면, 그런 것들은 다시 얼마나 아름다워질까요! 아! 만약 이번에 그 파국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잊지 않고 루브르의 새로운 전시실을 방문할 것이고, X양의 발치에 몸을 던질 것이고, 인도로 여행을 떠날 테니 말입니다.

 

파국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가운데 어떤 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는 일상생활의 중심부터 돌아온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거기서는 태만이 욕망을 잠재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 굳이 파국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당장 오늘밤에도 죽음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그러기에는 충분하리라고 봅니다. “

 

죽음의 임박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갑자기 삶에 대한 애착을 느낀다. 우리의 불만족은 경험에 들어 있는 돌이킬 수 없이 침울한 뭔가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특정한 삶의 방식의 결과라는 점을 시사한다. 죽음에 대한 암시와 직면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단지 반쪽의 삶을 살고 있었을지 모른다.

 

프루스트의 제안(루브르, 사랑, 인도)이라고 해서 딱히 더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루브르에 관련해서 그는 단 한 번도 박물관 관람에 열성을 보인 적도 없었고, 무려 10년 넘도록 루브르에 간 적도 없었으며, 박물관에서 군중의 와글거림을 직면하느니 차라리 복제품을 바라보는 편을 선호했다. 인도에 관련해서 그는 인도 아대륙에 대한 관심으로 유명하지도 않았다. 침대에서 나오기조차 힘들어하는 남자에게는 결코 이상적인 여정이 아니었다. X양에 관련해서 마르셀은 결코 여성의 매력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그는 사랑을 나누는 것보다는 차라리 시원한 맥주 한 잔이 훨씬 더 안정적인 쾌락의 원천이라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랭트랑지장』에 답변을 보낸 지 불과 넉 달 만에 감기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나이 쉰한 살이었다. 프루스트는 장뇌유주사를 놓자는 의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계속해서 글을 썼으며, 따뜻한 우유, 커피와 삶을 과일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감기는 기관지염으로 번졌고, 결국에는 폐렴으로 발전했다. 폐의 농양이 터졌고 그는 결국 죽고 말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프루스트의 반성은 그가 사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나름대로의 답변을 개진한 책을 쓰고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기나긴 책 제목은 상당히 많은 것을 암시한다. 프루스트는 단 한 번도 그것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목은 시간의 소실과 상실 뒤에 놓인 원인에 대한 탐색이라는 이 소설의 중심 주제를 충분히 직접적으로 가리킨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보다 서정적이던 시대의 추이를 추적하는 회고록과는 완전히 다르다. 오히려 이 작품은 어떻게 하면 시간 낭비를 중지하고 음미하는 삶을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이며, 나아가 충분히 실용적이면서도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이야기이다.

 

나를 위해서 읽는 방법

프루스트의 견해는 어쩌면 회화를 바라보는 그의 접근방식에 가장 잘 암시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프루스트는 캔버스 위에 묘사된 인물을 자신이 알고 지낸 어떤 실존인물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다.

 

“미적으로 보면, 인간 유형의 수는 워낙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항상,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가 아는 사람을 보게 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소설을 읽는 사람은 십중팔구 여주인공에게서 우리가 사랑하는 어떤 사람의 특징을 찾아내기 마련이다.”

 

예술이 단순히 우리를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우리에게 적절하게 감명을 주는 이유는 ‘로 후작 현상(Marquis de Lau phenomenon, MLP)’ 때문이다. 알베르틴의 초상에서 케이트를 인식하고, 사니트의 묘사에서 필립을 인식하는 가능성에 수반되는, 그리고 일반적으로 기차역에서 엉성하게 인쇄된 책을 구입하는 우리 자신에게 수반되는 일련의 경이로운 혜택이 있기 때문이다.

 

(MLP의 혜택) ① 세상 어디에서나 내 집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 프루스트나 호메로스와의 보다 오랜 만남은 한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한때는 위협적일 정도로 낯설어 보이기만 하던 세계들이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세계와 상당히 비슷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내게 된다는, 심지어 우리가 집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는 장소의 범위를 넓혀준다는 점이다.

 

② 외로움의 치료제 – 저녁 내내 뭔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린 것 같은 애인과 싸웠을 때, 프루스트의 화자가 시인하는 말을 들으면 어딘가 안도감이 든다. “알베르틴이 내게 잘해주지 않고 있음을 알아내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슬프다고 말하는 대신 야비하게 굴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그녀와 헤어지고픈 열망을 표현할 때는, 대부분 그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였다.” 그 이후로 우리 자신의 로맨틱한 어릿광대짓은 이상야릇한 오리너구리의 어릿광대짓과는 덜 비슷해 보인다. “두 사람이 헤어질 때, 배려의 말을 건네는 쪽은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어떤 소설 속 등장인물이 읽다 보면 바로 우리 자신이 될 때 달콤 씁쓸한 추방이라는 똑같은 고통을 겪는 것을 목격하노라면, 그리고 결국에는 살아남는 것을 목격하면 우리는 위로 받는다.

 

③ 지목하는 능력 – 어떤 소설의 가치란 단순히 감정 묘사 또는 우리 자신의 삶 속에 있는 실제 인물과 등장인물 간의 유사성 등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가치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공식화하지는 못했던 인식을 지목하는 능력에까지 뻗어나가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겸손하게도 결코 자신의 소설에 적용하지는 않았지만 이 가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어느 천재의 새로운 걸작을 읽을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스스로가 경멸했던 숙고를, 스스로가 억눌렀던 기쁨과 슬픔을, 스스로가 비웃었던 감정의 온 세계를, 그런 것들을 담고 있는 바로 그 책이 문득 우리에게 가르쳐준 그런 것들의 가치를 발견하고 기뻐하게 된다.

 

시간 여유를 가지는 방법 

프루스트의 작품이 지닌 장점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작품의 거북한 몇 가지 특징들 가운데 하나만큼은 제아무리 열렬한 예찬자라도 부정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길이이다. 하지만 그의 전반적인 철학, 단순히 뭔가를 읽는 것에 대한 철학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철학이기도 한 것은 뤼시앵 도데가 언급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프루스트는 신문을 대단히 주의 깊게 읽었다. 그는 단신란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단신으로 나온 내용을 그가 다시 이야기하면 졸지에 한 편의 비극 또는 희극 소설로 변모했는데 이는 그의 상상력과 환상 덕분이었다.”

 

프루스트는 종종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용할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은 자신이 직접 생각해낸 것보다도 항상 훨씬 흥미롭게 마련이다”라고 생각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단신란에 실린 끔찍한 몇 줄의 기사 이상의 가치는 없어 보였던 이야기가 비극과 모자관계의 역사로 온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프루스트는 예술작품의 위대함은 그 소재가 지닌 외관상의 자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그 소재에 대한 차후의 처우와는 깊은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세상 만물이 잠재적으로는 예술을 위한 풍요로운 주제이며, 우리는 비누 광고에서도 파스칼의 『팡세』만큼이나 가치 있는 발견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블레즈 파스칼은 1623년에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알려졌다. 단순히 그를 자랑스러워하는 가족만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열두 살 때 그는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의 정리 가운데 처음 32개를 혼자 힘으로 찾아냈다. 그는 확률의 수학을 발명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는 기압을 측정했고, 계산기를 만들었으며, 승합마차를 설계했고, 결핵에 걸렸으며, 기독교를 옹호하기 위해 명석하면서도 비관주의적인 일련의 금언을 남겼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팡세』로 알려진 작품이다.

 

읽을거리를 고르는 데에서도 프루스트는 정신의 인도를 받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의 친구인 모리스 뒤플레는 마르셀이 쉽게 잠들지 못할 때마다 가장 선호했던 읽을거리가 다름 아닌 기차 시간표였다고 말했다. 프루스트는 실용적인 조언을 얻으려고 이 문서를 참고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 시간표를 마치 시골생활에 관한 흥미진진한 소설인 양 읽고 즐겼다.

 

시간 여유를 가지는 방법에 관한 프루스트의 교훈은 공연에 관심을 가지고, 마치 비극 또는 희극 소설의 일각에 불과하기라도 하다는 듯 신문을 읽고, 필요할 경우에는 잠드는 과정을 묘사하는 데에 30쪽을 할애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시간이 없다면, 최소한 올라도르프 출판사의 알프레드 윔블로나 파스켈의 자크 마들렌의 접근방식만큼 저항하라. 프루스트는 이런 접근방식을 가리켜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 ‘시간이 없음’을 이유로 들어 ‘바쁜’사람들-그들의 일이 제아무리 어리석다고 하더라도-이 느끼는 자기만족”이라고 정의했다.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 

프루스트는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유대인 어머니 문제, 거북한 욕망, 데이트의 문제들, 낭만적 비관주의, 연극계 경력의 실패, 친구들의 몰이해, 천식, 식단, 소화, 바지, 민감성 피부, 쥐, 추위, 고도에 대한 민감성, 기침, 여행, 침대에서 나오기 싫어하는 것, 이웃에서 나는 소음, 여타 질환, 타인의 불신, 죽음. 프루스트는 과연 터미니없는 건강염려증 환자였을까? 마르셀은 자신의 건강 상태를 과장한 것이었을까?

 

이런 형에 비하면, 그보다 두 살 어린 동생 로브르 프루스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외과의사였으며 황소 같은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마르셀리 물 한 모금 때문에 죽을 수도 있었다면, 로베르는 그야말로 파괴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두사람 중에서 어느 쪽이 되고 싶어할까? 로베르일까 아니면 마르셀일까? 하지만 어떤 사물을 지각하는 능력만큼은 로베르가 오히려 형 마르셀의 뒤를 쫓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분야였다. 프루스트의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는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고통을 겪고 나서야, 무엇이 본인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고 나서야, 비로소 뭔가를 진정으로 배우게 된다.

 

“병약함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눈치를 채고 배우게 만들며,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몰랐을 과정을 분석하게 한다. 매일 밤 곧장 침대로 들어가는 사람, 그리하여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그 순간까지는 살아 있기를 중단하는 사람은 잠에 관해서, 반드시 대단한 발견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소한 관찰이라도 하는 것을 결코 꿈도 못 꿀 것이 당연하다. 그는 자신이 잠들어 있다는 것조차 거의 알지 못한다. 약간의 불면증은 우리로 하여금 잠을 음미하게 해주고, 그 어둠에 한 줄기 빛을 비춰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없지 않다. 틀림없는 기억이란 기억의 현상을 연구하기 위한 매우 강력한 자극은 아닌 것이다.”

 

프루스트의 제안은 오로지 고통을 받을 때에만 우리가 적절하게 탐구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루스트가 보기에 정신 활동은 두 개의 범주로 나뉘는 듯했다. 한편에는 고통 없는 생각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고통스러운 생각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있다. 이 가운데 후자의 범주를 프루스트는 현저하게 특권으로 여겼다. 프루스트의 말에 따르면, 사람이 지혜를 얻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선생님을 통해서 고통 없이 얻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삶을 통해서 고통스럽게 얻는 것이다. 그는 고통스러운 쪽의 지혜가 훨씬 더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행복은 신체에 좋지만, 정신의 강인함을 발달시켜주는 것은 바로 슬픔이다.” 플라톤이나 스피노자를 읽는 것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연애를 추구하는 편이 더 나으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한 여자 그리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한 여자는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천재적인 한 남자가 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심오하고 더 필수적인 감정의 전 영역을 우리로부터 끌어낸다.”

 

우리가 고통에 관해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주장은, 고통이 지적이고 창의적인 탐구를 위한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기술은 무엇과 관계되어 있을까? 고통의 이해를 통해서 우리는 유독 우리만이 유일무이하게 저주를 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한편, 우리의 고통의 경계에 대한 그리고 그 배후에 놓인 씁쓸한 논리에 대한 감각을 얻게 된다. “슬픔이 생각으로 바뀌는 바로 그 순간, 슬픔은 우리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그 능력 가운데 일부를 잃어버린다.”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에 관한 프루스트의 교훈은 우리의 만족을 위한 최고의 기회란 바로 우리의 기침, 알레르기, 사교상의 실수, 감정적인 배신 등을 통해서 암호화된 형태로 우리에게 제공되는 지혜를 받아들이는 데에 놓여있음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완두콩, 지루한 사람, 시간, 날씨를 탓하는 사람들의 배은망덕을 피하라는 것이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프루스트는 가브리엘 드 라 로슈푸코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었다. 그는 『연인과 의사』를 쓰고 원고가 완성되자마자 프루스트에게 보내면서 논평과 조언을 요청했다. 이 탁월하고 비극적인 작품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이 소설이 여러 가지 클리셰(진부한 표현)로 가득하다는 점도 물론이었다. 프루스트는 조심스레 걷듯이 말했다. “하지만 때로는 그 풍경화를 보다 독창적으로 그렸으면 하고 바랄 사람도 있을 걸세. 해질녘에 하늘이 불타는 듯하다는 것은 물론 사실이네만, 그 표현은 너무 자주 이야기되거든. 그리고 달빛이 차분하게 비친다는 표현 역시 약간은 진부하다네.”

 

클리셰의 문제는 그것들이 잘못된 생각을 담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매우 좋은 생각의 피상적인 연결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것이야말로 그 대상에 관해 이야기되는 최초의 말이 아니라 최후의 말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클리셰가 유해하지 않은 경우는 그것들이 어떤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한편으로 다만 그 표면만을 파악할 뿐이라고 믿도록 우리에게 영감을 제시했을 때뿐이다. 우리가 이 세계를 어떻게 묘사하느냐는 애초에 우리가 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느냐를 어느 정도는 반영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화가에 대한 오마주로 프루스트는 자신의 소설에 이런 화가를 한 사람 집어넣었다. 이 작중인물 엘스티르는 르누아르, 드가, 마네의 특성을 공유하는 인물이다. 엘스티르는 초현실주의에 손을 댄 것이 아니다. 만약 그의 작품이 유별난 듯 보인다면, 그 이유는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우리가 본다고 아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보는 대상을 그리려고 그가 노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엘스티르의 업적은 원래의 혼란에 천착했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해서 무효화되기 이전의 시각적 인상을 그리도록 원칙을 세웠다는 점이었다. 엘스티르의 작품은 모든 성공적인 예술작품에 현존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특히나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의 왜곡된 또는 간과된 측면을 우리의 시선에 복원해주는 능력이다.

 

“우리의 허영, 우리의 열정, 우리의 모방 정신, 우리의 추상적 지성, 우리의 습관은 오래 전부터 줄곧 작용해왔으며, 예술의 과제란 이런 것들의 작용을 취소하는 것, 우리로 하여금 이제껏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우리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채 놓여 있는 깊이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에 관한 프루스트의 교훈은 삶이란 클리셰적인 삶보다도 더욱 낯설 실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친구가 되는 방법 

프루스트의 친구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들은 한 목소리로 프루스트야말로 교우관계의 모범이었으며, 우정의 화신이었다고 주장하기까지했다. 그들의 보고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그는 너그러웠다. 그는 인심이 후했다. 그는 200퍼센트의 서비스 요금을 붙이기를 좋아했다. 그는 단순히 과도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에 관해서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호기심이 많았다. 그는 뭐가 중요한지 잊지 않았다. 그는 겸손했다. 그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그의 집에서는 아무도 지루해지는 법이 없었다.

 

이처럼 너그러운 평결을 고려해볼 때, 프루스트가 실제로는 우정에 관해 뭔가 극도로 신랄한 견해를 주장했다는 사실은 놀라울 수밖에 없다. 프루스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긴 의자와도 충분히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화는 쓸모없는 활동이다. 우정은 피상적인 노력이다. 그리고 우정이란 결국 이런 것에 다름 아니다.

 

우정이란 텅 빈 영역이며, 그 안에서는 우리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들이 손쉽게도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와 일치하게 마련이다. 이보다 덜 낙관적이었던 프루스트는 불일치의 가능성을 인식했고, 자신의 마음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를 이야기해서 당신을 지루하게 만드는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항상 질문을 던지는 쪽이 되어서 당신의 마음에 뭐가 있는지를 자신에게 털어놓게 만들어야 마땅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프루스트가 진정으로 지적인 대화를 나눌 경우에도, 그의 우선순위는 여전히 개인적이고 지적인 걱정을 은밀하게 소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헌신하는 것이었다. 프루스트는 “우정을 비웃는 사람들은……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페르낭 그레그는 이렇게 보고한다.

 

“우리끼리 만들어낸 동사로 프루스트화하다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약간은 지나치게 의식적으로 친절한 태도를, 아울러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끝도 없고 유쾌한 겉치레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프루스트는 유별나게 정직하면서도 유별나게 다감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정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접근방식에 도달했다. 그 접근방식이란 애정의 추구와 진실의 추구가 때때로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아예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극단적인 구분은 그를 더 나은, 더 충성스러운, 더 매력적인 친구로, 아울러 더 정직하고 심오하며 나아가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사고자로 만들어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가 친구들에게 실제로 부친 편지보다도 더 흥미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일단 쓰고서 막상 부치지 않은 편지일 것이다. 프루스트의 사후에 발견된 문서들 중에는 친구에게 실제로 보낸 편지 이전에 썼던 또다른 편지가 한 통 있었다. 이 어색한 생각들은 다른 곳에서는 더욱 잘 개진되었다. 바로 그 원인 제공자나 다름없는 사람들과 공유하기에는 곤란한 분석들, 지나치게 상처줄 수 있는 분석들을 위해서 고안된 개인적인 공간에서는 말이다. 끝내 부치지 않은 편지 역시 그런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역시 또다른 그런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눈을 뜨는 방법 

프루스트는 자신이 상상한 젊은이가 샤르댕과의 만남 이후에 영적 변모를 겪게 되리라고 기대해 마지 않는다. 샤르댕의 작품을 보고 난 이후로는 부모님의 아파트에서 가장 누추한 방도 그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프루스트는 약속한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결국 마지막 레몬 한 조각을 비롯한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기 그지없다고, 즉 우리 자신이 처한 상황 이외에 다른 어떤 상황을 부러워할 이유라고는 없다고, 즉 헛간만 해도 충분히 훌륭하며, 빌라나 에메랄드라고 해도 이 빠진 접시보다 딱히 더 나을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샤르댕은 소금 그릇과 주전자의 아름다움을 통해 아름다움이 수동적으로 마주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발견해야 하는 어떤 것임을 이야기한다.

 

“자신이 범속함이라고 불렀던 것에 관한 이처럼 풍부한 묘사-즉 자신이 무미건조하다고 여겼던 삶에 관한 이처럼 식욕을 돋우는 묘사, 또한 자신이 하찮다고 생각했던 자연이 만든 이처럼 위대한 예술-에 그가 일단 현혹되고 나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하리라. 자네, 행복한가?”

 

프루스트는 위대한 화가들이야말로 우리가 눈을 뜨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함으로써, 그와 동시에 아름다움에 관한 우리의 감각이 변경 불가능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화가들-각자의 화폭을 통해서 일찍이 간과되었던 심미적 특성의 음미를 우리에게 주입하는-에 의해서 민감해질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었다. 위대한 화가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는 것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들 본인의 눈이 시각적 경험의 국면들에 대한 유별난 수용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마들렌의 기억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가 결국 서술하게 된 소설은 어떤 면에서 완전하고 확장되었으면서도 제어된 “프루스트적 순간”이며, 감수성과 관능적 즉시성이라는 면에서 이 순간과도 유사했다. 프루스트는 우리가 자발적이고도 지적으로 우리의 기억을 환기시키려고 할 때보다는 오히려 마들렌이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냄새, 낡은 장갑 한 짝에 의해서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일깨워졌을 때, 우리의 과거에 관한 생생한 이미지가 산출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

 

“자발적인 기억, 지력과 눈의 기억은 단지 부정확한 모조품에 불과하며, 이는 서투른 화가의 그림이 봄 풍경과 닮지 않은 것만큼이나 전혀 닮지 않았다.……따라서 우리가 삶이 아름답다고 믿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삶을 회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어떤 냄새를 맡게 될 경우, 우리는 갑자기 그것에 중독된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가 죽은 사람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연히도 낡은 장갑 한 짝을 마주치게 되면, 우리는 눈물을 터뜨린다.”

 

사망하기 몇 년 전에 프루스트는 루브르에 있는 프랑스 회화작품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8점을 적어달라는 내용의 설문지를 받았다. 그는 망설이듯 이렇게 답변했다. 와토의 ‘키테라 섬의 순례’, 아니면 ‘무관심’. 샤르댕의 회화 3점, 즉 자화상, 그의 아내의 초상화 그리고 ‘정물’. 마네의 ‘올랭피아’. 르누아르의 작품 1점 아니면 코로의 ‘단테의 나룻배’. 코로의 ‘샤르트르 성당’. 밀레의 ‘봄’.

 

훌륭한 화가는 화폭 속에 무엇을 집어넣는 반면, 무관심한 화가는 무엇을 집어넣지 않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자발적인 기억과 무의식적인 기억을 구분 짓는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또다른 방식이다. 이에 대한 한 가지 답변은, 그 차이가 그리 크지는 않다는, 또는 극히 적다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샤르댕이나 렘브란트의 ‘철학자’의 정신과는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종종 행동했다. 그의 주소록에는 귀족 특유의 공들여 지어진 이름들이 들어 있다. 그는 항상 리츠 호텔에 갔다. 그는 수많은 파티에 참석했다. 프루스트는 한때나마 과시적인 삶에 이끌린 바 있었고, X, Y, Z 부인의 집에 종종 들르려고 노력했으며,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귀족과 친구가 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그 매력을 발견하고는 곧 실망했다. 그는 차라리 집에 머무르는 편이 더 나음을, 자기 가정부에게 말하는 것도 카라망 시메 공작부인에게 말하는 것만큼이나 행복할 수 있음을 인식했다. 그는 교육이나 자기표현 능력 같은 자질들은 간단한 경로를 따르지 않는다는, 따라서 눈에 보이는 범주에 근거하여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눈을 뜨는 방법에 관한 프루스트의 교훈은 찬장에 들어 있는 빵도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놓일 장소가 됨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만약 연인과의 오랜 연애가 너무 잦은 권태를 낳는다면, 즉 우리가 상대방을 너무 잘 안다는 느낌이 든다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진짜 문제는 우리가 상대방을 잘 알지는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젊은 시절에 프루스트는 강박적으로 자위행위에 몰두했는데, 그 정도가 너무나 심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차라리 유곽에 가라고, 19세기 당시로서는 가장 위험한 오락으로 간주되던 것에 마음을 빼앗겨보라고 재촉할 정도였다.

 

프루스트의 욕망 이론에서 매춘부는 불운한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남자를 유혹하고 싶어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영업의 특성상 사랑을 고무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일을 하지는 못하도록 금지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이란 바로 오늘 밤에는 한가하지 않다고 남자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그녀를 물리적으로 소유할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한 의심을 상대방에게 심어주는 것이었다.

 

“만약 매춘부가……우리에게 매력을 그토록 조금밖에 발휘하지 못한다면, 이는 그들이 다른 여성보다 덜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너무 적극적이며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가 얻고자 도모하는 바로 그것을 그들이 미리 우리에게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프루스트가 보기에 질투의 주입은 관계가 습관에 의해서 망가지는 상황에서 구출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책을 내려놓는 방법 

프루스트와 러스킨의 만남은 독서의 유익을 예증해준다. “내 눈앞에서 이 우주가 갑자기 무한한 가치를 되찾았다.” 러스킨 덕분에 프루스트는 가시적인 세계, 건축, 미술, 자연에 민감해지게 되었다. 풍경과는 별개로 러스킨은 프루스트가 프랑스 북부에 있는 거대한 성당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었다.

 

(독서의 한계) 프루스트는 독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도 아니고, 초연한 호기심 때문에도 아니고, 러스킨이 무엇을 느꼈는지 찾아내려는 공평무사한 소원 때문도 아니다. “사람이 무엇을 느끼는지를 자각하는 방법으로 말하자면, 어떤 거장이 어떻게 느꼈는지를 스스로 재창조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켜야 하며, 심지어 다른 저술가의 생각이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프루스트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책은 우리가 느끼는 바를 충분히 자각하게 만들어줄 수는 없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저자는 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책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하는, 책이 우리에게 주는 통찰을 반겨 맞아야 하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의 독립성을 예속시킨다거나 우리의 애정생활의 미묘한 차이를 덮어버리지는 말아야 하는 의무를 부과 받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지나치게 의존적인 독자에게서 식별한 일련의 증상들로 인해서 고통을 받게 된다.

 

첫 번째 증상: 우리는 저술가를 예언자로 착각하게 된다

두 번째 증상: 좋은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글을 쓸 수 가 없다

세 번째 증상: 우리는 예술적 우상숭배자가 된다

네 번째 증상: 우리는 ‘되찾은 요리’를 구입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다섯 번째 증상: 우리는 일리에 콩브레를 방문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레오니 고모가 마들렌을 사온 바로 그 제과점

 

책을 내려놓는 방법에 관한 프루스트의 교훈은 그가 러스킨에게 내린 것과 똑같은 평결을 그에게도 내리는 것이다. 즉 그의 모든 자질 때문에, 그의 작품이 너무 오랜 시간을 소비한 사람들에게는 결국 그의 작품이 어리석고, 광적이고, 속박되고, 우스꽝스럽다고 증명되리라는 것이다.

 

“독서를 훈련으로 만든다는 것은 자극에 불과한 것에 너무 큰 역할을 부여하는 일이다. 독서는 정신생활의 문턱에 놓여 있다. 독서는 우리를 정신생활에 소개해준다. 그러나 독서 자체가 정신생활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충분히 내던질만하다는 것이다.

 

1/19(토)~1/22(화) 프라이부르크 – 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은 『불안』(2013)에서 러스킨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부란 나비에서부터 책이나 미소에 이르기까지 뭐든지 풍부한 상태를 의미한다. 러스킨은 부에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부에 강박감도 느꼈다. 그러나 그가 염두에 두었던 부는 특별한 종류였다. 그는 친절, 호기심, 감수성, 겸손, 경건, 지성-그는 이런 일군의 특징을 단순한 게 “삶”이라고 불렀다-에서 부유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이 최후의 사람에게』에서 부에 대한 일반적인 금전적 관점을 버리고 “삶”에 기초한 관점을 채택하라고 호소했다.

 

“삶, 즉 사랑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보통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실 그들의 금고 자물쇠만큼이나 부유하지 못하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부유할 수가 없다.”

 

조지 버나드 쇼는 러스킨 탄생 백주년 강연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의 독설과 카를 마르크스의 고발은 러스킨의 저작에 비교하면 시골 사제의 진부한 소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러스킨주의자들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기존 질서에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가장 철저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매슈 아널드는 『교양과 무질서』(1869)에서 러스킨이 그랬던 것처럼 세계 최고의 산언 선진국 백성에게 부는 행복을 확보하는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행복은 “내적인 영적 활동이며, 그 특징은 친절과 빛과 삶과 공감이 확대된다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프라이부르크의 시민들은 러스킨의 관점으로 보자면 삶에서 부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프라이부르크의 보봉마을(Vauban)은 생태마을이다. 저에너지 주택단지, 태양에너지 도시이기도 하다. 보봉마을의 정신은 녹색과 주민참여로 요약할 수 있다. 대부분의 보봉마을 주택은 저에너지하우스 또는 패시브하우스, 에너지플러스 하우스로 건설되어 있다. 그 중 보봉마을의 상업건물 솔라쉽은 유기농 슈퍼, 재생에너지만 투자하는 환경친화기업이 입주해 있다. 보봉마을의 또 한가지 특징은 개인 주차장이 없다는 점이다. 정원과 공원, 어린이 놀이터, 자전거주차장이 개인 주차장을 대신한다. 보봉마을의 주민들은 자동차 대신 노면전차, 자전거, 버스, 카셰어링 등을 이용한다. 저녁이 되면 상점이 붐빈다. 제철과일과 제철채소로 가족과 함께 요리를 통해 삶을 확장한다. 개인주의적 삶의 양식을 버리고 다소 불편하더라도 검소하고 삶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삶이 보봉마을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 있다. 러스킨이 말한 부유한 삶이란 이런 삶이 아니었을까.

 

8. 일의 기쁨과 슬픔

 

화물선 관찰하기 

나는 부두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현대 일터의 지성과 특수성,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노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특히 일이 우리에게 사랑과 더불어 삶의 의미의 주요한 원천을 제공할 수 있다는 그 특별한 주장을 주의 깊게 들여다볼 생각이다.

 

물류 

보통 슈퍼마켓의 매대에는 2만 가지 품목이 진열되어 있는데, 그 중 4천 품목은 냉각 상태라 사흘마다 바꾸어주어야 한다. 나머지 1만 6천 품목은 2주 안에 재고를 다시 채워야 한다.

 

비스킷 공장 

유나이티드 비스킷의 로렌스는 “요즘 비스킷은 요리가 아니라 심리학의 한 분야입니다.”라고 말했다. 로렌스는 슬라우에 있는 한 호텔에 설문 대상자 몇 명을 모아놓고 이 비스킷을 만들었다. 그는 일주일에 걸쳐 그들의 생활에 관해 질문했다. 그들에게서 감정적인 갈망들을 끄집어내, 새로운 제품의 조직 원리로 통합해내려는 것이었다. 로렌스는 처음부터 자신의 비스킷이 사각형이 아니라 원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거의 모든 문화에서 원과 여성성과 전체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밀하게 나누어놓은 분업은 감탄할 만한 수준의 생산성을 낳았다. 이 회사의 성공은 20세기 초에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제시한 능률의 원리들을 그대로 증명하는 듯하다. 파레토는 전체적인 일반지식 대신 정밀하게 제한된 분야에서 개별적인 능력을 육성하는 구성원들의 수가 많아질수록 사회의 부도 늘어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일에서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갈망은 지위나 돈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완강하게 우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그저 물질만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라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 있는 일이라는 개념을 너무 좁혀서, 의사나 콜가타의 수녀나 과거의 거장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추앙받지 않으면서도 다수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뉴욕의 영화관』(1939)는 어쩌면 매체를 고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함께 흥분하게 만드는 과학기술의 발명품이 타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줄여버렸다는 것이다. 이 그림의 위력은 두 가지 관념을 나란히 놓은 데 있다. 하나는 이 여자가 영화보다 더 흥미롭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여자가 영화 때문에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관객이 영화 때문에 보지 못한 것을 더 조용하고 더 주의 깊은 표현으로 구원해내는 일은 화가의 몫으로 남겨졌다.

 

1866년 존 러스킨은 『야생 올리브의 왕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낭비 가운데 당신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낭비는 노동의 낭비다. 아침에 낙농장에 들어선 순간 막내아들이 고양이와 함께 놀다가 크림을 바닥에 다 쏟는 바람에 고양이가 바닥에 묻은 크림을 핥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당신은 아이를 꾸짖을 것이고, 우유를 낭비한 것을 아쉽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우유가 담긴 나무 사발이 아니라 인간 생명이 담긴 황금 사발이 있다면, 당신은 그 황금 사발을 신에게 샘가에서 깨도록 맡겨두는 대신 당신이 나서서 흙 속에서 부수고 인간의 피는 바닥에 쏟아 악마가 핥게 할 것이다.그것은 낭비가 아니라고 하면서! 당신은 아마 ‘노동을 낭비하는 게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니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가? 나는 이보다 인간을 더 철저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묻고 싶다.”

 

교역, 사치, 개인 재산을 중심에 놓고 더 높은 목표의 추구에 관해서는 입에 발린 말밖에 하지 않는 상업적 사회의 역설과 승리를 경제학자와 정치 이론가들이 처음 의식한 것은 18세기였다. 부와 영적 타락. 베네치아는 그 전성기에 바로 그런 사회였고,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였고, 18세기 영국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제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그 예들을 쫓고 있다. 정신이 고결하고 도덕적인 야심이 있는 구성원들은 사회의 방종에 경악했다. 그들은 소비주의를 매도하면서 대신 아름다움과 자연, 예술과 우애를 찬양했다. 그러나 비스킷 회사는 초콜릿 비스킷의 효율적인 생산을 무시하고, 사회의 가장 유능한 구성원들이 혁신적인 마케팅 프로모션 기법을 개발하면서 인생을 보내는 것을 엄하게 막는 나라들이 너무 버거워 감당하기 힘든 문제에 늘 직면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곳이다. 그런 나라들은 가난하다.

 

나는 우리 노동의 진부함을 생각하며 희미한 절망감을 느끼다가도, 거기에서 나오는 물질적 풍요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겉으로는 유치한 게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이 우리의 생존 자체를 위한 투쟁과 절대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직업 상담 

현대의 일하는 세계의 주목할 만한 특징은 결국 내적인 것으로서 우리 정신의 한 측면을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널리 퍼진 믿음이다. 직업 선택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생각하기 떄문에 우리는 새로 쉬기게 된 사람에게 어디 출신이냐, 부모가 누구냐로 묻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늘 이랬던 것은 아니다. 기원전 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족과 보수를 받는 자리는 구조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경제적 요구는 사람을 노예나 동물과 같은 수준에 놓는 것이었다. 육체노동은 정신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적 기형을 낳는다고 보았다. 시민은 노동하지 않고 소득을 얻어 여가를 즐기는 생활을 할 때만 음악과 철학이 주는 높은 수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생각에 이어 초기 기독교는 일의 괴로움이 아담의 죄를 씻는 데 어울리는 확고부동한 수단이라는 더 어두운 교리를 보탰다.

 

르네상스가 되어서야 새로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위대한 예술가들, 레오나르도나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들의 전기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실용적인 활동의 영광에 대한 언급을 만날 수 있다. 18세기 중반에 이르자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대한 직접적 도전으로, 빵을 굽고, 아스파라거스를 심고, 풍차를 조작하고, 닻을 만들고, 책을 인쇄하고, 은광을 운영하는 일과 관련된 각별한 재주와 기쁨을 찬양하는 항목들로 가득 찬 27권짜리 『백과사전』을 출간했다. 『백과사전』은 지식의 수수한 일람표로 기획된 것이었지만, 실은 노동의 고귀함을 찬양하는 노래나 다름없었다. 디드로는 ‘기술’에 관한 항목에서 자신의 동기를 숨김없이 드러내, ‘인문적’ 기술(이르스토텔레스의 음악과 철학)만 숭상하고, ‘기계적’ 기술(시계 제조나 비단 직조 등)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꾸짖는다. 결과적으로 18세기의 부르주아 사상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공식을 뒤집은 셈이다.

 

일에 대한 태도의 이런 진화는 흥미롭게도 사랑에 관한 관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8세기 부르주아지는 즐길 수 있는 것과 필요한 것을 한데 묶었다. 그들은 성적인 정열과 가족 단위에서 자식을 기르는 실제적인 요구 사이에는 본래 갈등이 없으며, 따라서 결혼 안에서도 로맨스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보수를 받는 일에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다.

 

시먼스는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동기와 성격』에서 한 말을 좋아하여, 변기 위에 써붙여놓기까지 했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그것은 보기 드물고 얻기 힘든 심리학적 성과다.”

 

‘소명’이라는 이 묘하고 불행한 용어는 중세에 기독교의 맥락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때 소명이란 예수의 가르침에 헌신하라는 명령과 갑자기 마주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시먼스의 말에 따르면, 이런 개념의 세석화된 변형이 현대까지 살아남아,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 삶의 의미가 이미 만들어진 결정적인 형태로 드러나고, 그러면 우리에게 혼란, 질투, 후회의 느낌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로 우리를 괴롭히는 경향이 있다.

 

시먼스는 직업 상담이 우리 모두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을 이 미완의 작품이 매혹적인 비유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우리 각자가 진정한 나 자신이 되도록 돕는 일이었다.

 

시먼스는 작은 책자를 보충 자료로 나누어주었다. 면지에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말을 인용해놓았다. ‘사람은 의지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위계적인 사회에서는 개인의 운명이 대체로 출생이라는 우연에 의해 결정되었다. 성공과 실패가 날고 있는 산을 움직일 수 있다는 선언을 동반한 실력에 달려 있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능력주의 사회에서 또 사회적 이동이 심한 현대 사회에서 사람의 지위는 자신감, 상상력,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몫을 설득하는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출세를 할 가능성 때문에 금욕과 체념의 철학들은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있다.

 

상담사들 다수가 지나친 약속을 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창작을 지도하는 교사가 탐욕이나 감정 때문에 학생들 모두가 언젠가는 가치 있는 문학을 생산하게 될 것이라고 암시하곤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교사는 민주사회의 저주라고 할 수 있는 곤혹스러운 진실, 즉 ‘만족한 노동자’라는 개념처럼 위대한 작가 역시 변덕스럽고 비정상적인 현상이며, 그런 작가는 마치 송로 버섯과 마찬가지로 공장 방식 농장에서는 나올 수 없다는 진실을 솔직히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우리 잠재력의 문을 여는 길에 놓인 수많은 진짜 장애들을 정확하게 인식했다. 그는 『직업으로서의 과학』(1918)이라는 에세이에서 괴테에 대해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창조적이고 건강한 인격의 예라고 묘사했다.

 

로켓 과학 

위성은 우리 행성의 원료들을 조작하고 재결합해서 하늘에 바치는, 그러나 하늘도 ᄁᆞᆷ짝 놀랄 제물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정신의 사고 능력이었다.

 

아이작 뉴턴은 위성 발사의 기초가 되는 이론들을 처음 제시한 사람이었다. 그는 만일 높은 곳, 예를 들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높은 산꼭대기에서 대포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쏘면, 대포알이 궤도를 따라 지구 둘레를 돌 것이라고 추론했다. 지구가 회전하여 대포알로부터 멀어지지만, 동시에 지구의 중력은 대포알을 잡아당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영국인의 생각은 화학과 물리학의 다른 많은 발견들과 더불어 과학적 관점의 결과물이었다. 이 관점은 유럽의 정신이 그 전의 길고 어두웠던 마법의 시대로부터 점차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과학 이전의 시대에는 아무리 부족한 것이 많다 하더라도 어쨌든 인간이 이룬 모든 성취는 우주의 장대함에 비추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기계 장치에서는 축복받았을지 몰라도 세계관에서는 겸손하지 못하기에 우리의 똑똑하고, 정확하고, 맹목적이고, 도덕적으로 혼란을 일으키는 동료 인간들 외에는 ᄄᆞᆨ히 숭배할 대상이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선망, 불안, 오만의 느낌들과 씨름을 하게 되었다.

 

그림 

예술 작품의 특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테일러는 그림과 음악이 ‘관념의 감각적 표현’에 매진하는 장르라는 헤겔의 정의를 인용한다. 헤겔은 우리에게 그런 ‘감각적인’ 예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많은 중요한 진실이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재료로 만들어졌을 때에만 우리 의식에 각인되기 떄문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은 어떤 것을 깨우치는 특성이 있다. 우리는 나무에서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갈망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하고, 여름 하늘의 아지랑이 색조에서 사춘기의 자아를 발견하기도 한다.

 

송전 공학 

미국 작가 랄프 윌도 에머슨은 1844년에 발표한 ‘시인’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그의 동료들이 아름다움을 너무 좁게 정의한다고 개탄했다. 시인들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과거의 유명한 화가나 시인의 작품에서 나오는 전원적인 풍경, 또는 때 묻지 않은 목가적 장면에만 한정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에머슨 자신은 산업 시대의 새벽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철도, 창고, 운하, 공장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을 유심히 관찰했으며, 다른 형식의 아름다움이 존재할 가능성에 여지를 주고 싶었다.

 

에머슨은 구식의 시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공장촌과 철도를 보면서 그것들 때문에 풍경의 아름다움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그들이 읽은 책에서 그런 것들이 아직 거룩하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정한 시인은 공장촌이나 철도가 벌집이나 기하학적인 거미줄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자연 질서 안에 포함된 것이라고 본다. 자연은 그 생명력 넘치는 품 안에 그것들을 빠르게 받아들이며, 미끄러져 가는 자동차들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

 

회계 

시어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은 “모두가 탁월한 수준을 향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다가 “만일 실패한다 해도, 적어도 과감하게 큰 일을 하다가 실패했으니, 그의 자리는 승리나 패배가 무엇인지 모르는 차갑고 소심한 영혼들 사이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회사의 행동 규악은 다음과 같이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일터에서 성희롱은 절대 묵과하지 않는다. 성희롱에는 어떤 사람의 외모에 관한 천한 언급, 상스러운 말, 성생활에 관한 질문, 품위를 해치거나, 위협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품위를 훼손하거나, 불쾌한 작업환경을 조성하는 신체 접촉이 포함된다.”

 

역사적으로 어느 사회나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적인 충동을 규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억압은 의도와는 다르게 매우 성적인 결과를 낳는다. 가장 금지된 곳에서 가장 왕성하게 번청하는 것이야말로 성애의 핵심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14세기에 ‘하느님의 어머니’ 수도회만큼 성적인 긴장이 팽팽했던 곳은 없었다. 현대 세계의 사무실은 중세 기독교 왕국의 수도원과 같다. 겉으로는 정숙해 보이지만 비길 데 없이 강한 욕망을 자극할 만한 잠재력을 갖춘 무대인 것이다. 이런 억압 덕분에 적어도 한 부문은 이익을 얻었다. 충분히 논리적인 일이지만, 사무실과 수녀원은 포르노그래피 작가의 상상력에서 유난히 인기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근대 초기의 에로틱한 소설들 가운데 저녁 기도 시간이나 예배당을 성직자들의 방탕이나 채찍질에 초점을 맞춘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듯이, 현대의 인터넷 포르노그래피가 사무직 노동자들이 작업대나 컴퓨터 장비를 배경으로 벌이는 펠라티오나 남색에 큰 관심을 가지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창업자 정신 

창업자 정신으로 혁신적인 학교와 진보적인 정치적 집단을 조직하고,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고, 삶의 질을 높이는 기술을 개발하는데 성공한 실제 사례들이 비록 감질날 정도로 적기는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나는 나 자신이 그런 사람들을 얼마나 깊이 존경하는지 알고 있다. 이런 창업자 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나와는 달리 판매세나 직원 장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자신의 꿈속으로 달아나버리거나 하지 않았다. 이들은 재정, 법, 채용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도 견디고 살아남았으며, 그 결과 그들의 만개하던 공상은 이익도 남고 의미도 있는 현실적 영역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공개적으로 이런 진부한 질투를 고백한 것을 변명할 핑계를 찾자면, 이런 맥락에서 내가 겪은 감정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니체의 말처럼 아직 나 자신이 되지 못한 많은 수의 우리는 혼자 있을 때면 우리가 해보고 싶어하는 여러 가지 일을 그려보면서 스스로 세상을 더 낫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런 유쾌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는 백일몽은 우리 인격 가운데 한 측면, 어린 시절에 부엌 한 구석에 식료품점을 차려놓고 기뻐하거나 정원에 판지 상자로 호텔을 짓고 만족하던 바로 그 측면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어떤 열망과 통찰에 창업이라는 형식을 부여하고 싶은 인간적 충동은 태어날 때부터 평생 동안 끈질기게 지속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항공 산업 

현대에 죽음에 대한 생각이 과거와 달라진 것은 죽은 뒤에도 기술과 사회가 계속 혁명적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 노동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을 도저히 유지할 수가 없다. 우리 조상들은 시간이 흘러도 자신이 성취한 것은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허리케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건물, 스타일에 대한 감각, 우리의 관념들, 이 모든 것은 곧 시대착오적인 현상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크나큰 자부심을 갖는 기계들은 햄릿이 들고다니던 요릭의 두개골만큼이나 진부해 보일 것이다.

 

할 일이 있을 때는 죽음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금기라기보다는 그냥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일은 그 본성상 그 자신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면서 다른 데로는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일은 우리의 원근감을 파괴해버리는데, 우리는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에 감사한다. 현자들이 가르친 대로 죽음에 대비하는 것은 죽음을 지나치게 존중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는 해줄 것이다. 완벽에 대한 희망을 투자할 수 있는 완벽한 거품은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우리의 가여운 불안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 가지 목표로 집중시켜줄 것이다. 우리에게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줄 것이다. 식탁에 먹을 것을 올려놓아줄 것이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줄 것이다.

 

1/22(화)~1/26(토) 빈, 잘츠부르크 – 사랑에 대한 수필

 

1.

 

오스트리아의 빈은 알랭 드 보통의 연애소설에서 나올 법한 연애 감정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배경이 된 도시이다. 사랑과 낭만, 여행과 추억, 고전과 현대의 조화의 세계로 이 연애 도시는 우리를 초대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도읍이기도 했던 빈을 보면서 옛 영광을 떠올리면서 누군가는 권력의 상징성을 또 다른 누군가는 몰락한 영광을 통해 세월의 덧없음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화가이다. 이 아름다움의 화가는 유럽 예술 황금기인 벨 에포크 시대를 이끌며 오직 아름다움과 사랑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나는 빈에서 클림트에 동화되어 빈의 르네상스를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체감한다.

 

9.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Essays in Love, On Love)

 

낭만적 운명론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한 번만이라도 논리에서 벗어나서 그 만남이 우리의 낭만적 운명의 징표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짐을 챙겨서 세관을 통과했을 때 나는 이미 클로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건들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서사적 논리를 부여했다. 클로이와 나는 우리가 비행기에서 만난 것을 아프로디테의 계획으로 신화화했다. 우리는 불안을 벗어나려고 운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이상화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엘리아스 카네티의 말이다. 타인의 흠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그러나 그것이 또 얼마나 무익한지를 암시하는 말이다.

 

이면의 의미 

“나는 당신을 좋아한다”라는 큰 말이 주는 위압감은 “하지만 당신이 그것을 직접적으로 알게 할 만큼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임으로써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클로이와 나는 예의바르게도 솔직한 사랑 고백에 따르는 대가를 전액 지불해야 하는 부담을 서로에게서 덜어주고 있었다.

 

진정성 

침묵은 저주스러웠다.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따분한 사람은 나 자신이 되고 만다.

 

어떤 작가를 좋아하세요? 일은 마음에 드세요? 아무 데서나 살 수 있다면 어느 나라에서 살고 싶어요? 주말에는 주로 무엇을 하세요?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것과 연결되는 “나는 누구여야 합니까?” 그러나 그런 직접적인 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두 사람이 오직 서로만을 위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어렸을 때 힘들었나요? 진정한 사랑을 해본 적이 있나요? 감정적인 사람이세요, 아니면 지적인 사람이세요? 지난 선거에서 어디다 투표를 했어요? 좋아하는 색이 뭐예요? 여자가 남자 보다 불안정하다고 생각하세요?

 

우리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계획이 아니라 우연이다.

 

정신과 육체 

생각만큼 섹스와 대립하는 것은 없다. 섹스는 본능적이고, 반성하지 않으며, 자연발생적이다. 이에 반해 생각은 신중하고, 말려들지 않으려 하고, 판단하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 

우리가 아는 또다른 마르크스(Grucho Marx)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여줄 클럽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고 농담을 했다. 이 농담은 클럽 회원권과 마찬가지로 사랑에도 적용되는 진리이다. 클럽에 가입하기를 소망하면서 그것이 실현되자마자 그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클로이가 나를 사랑하기를 바랐으면서, 막상 그녀가 나를 사랑하자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알베르트 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 매우 온전해 보이고-육체적으로 온전하고 감정적으로 “통합되어” 보이고-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 내부에 부족한 데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겠지만, 상대에게서도 비슷하게 부족한 데를 발견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답을 찾기를 기대했지만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사본만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틀림 음정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원래 우리와 하나였다가 떨어져나간 우리의 “반쪽”이기 때문에 이런 익숙한 느낌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태초에 모든 인간은 등과 옆구리가 둘에, 손과 다리가 넷, 하나의 머리에 두 얼굴이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는 자웅동체였다. 이 자웅동체들은 워낙 막강하고 자존심도 강해서 제우스는 이들을 남자와 여자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날부터 모든 남자와 여자는 자신으로부터 떨어져나간 반쪽과의 결합을 원하게 되었다.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여자를 더 잘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은 머릿속에서 작곡한 놀라운 심포니를 나중에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소리로 들었을 때의 당혹스러운 느낌과 같다.

 

사랑이냐 자유주의냐 

혁명의 시작은 심리적으로 볼 때 남녀관계의 시작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사랑과 사랑의 정치의 시작이 똑같이 장밋빛이라면, 그 마지막도 똑같이 핏빛이다.

 

자유주의 정치학의 가장 위대한 옹호자는 존 스튜어트 밀이다. 그가 1859년 출간한 『자유론』은 사랑 없는 자유주의에 대한 고전적인 옹호이다. 밀은 국가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을 그냥 내버려두어야 하며, 개인적인 생활을 이렇게 저렇게 영위하라거나, 무슨 신을 섬기고 어떤 책을 읽으라거나 하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력 있게 주장한다. 밀은 왕국이나 압제는 “국가의 모든 구성원의 신체 및 정신적 규율 전반에 깊은 관심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근대 국가는 가능한 한 뒤로 물러서서 국민이 스스로 통치하게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밀의 논문에 담긴 지혜는 아주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통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적용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개인관계에 적용될 경우 밀의 지혜는 그 호소력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는 것 같다. 사랑이 오래 전에 사라져버리고 껍질만 남은 결혼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사랑과 자유주의 사이의 선택의 문제로 돌아온 것 같다. 나와 클로이의 관계가 공포정치 수준에 이르지 않았던 것은 다름 아닌 유머 감각이다. 유머가 있으면 직접적으로 대립할 필요가 없었다.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적오도 사랑의 90퍼센틀르 이루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아름다움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사랑은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라고 말했다. 플라톤과 『보그』 편집자에 따르면, 각 부분의 균형 잡힌 관계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움의 이상적 ‘형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지상의 육체들은 이 형상을 좀 낫거나 좀 못하게 닮는다.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아름다움에는 수학적 기초가 있다. 따라서 잡지 표지에 나온 얼굴이 즐거움을 주는 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인 것이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조각론』에서 그 결과를 요악하면서 아름다움은 “모든 부분들의 조화이며, 그런 조화가 나타나는 대상에서는 모든 부분이 어떤 비율에 따라 관련을 맺고 있으므로, 무엇을 하나 보태거나 줄이거나 바꾸면 더 나빠질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플라톤과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그들의 미학 이론에서 뭔가를 빠뜨린 것이 틀림없다. 나는 클로이가 지나칠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매력을 꼭 집어서 말하는 것은 망설여진다. 나는 아름다움의 객관적 기준이라는 플라톤적 관념을 배격하고, 대신 미학적 판단은 “결정 근거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나오는 견해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클로이를 바라보는 방식은 유명한 뮐러-리어의 착시와 비교될 수 있다. 클로이에 대한 나의 느낌을 더 정확하게 요약한 아름다움의 정의는 스탕달이 제공해주었다.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 나는 내가 플라톤주의자들보다 클로이를 아름답게 여긴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진정한 미는 아슬아슬하게 추를 희롱한다. 자기 자신에게 모험을 건다. 비율의 수학적 규칙에 편안하고 안주하지 않고 모험에 나서서, 추로 미끄러질 수도 있는 바로 그 세밀한 곳들에서 매력을 발산한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했듯이, 고전적으로 아름다운 여자는 남자에게 상상력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아름다움에 관한 주관적 이론은 기분 좋게도 관찰자를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든다.

 

사랑을 말하기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라 로슈푸코의 말인데, 역사는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랑은 사회에 의해서 구성되고 규정된다. 뉴기니의 마누족에게는 사랑이라는 말도 없다. 다른 문화에는 사랑이 존재하지만, 특정한 형태로 주어진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랑의 시에는 수치, 죄책감, 양면 공존 등의 감정에 대한 관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동성애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기독교인들은 몸을 배척했다. 음유시인들은 사랑을 보답받지 못하는 정열과 동일시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사랑을 종교로 만들었다. S. M. 그린필드는 『소셜로지컬 쿼터리』에서 사랑은 근대 자본주의에 의해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생명을 유지한다고 말했다.

 

마시멜로하다는 말은 너무 남용되어 닳고 닳아버린 사랑이라는 말과는 달리 나의 마음 상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사랑은 적어도 클로이와 나에게는 이제 단순히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에서 맛있게 녹는, 지름 몇 밀리미터의 달콤하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두 눈이나 모양이 제대로 갖추어진 입에서 매력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슈퍼마켓 계산대 위에서 움직이는 여자의 손에서 매력을 찾아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것은 진정한 가치, 호기심이 덜한 사람이나 사랑이 덜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의미 없어 보일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 바로 연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마흔이 되면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얼굴을 가지게 된다.” 조지 오웰은 그렇게 썼다.

 

회의주의와 신앙 

철학자들은 인식론적 의심을 탁자, 의자,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뜰의 존재, 그리고 이따금씩 원치 않는 아내의 존재에 한정시킨다. 하지만 이 질문을 확대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객관적 실재와 관련이 없는 내적인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가능성이 나타난다. 서양의 철학적 사고의 출발점에서 플라톤은 무지로부터 지식으로 나아가는 진보를 어두운 동굴로부터 밝은 햇빛으로 나아가는 영광스러운 여정에 비유했다. 진리가 늘 착각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착각으로부터 지식으로 향하는 길을 따르는 것이 유익하다는 소크라테스적인 가정을 단순히 인식론적 관점이 아니라 도덕적 관점에서 문제삼기까지는 2300년이 걸렸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칸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진리에 이르는 길을 놓고 플라톤을 비판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작업의 가치에 대해서 심각하게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니체는 『선악의 피안』(1886)에서 마침내 핵심을 움켜쥐고 이렇게 물었다. “우리 가운데 무엇이 진정 ”진리“를 원하는가? 문제는 얼마나 삶을 발전시키느냐이다. 그릇된 판단들을 포기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고,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파스칼은 설사 신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그 작은 가능성이 주는 기쁨이 더 큰 가능성이 주는 혐오를 압도하기 때문에 신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연인들은 오랫동안 철학자 노릇을 할 수가 없다. 연인들은 의심하고 캐물으려는 철학적 충동에 대립되는, 믿고 신앙을 가지려는 종교적 충동에 굴복한다. 연인들은 사랑 없이 의심을 하는 것보다는 틀려도 사랑을 하는 모험을 더 좋아한다.

 

친밀성 

섹스는 범죄가 아니라 의무이다. 그래도 클로이와 나에게는 우리의 결합을 확인해줄 수수한 이야기, 우리를 결합하는 일군의 공동 경험이 있었다. 경험이란 무엇인가? 예의바른 일상을 부수고 짧은 시간 동안 고양된 감수성으로 새로움, 위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을 목격하는 것이다. 공유된 경험이라는 기초 위에서 친밀성은 자라날 기회를 얻는다.

 

“나”의 확인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자신을 규정하고 자의식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혼자서는 절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스탕달의 말이다. 성격의 기원은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는 의미이다. 자신이 온전하다는 느낌을 얻으려면 근처에 나 자신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 때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정체성을 소유할 능력을 상실한다. 사랑 안에서 자아가 지속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의미론적으로 볼 때 사랑과 관심이 거의 맞바꾸어 쓸수 있는 말이라는 것은 우연히 아니다. “나는 나비를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나는 나비에 관심이 많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누리는 행복은 두 가지 종류의 과잉에 의해 제한이 되는 것 같다. 하나는 질식이고 또 하나는 외로움이다. 스탕달의 말대로 다른 사람들 없이는 성격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침대를 함께 쓰는 사람은 능숙한 중개자여야 한다.

 

마음의 동요 

우리 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데도 왜 그것이 구속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짝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기울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왜 그것을 아쉬워할까? 사랑의 요구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늘 갈망의 요구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슬픔에 빠지는 것은 그 삶들을 다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택을 할 필요가 없는 시간, 모든 선택(아무리 멋진 선택이라고 해도)에 따르는 불가피한 상실로 인한 아쉬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

 

성숙이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받을 만한 것을 받을 만한 때에 주는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이성에 따른 삶을 옹호하고 이성의 이름으로 욕망에 의한 삶을 비난해왔다면, 그것은 이성이 지속성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추론의 결과 철학자들은 안정된 정체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내가 누구냐하는 것은 많은 부분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양면적인 태도를 누르는 것은 그 반대 방향에 있는 안정과 지속을 향해 나아가려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두려움 

여행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꿈을 좇아서 현실로 들어가려는 시도이다. 영국 의학협회에서는 안헤도니아를 행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갑작스러운 공포에서 생기는 것으로, 고산병과 아주 흡사하다고 규정했다. 스페인의 이 지역(발렌시아 뒤편 산속의 아라스 데 알푸엔테라는 마을의 개조한 농가)을 여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흔한 병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싫어한다. 이것은 나는 이런 식으로 너를 사랑하는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싫다는 근본적인 주장과 통한다. 클로이가 대표하는 행복을 받아들이는 어려움은 거기에 이르는 인과 과정이 없다는 것, 따라서 내 삶에서 그 행복을 빚어낸 요소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서 온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 방에 혼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파스칼의 말이다. 클로이를 사랑하면서 생기는 불안은 부분적으로는 내 행복의 원인이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상황에서 오는 불안이었다. 클로이는 갑자기 나에게 흥미를 잃을 수도 있었고, 죽을 수도 있었고,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도 있었다. 사랑의 종말과 삶의 종말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삶의 종말은 죽음 뒤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위안이 있는 반면 사랑의 종말에는 관계의 끝이 반드시 사랑의 끝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위안이 없다는데 있다.

 

수축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재치나 재능이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네가 너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눈 색깔이나 다리의 길이나 수표책의 두께 때문이 아니라 네 영혼의 깊은 곳의 너 자신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내 얼굴보다는 머리를 칭찬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꼭 얼굴을 칭찬해야겠다면, 정적이고 피부조직에 기초를 둔 코보다는 운동신경과 근육이 통제하는 미소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주기 바란다.

 

낭만적 테러리즘 

일반 테러리스트들은 낭만적 테러리스트들에 비해서 분명한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요구에는 모든 요구 가운데 가장 터무니없는 요구, 즉 나를 사랑해달라는 요구가 포함되지 않는다.

 

선악을 넘어서 

이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이 비도덕적 행동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고통이나 쾌락과는 관계없이 의무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선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도덕률에 일치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행동이 도덕률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경향에 기초한 도덕성이라는 공리주의적 관점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주장이다. 칸트 이론의 핵심은 도덕성이란 어떤 행동을 수행하는 동기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리주의자들처럼 사랑하며 시간을 보냈다. 침실에서 우리는 플라톤이나 칸트가 아니라 홉스와 벤담의 추종자였다. 우리는 초월적 가치가 아니라 선호에 기초해서 도덕적 판단을 했다. 홉스는 『법의 원리』에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를 즐겁게 하고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선이라고 부른다.” 나는 나에게 쾌락을 주느냐 고통을 주느냐에 따라서 클로이에게 어떤 도덕적 딱지를 붙일 것이냐를 결정했다.

 

심리적 운명론 

프로이트의 세계에서는 한 남자가 의식적으로는 한 여자를 사랑하려고 하면서 무의식적으로는 그녀를 다른 남자 품으로 밀어넣으려고 안간힘을 쓸 수도 있다.

 

자살 

인간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며 그 바람에 자살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되었다. 인간은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피조물이다. 그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햄릿에 대한 내 대답은 사는 동시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수 콤플렉스 

나의 고통을 젊은 베르테르나 마담 보바리나 스완의 고통과 동일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상처받은 사람들은 예수와 경쟁할 수가 없었다. 예수는 그가 사랑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악과 대비되는 순결한 미덕과 의문의 여지 없는 선을 지닌 존재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착하고 완전히 의로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배반당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예수 콤플렉스에서 나의 우월감의 일차적 근거는 내 고립과 고통이었다. 나는 고통을 겪는다, 고로 나는 특별하다. 나는 이해받지 못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크게 이해받을만한 자격을 갖춘 것이 틀림없다.

 

생략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아랍 속담이 있다. 우리 대부분은 시간표와 다이어리의 엄격한 요구에 이끌려가지만, 마음의 자리인 영혼은 기억의 무게에 힘겨워하며 노스탤지어에 젖어서 느릿느릿 뒤따라온다.

 

사랑의 교훈 

성숙한 사랑은 절제로 가득하며, 이상화에 저항하며, 질투, 마조히즘, 강박에서 자유로우며, 성적 차원을 갖춘 우정의 한 형태이며, 유쾌하고, 평화롭고, 상호적이다. 미성숙한 사랑은 이상화와 실망 사이의 혼란스러운 비틀거림이며, 환희나 행복의 감정이 익사나 섬뜩한 구토의 인상과 결합되어 있는 불안정한 상태이며, 마침내 답을 찾았다는 느낌이 이렇게 헤맨 적이 없다는 느낌과 공존하는 상태이다. 미성숙한 사랑의 논리적 절정은 상징적이든 현실적이든 죽음이다. 성숙한 사랑의 절정은 결혼이며, 일상을 통해서 죽음을 피하려는 시도이다. 미성숙한 사랑은 타협을 용납하지 않으며 일단 타협을 거부하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격변으로 가는 길에 올라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융 학파의 훌륭한 분석가가 있었다면 햄릿의 운명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셀로도 치료실의 소파 위에서 자신의 호전성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로미오도 중매 회사를 통해 좀 더 적합한 짝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도 가족 치료를 통해서 문제를 공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술은 사랑에 수반되는 문제들에 병적인 강박감을 가지는 반면, 낭만적 실증주의자들은 고뇌와 상심의 가장 일반적인 원인을 예방할 수 있는 매우 실제적인 조치에 초점을 맞춘다. 페기 니얼리 박사의 『괴로운 마음』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니얼리 박사는 제3장에서 문제의 근원이 결함 있는 부모라고 밝힌다. 치료 과정에 들어가 유년시절을 다시 짚어보면 자신의 마조히즘의 뿌리를 이해하게 되고, 어울리지 않는 짝을 변화시키려는 욕망이 사실은 문제 있는 부모를 제대로 된 부모로 바꾸던 어린 시절의 공상의 잔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니얼리 박사는 보바리 부인의 문제를 해석하기는 했다. 그러나 문제를 파악하는 것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 지혜와 지혜로운 인생은 크게 다르다. 우리는 모두 능력 이상으로 똑똑하다. 그러나 사랑이 미친 짓임을 안다고 해서 그 병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어쩌면 지혜로운, 또는 전혀 고통 없는 사랑이라는 개념은 무혈 전투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모순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평가할 때에는 교조적 낙관주의나 비관주의로 달아나지 말아야 하고, 두려움의 철학이나 실망의 윤리학을 구축하지 말아야 했다. 사랑은 분석적 정신에게 겸손을 가르쳤다. 분석에는 절대로 결함이 없을 수 없다는 교훈, 따라서 아이러니로부터 절대로 멀리 벗어날 수가 없다는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10. 우리는 사랑일까(The romantic movement)

 

서장 

앨리스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사람들의 입에서는 대뜸 ‘몽상가’라는 말이 나왔다. 문명과 그에 따른 회의주의란, 외피 아래에서, 그녀의 눈빛은 꿈꾸는 듯, 현실에서 벗어나 영원히 다른 세상으로 빠져든 사람처럼 초점을 잃었다. 그녀는 사랑에 관한한 시인들과 영화인들이 미학의 마법 공간에서 아름답게 그려낸 영혼의 결합 같은 관계가 아니면 타협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앨리스는, 우정은 비겁의 한 형태일 뿐이며, 사랑이라는 더 큰 책임과 도전을 회피하는 것이라는 프루스트의 대단히 비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결론에 찬성하고 싶었다. 앨리스는 행복이란 즐거운 상태가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현실 

세상의 현상이 만드는 이질적인 거품과 직면해서 철학자들은 실재하는 물질이냐 정신이냐 선택하도록 끝없이 권유했다. 탈레스의 경우, 실재는 만물의 근원이며 물질의 기본 원소인 물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실재의 본질이 불에 있다고 했다. 플라톤은 이성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에, 홉스는 운동에, 헤겔은 정신의 진보에, 쇼펜하우어는 의지에, 보바리 부인은 사랑에, 마르크스는 해방을 향한 계급투쟁에……. 이 사상가들은 당연히 세상에 다른 것들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자신들의 개념이 인간사의 복잡한 작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

 

앨리스는 실재에 대한 보바리 부인의 판단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그녀 역시 인간의 가능성은 두 사람의 친밀함에서 절정을 이룬다고 믿었다. 오직 사랑할 때에만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선언할 수도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같이 목욕하고 사랑을 나눈 후 그녀를 껴안고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런 언어로 대화할 사람이 있느냐 하는 데 달렸다.

 

예술이나 생활이냐 

플라톤은 예술이란 삶을 모방하고자 분투하지만 결국 실패할 뿐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은 이상 사회에서는 잉여 인간이었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이 생활을 모방하는 게 아니고 생활이 예술을 모방한다. 예술이 생활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3차원적인 애인에게 받는 키스는 영화에서 보는 키스보다 판에 박은 듯 형편없다는 것이다. 앤디 워홀에게 예술은 플라톤적으로 사물을 모방했을 뿐 아니라 와일드식으로 그것을 교양했다. 애인이 “당신처럼 사랑스런 손목/사마귀/속눈썹/발톱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거 알아?”라고 속삭이는 것가 예술가가 수프 통조림이나 세제 상자의 미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것은 구조적으로 같은 과정이 아닐까? 그렇게 사소한 것에 감탄하는 것은 수프 통조림이 벽에 전시되는 일만큼이나 우스꽝스럽지만, 그런 사소함이 더 크고 중요한 전체, 이를테면 온전한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의 일부이기에 찬탄 받을 만한 것이다. 어떤 것을 큰 그림의 일부로 보면, 그것은 그저 사소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넘어선 어떤 것이 되었다.

 

이야기에 대한 선망 

아리스토텔레스는 공포물과 비극의 차이가 ‘구성 plot’에 있다고 했다. 훌륭한 이야기는 불쾌한 대목이 나오더라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이 온통 무의미한 대사와 감정뿐인 바보 같은 이야기가 아님을 믿게 해주었다.

 

냉소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경우 어머니를 미워했으며 매우 우울했던 햄릿형 인물로 유명하다. 누구라도 어머니와 사이가 나쁠 수 있겠지만, 정신세계가 특별한 사람은 이런 경험을 일반화해서 여자란 ‘일생 동안 유치하고 아둔하며 근시안적인, 한마디로 덩치 큰 아이’라는 인생철학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쇼펜하우어가 글을 수천 쪽 쓰면서도, 자신이 한 묶음으로 경멸한 ‘여자들’과는 달리 정작 정말로 자신을 괴롭게 했던 단 한 여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쓰지 않은 것을 보면 흥미롭다. 바로 그의 어머니다.

 

파티 

“무슨 일 하세요? 몇 살인가요? 어디 사세요?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나요?” “저는 독립생활에 관심이 있어요. 사람을 만나지 않고 그것에 영향 받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우고 있어요.” 에릭은 사람들에게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하면 쉽게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동정녀 잉태 

앨리스와 에릭이 사랑을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의 성생활 역사가 만났다. 좀 어두운 면에서 보자면 섹스 기교의 역사는 실망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몸짓에는 지나와야 했던 과거의 증거가 담겨 있었다.

 

연구 주제의 역사적인 차원을 무시하는 것이 철학자들의 가장 흔한 실수라고 불평한 니체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는 심각한 양면성이 있다. 한편에는 모든 것을 보존하려는 욕구(백과사전주의), 다른 한편에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려는 욕구(혁명)가 있다. 사랑에 대한 앨리스의 태도는 역사적인 접근의 반대인 이상주의를 견지했다. 낭만적인 혁명가인 그녀는 같이 자는 남자가 성생활 역사의 종장을 차지하리라고, 그녀 인생의 해답이라고 믿고 싶었다.

 

사랑을 사랑하다 

앨리스가 그 남자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일 것이다. 그녀는 화창한 봄날에 지혜롭고 잘생긴 남자와 팔짱을 끼고 템스 강변을 걷는 기쁨을 만끽하는 데만 몰두했다. 앨리스가 지금 에릭을 신중하게 말해서 사랑하는 것일 리가 없다면, 그녀는아마 사랑을 사랑한 것이다.

 

불확정성 

비평가들은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의 어느 대목에서도 여주인공의 생김새를 설명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고정된 상과 현실적 제약의 독재에서 벗어나, 독자의 상상에 맡길 수 있다는 것이 책의 특권이다. 시적 연상의 형식은 적절한 세부 사항들을 잘 모아낸다. 유명한 ‘한 여자와 함께인 듯 행복하게’라는 랭보의 시구를 보면 이 구절은 진부하게 여겨질 수 있으나 보편성을 띤다.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 덕에 호텔과 매혹적인 연인은 풍부한 상상력의 방아쇠 구실을 할 수 있었다.

 

촉매 

욕망의 두 가지 형식을 끄집어낼 수 있다. 하나는 ‘음식이 내 입맛에 꼭 맞으니 레스토랑이 마음에 드네.’라는 자율 판단. 다른 하나는 ‘다들 그렇다니까 여긴 훌륭한 레스토랑일 거야.’라는 모방 심리. 지난 400년간 철학, 정치학, 예술은 자율성을 찬미했다. 자유인들은 욕망을 직접 표현하고, 스스로의 마음에 따르고, 대중의 견해나 군중의 두려움에 휩쓸리지 않으며, 유행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지도 않는다. 세상의 ‘배우들’이 품고 있는 욕망(명성, 돈, 권력)은 그 근거가 사회에 있으며 따라서 어느 정도는 허위다.

 

“나한테 등이 곱거나 손이 하나 없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을 데려와 보라니까. 난 그 사람을 섹시하다고 느낄걸. 그들이 섹시하고 멋진 데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나 혼자일뿐이니까. 아무튼 사랑한다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섹스, 쇼핑, 소설 

1856년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르뷔 드 파리에서 『보바리 부인』을 연재하면서 세계 최초로 ‘섹스와 쇼핑 소설’ 작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산업 자본주의가 진행되던 바로 그 시기에, 보바리 부인이 상업적이고 성적인 오르가슴 때문에 파멸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는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이 칭하는 소비 혁명이 등장하던 때였고, 19세기의 청교도주의가 여성의 자유를 향한 진보적 발전을 방해하던 때였다. 이 소설에 대한 판금 조치는 단순히 성뿐 아니라 쇼핑을 근본적으로 억압하려는 도덕주의적인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필요 없는 쇼핑에 대한 도덕적인 공격과 출산 없는 성교에 대한 도덕적인 공격 사이에는 뚜렷한 연관이 있다. 두 가지 모두 쾌락을 검열당해왔으며, 특히 모자를 쓰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들이 여성의 쾌감을 검열했다.

 

세탁 주기 

앨리스에게 ‘자아 발견’이란 그 중의 한 자아를 찾는다는 의미였다. 이 지긋지긋한 빨래건조기를 멈추고, 어느 정도 안정감과 평온을 줄 수 있는 채널을 찾는 것이었다.

 

가치 체계 

① 실내 장식 – 에릭이 동양에 대해 말할 때 늘 입에 올리는 단어가 가벼움, 질서, 정연함, 깔끔함, 여백이었다. 가구를 배열한 방식은 집주인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어린이를 치료하면서, 언어를 완전히 익히지 못한 아이들에게 ‘언어 치료’를 해야 하는 문제에 부딪혔다. 클라인, 안나 프로이트, 위니캇 같은 이론가들은 어린이들이 언어 외의 수단을 통해 내면세계를 표현할 수 있음을 곧 알아차렸다. 아이들은 주로 장난감이나 다른 사물을 이용해서 마음을 나타냈다. 에릭은 삶을 기능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인생도 아파트처럼 잘 배열되기를 바랐다. 사교 생활, 재정 문제, 연애와 섹스가 모두 조화롭고 합리적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앨리스는 실내장식에 대해 기능보다는 감정을 중요시했기에, 물건의 가치도 얼마나 제 기능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기억이 담겨 있느냐로 판단했다.

 

② 감상주의 – 에릭은 자기 능력으로 타인의 약점을 보완해주지 못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식의 잘못을 용서하는 부모와 같은 태도를 취할 줄 몰랐다. 에릭이 약자에게 연민을 느끼는 감상에 반대하면서 굳은 의지와 품위를 가지고 당당하게 장애를 극복하는 이들을 존경한다면 그건 앞뒤가 맞았다. 하지만 감상적이지 않은 에릭은 약자를 경멸하고 강자를 존경하는 중간에 멎어 있었다.

 

③ 육체적인 벌거벗음

 

④ 감정적인 벌거벗음 – 건축가들을 낭만파와 지성파로 나눌 수 있다. 지성파 건축가는 건물의 무게를 여러 기둥에 분산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삼아, 사고가 나더라도 다른 기둥들이 무너진 기둥의 몫을 나누어 지도록 한다. 에릭은 무게를 폭넓게 분산했다. 앨리스는 이와 딴판으로 매우 현명하지 못한 건축가였다. 그 낭만파 건축가는 모든 욕구를 기둥 하나에 모으는 경향이 있었고 그 기둥 하나가 온 무게를 견디기를 바랐다.

 

⑤ 너그러움 – 경제의 세계에서는 빚이 나쁜 것이지만, 우정과 사랑의 세계는 괴팍하게도 잘 관리한 빚에 의지한다. 에릭은 빚을 제때 갚긴 했지만, 엘리스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너무 급하게 빚을 갚고 그대로 잊어버리는 바람에, 그 남자는 그녀와 똑같은 감정의 성숙을 실현하지 못했다.

 

상대방을 안다는 것 

앨리스는 사랑하는 남자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앨리스는 예상할 수 없고, 끊임없이 질문과 해석이 뒤따르는 불안정 상태에 힘이 빠졌다.

 

예측 가능성 

심리학자 파블로프는 덜 알려진 실험을 통해, 반응하도록 훈련하던 신호에 충분한 혼란을 주면 개가 몸을 떨고 대소변을 보면서 신경증 상태에 빠질 수 있음을 밝혔다. 종을 울리고 먹이를 주다가 갑자기 종을 울리고 빈 접시를 주면, 개는 몇 번 같은 경험을 한 끝에 빈 접시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종이 울리고 나서 때로는 먹이가 나오고 때로는 안 나오는 식으로 불규칙하게 진행되면, 개는 이제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알 수 없게 되고, 음식과 빈 접시의 연관성을 파악할 수 없어 혼란에 빠진다. 종소리가 때로는 이것을 의미하다가 때로는 다른 것을 의미하면 늘 예상했던 것과 반대로 되는 것이지만 개는 천천히 광견 상태에 빠져들었다.

 

사랑의 영속성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캇은 아기가 어머니에게서 떨어지는 순간부터 어머니는 늘 곁에 있으며 곧 돌아오리란 믿음을 단념하는 순간까지 일정한 시한이 있다는 유명한 주장을 했다. 위니캇은 영상의 지속성을 강조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대상의 연속성을 확신하게 하는 요소는 주어지기보다는 발달하는 특성이다. 심리학자 장 피아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일정 연령 미만인 어린이는 자기 시야 밖으로 벗어난 물체가 다른 곳에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다. 생후 8개월에서 10개월 사이인 아기 앞에서 곰 인형을 감추면 아기는 인형을 찾기보다 곰 인형의 상징적인 죽음을 슬퍼한다. 하지만 이 기간이 지나면 아이는 대상영속성을 인지하고 곰을 찾아 나서며, 곰 인형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고 찾는다고 피아제는 설명했다.

 

사랑의 영속성은 상대가 당장 관심의 징표나 신호를 보내지 않아도 사랑이 지속되리라는 믿음, 상대가 밀라노나 빈에서 주말을 보내더라도 다른 정인과 카푸치노를 마시거나 초콜릿 케이크를 먹지 않으리라는 믿음, 침묵은 단순한 침묵일 뿐 사랑의 종말을 암시하는 게 아니라는 믿음이다. 평소에는 멀쩡한 사람도 사랑을 하면 편집증에 걸리고, 별별 최악의 생각을 다 한다. 편집증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따르는 극히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재앙의 시나리오에 끌려들면 사랑은 상처를 악화시킬 뿐이다.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라는 억압된 두려움과 내가 말도 안 되는 걱정으로 당신을 괴롭히면 안 되는데라는 타고난 심리적 규범이 폭발적으로 뒤섞여 상호 작용하는 것이 애인의 편집증을 낳는 마법이다.

 

권력과 007 

힘이란 단어는 사전적으로 행위 능력을 의미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는 권력이란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영향을 미치거나, 사람이나 사물에게 작용을 가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사랑에서는 권력이 훨씬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정의에 의존하는 것 같다. 사랑에서는 권력이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능력으로 간주된다. 사랑의 권력은 아무것도 주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다른 영역에서와는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스탕달은 애인 사이에서는 언제나 한쪽이 상대방을 더 사랑하며, 그래서 두 사람 관계의 권력이 인지되기 마련이라는 비관적인 견해를 밝혔다.

 

신성한 관계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서 보바리 부인은 신, 쇼핑, 사랑을 갈망한 전형적인 근대 여성으로, 세 가지 모두를 통해 자기초월의 한 형태를 추구했다. 남편 샤를은 내세보다는 현세에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었다. 농부들의 잘린 팔다리를 붙여주며 거친 시골 의사로서 생계를 이을 뿐 아니라, 시간 맞춰 나타나서 에마의 눈을 마주 봄으로써 종교적인 신비화를 피하는 면에서도 그러했다. 샤를은 필요한 것을 다 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눈썹을 매만져주어서 에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담 보바리가 사랑하는 데 필요한 조건은 곁에 있는 게 아니라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신성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 간의 거리에서 비롯되는 달콤 쌉싸래한 쾌감을 먹고 자랐다. 남편은 그녀의 외도 상대인 믿지 못할 애인들이 주는 짜릿한 긴장감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녀에게 신성한 사랑은 『한 여름 밤의 꿈』에서 라이샌더가 말하는 경구 ‘진정한 사랑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라는 말의 역이었다.

 

신성한 사랑의 특성은 숭배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성경 속의 불운한 인물 욥은 성격이 좋고 선했지만, 믿기 힘들 정도로 심한 고난을 당했다. 성경 에서는 욥이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욥이 신에 대한 사랑을 지켰다는 점이다. 욥이 불평하지 않고 고난 중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신이 옳고 자신이 그르다는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특정한 학문 영역에는 명쾌한 설명에 편견을 갖고 난해한 글을 존중하는 오랜 경향이 있다. 칸트나 헤겔, 후설, 하이데거의 빡빡한 글에 몰두하는 학자들은 그들의 뛰어난 발상에만 끌리는 게 아니다. 학구적인 자기학대는 은유적인 편견을 반영한다. 진실은 얻기 어려운 보물이며, 쉽게 읽고 배울 수 있는 것은 경박하고 중요하지 않다는 편견이다. 도서관의 환한 불빛 아래에 학문의 좌우명은 이렇게 쓰여 있다. 읽기 힘든 책일수록 더 진리에 가깝다. 인간관계에서도 이런 현성이 있다. 마음이 열려 있고, 명쾌하고, 예측 가능하고, 시간을 잘 지키는 애인보다는 힘들게 하는 애인이 더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어느 매정한 비평가는 이 비중 있는 독일 철학자가 결국은 극히 평범한 사상가이며, 두세 가지 발상은 그럴듯하지만 표현력이 지독하게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에릭의 짐 

에릭이 곧잘 무심해지거나 딴청을 부리거나 앨리스의 전화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예의 바르지 않은 것은 둘째 치고 자신이 그만한 애정을 받아 마땅하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릭은 감상에 뜨악해서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고, 상대의 애정에 받아들이기 힘들고 못마땅한 역겨움을 경험했다. 에릭은 “나한테 화났어요?”라는 질문-잘못한 게 없는, 착하고 상냥한 여자가 묻는-에 내포된 그녀의 너그러움에 익숙하지 않았다. 에릭은 몹시 불퉁했고, 그걸 자책할 만큼 성숙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상대에게 책망을 받을 일이라는 것은 인색했다. 도시풍 정장 아래 유치하고 진부한 사고방식을 감춘 에릭과 동료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는 부담을 덜고자 감성적인 욕구를 성적인 욕구로 치환하는 케케묵은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왜 사랑받는가? 

① 육체 때문에 사랑받는 것 - ‘나’의 육체에 대한 타인의 지각은 내가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이다. 내면적으로는 육체가 우리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타인을 파악하는 데 이런 생각을 적용하기란 어렵다. 오직 자기성찰에 근거할 때에만 우리가 외형에 대해 주장할 까닭이 없어진다. 데카르트가 육체와 정신을 탐구하고서 『병법서설』에서 ‘나라는 존재는, 정신을 의미하며……육체와는 완전히 분리된 존재다.’ 라고 주장할 만도 하다(그가 실크 손수건과 플랑드르산 반바지를 좋아했다는 전기 작가들의 기록은 그의 저작에 담긴 핵심 내용과 배치되기는 하지만).

 

내숭이란 모순으로 정의될 수 있다. 뭔가 강력하고, 탐나고, 장악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렵고 싫지만, 동시에 그것에서 혜택을 얻으면 행복할 것이다. 성공한 예술가는 자본주의 제도를 비난하면서도 작품을 팔아 돈을 벌면 좋아하는 내숭을 보인다. 수백만 달러급 모델은 “예뻐야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에요.”라고 내숭을 피운다. 데카르트의 관점에 따라 육체는 핵심에서 제외되었다. 섹스는 멋진 일이니까 무시할 순 없어도 핵심은 아니었다. 앨리스가 사랑받는 것은 신비스러운 나머지 부분들 때문일 터였다. 육체를 뺀 나머지 부분, 그녀가 ‘나’라고 부르며 살아온 이력과 인상, 습관, 성품이 뒤죽박죽된 그것 때문이었다.

 

② 돈 때문에 사랑받는 것 – 앨리스의 아버지는 애초에 사랑과 돈의 관계를 인식했기 때문에 부자가 되려고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외적인 자산 때문에 끌리는 여자들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외모에 끌리는 경우에 그렇듯이.

 

③ 이뤄놓은 일 때문에 사랑받는 것 – 앨리스는 자신이 이룩한 성취에 대해, 유명해지기 전에 만난 친구들하고만 사귀는 할리우드 스타들 같은 태도를 취했다. ‘무명이었을 때 날 좋아한 사람이라면 언제나 날 사랑해줄 것’이라는 게 그들의 암묵적인 태도였다. ‘내가 주목받을 만하니까 사랑한다면, 당신이 사랑하는 게 유명세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걸 어떻게 알죠?’

 

④ 나약함 때문에 사랑받는 것 – 우리가 기억하는 첫 번째 사랑은 무력하고 약한 상태에서 보살핌을 받는 것이다. 한때는 잘 나가던 거대 자동차 회사가 무너지자 둘은 열띤 토론을 벌이게 됐다. 앨리스가 자동차 회사를 옹호한 것은 단점이 있어도 사랑받을 권리를 변호하고자 함이었다. 에릭은 자본주의의 적자생존을 강조했고 그녀는 그 남자가 사업뿐 아니라 사랑에서도 같은 논리를 지지할까봐 두려웠다. 자동차 회사의 진짜 장점이 뭐든 간에, 그녀가 보인 것은 조건 없이 그녀가 망가지더라도 사랑받고자 하는 어린 시절 욕구의 흔적이었다. 여기서 국가는 갈구의 대상이자 무엇이든 받아주는 부모였다.

 

⑤ 세세한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 – 앨리스에게 사랑은 상대에 대해 아는 게 많을수록 더 진실하게 느껴졌고, 그만큼 사랑이란 세세하게 많이 아는 것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증거도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래서 결국 그녀의 본모습을 알게 해주는 사람에게 신뢰가 생겼다.

 

⑥ 불안감 때문에 사랑받는 것 – 모르는 두 사람이 파티에서 만나서, 파티에서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게 이상하다고 서로 털어놓으면, 사교적인 어려움을 공유했다는 사실 때문에 대화를 풀어가는 데 묘하게 장애가 없어진다. 불안감은 사회적인 압력과 기대에 직면해서 개인이 겪는 두려움이다. 무관심한 일이나 불안감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은 관습을 깨는 일이고, 사회가 당연시하는 것들에 대해 불편하다고 인정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서 공통된 정체성을 기반으로 동지애를 굳힐 수 있다.

 

⑦ 두뇌 때문에 사랑받는 것 – 현대의 기사도적인 관점에서 두뇌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숭고한 사랑이라고 한다. 앨리스가 육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은 싫다고 한다면, 그녀는 두뇌로 사랑받고 싶어하나보다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앨리스는 두뇌의 능력이라는 것이 실은 본모습과는 무관한 정신의 곡예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 두뇌는 더 나누어서 봐야 할 것이었다. 지성과 그 밖에 다른 것, 가장 나중에 남아 더 파악하기 어렵고 말랑말랑한 것으로.

 

⑧ 존재 때문에 사랑받는 것 – 궁극적으로 오로지 앨리스는 잃어버리면 자신이 존재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사랑받고 싶었다. 그녀에게서 빼버릴 수 없는 요소 때문에 사랑받고 싶었다. 사랑받는 이유들을 이렇게 초조하게 찾는 것과 진실을 찾으려는 데카르트의 힘겨운 여정을 연결 지어 볼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그의 전설적인 해답은, 몽테뉴와 갈릴레오, 가상디의 철학에 내포된 회의를 넘어서는 도구였다. 데카르트는 회의를 밀어내고 결론을 내렸다. 주변의 많은 것을 의심할 수 있지만, 단 한 가지, 자신이 현재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었다. 데카르트가 『병법서설』에서 표현했듯이 ‘내가 꿈을 꾸고 있고, 내가 보거나 상상하는 것들이 거짓일지라도, 생각이 내 머릿속에 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고급 철학 강좌에 등록하고 치밀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만 자기 존재를 주장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이 의심스러울 때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포착했을 뿐이다. 불확실한 것을 한 겹씩 벗거내다가,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진실만을 남기는 방식이었다. 그 한 가지 전제에서 다른 진실들이 소생할 수도 있었다.

 

사랑의 동기 중 덧없는 요소를 다 뺐을 때, 앨리스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육체와 지성과 가진 것들을 제하니, 어떤 사랑할 이유가 남았을까? 데카르트처럼 별로 남는 게 없었다. 그녀에게는 순수한 의식, 순수한 자신,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남았다. 앨리스가 계속 화장품을 사들인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여행 

외국에 가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① 놀라는 것을 싫어하는 관광객 – 의심나고 불확실한 것, 애매한 것을 싫어하고, 이국적인 요리와 이국적인 감정이 불러오는 불확실성은 소화하지 못한다. 현대문학에서는 프루스트 작품 속의 화자가 가장 유명한 관광객일 것이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베네치아에 가는 일을 꿈꾸는 대목에 여러 쪽을 바쳤다. 여기서 베네치아는 순전히 미술과 문학의 영향을 받아 그의 머릿속에 세워진 도시였다. 그는 이 꿈의 도시에 익숙했기에 꿈과 현실이 다를까봐 두려워서 실제로 그곳에 가는 것을 거듭 미루었다. <포도스>와 <미쉐린>에 나오는 곳만 찾아가는 관광객처럼 ② 여행자 – 미리 예상하지 않고 여행하며, 짐작했던 바와 다른 상황에 부딪혀도 그리 당황하지 않는다. 미지의 것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이것을 사랑에 연결 지어 분석해보면, 앨리스는 사랑의 영역에서 관광객임을 깨달았다. 그녀 역시 울타리 밖으로 나가 애인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탐험하며 꿈을 시험해보는 호기심이 부족했다. 그녀가 믿기에 모든 것을 가진 남자가 의사소통할 수 있는 모뎀 같은 기본 요소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독서의 문제 

① 자신에게서 도피하는 독서 – 에릭은 책을 많이 읽긴 했지만 그 동기가 호기심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세상사를 알고자 함이 아니라 세상사와 부대끼는 것을 피하고자 책을 읽었으니까. 에릭은 겁이 나면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과 관계된 책은 외면하는 식으로 현시로가 맥이 닿는 것을 피했다. 이러한 독자들은 자기반성의 진통 뿐 아니라 그에 따르는 환희도 놓쳐버린다.

 

② 자기를 발견하는 독서 – 독자에게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책에는 그럴듯한 편견이 따른다. 스탕달은 어떤 생각을 소설에 도입하는 것을 음악회장에서 총을 쏘는 것에 비유했다. 앨리스는 사는 데 도움을 주는 책만 가치 있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학식 있는 평론가들이 보기에 책에서 뭔가 얻고 싶어하는 독자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우를 범했다. 결국 독자는 아무것도 원하면 안 된다. 책은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니까.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한 게 아니던가?

 

앨리스는 자기의 물질적, 사회적 환경과 꼭 맞아서 상황과 설명을 그대로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책을 원했다. 그녀는 ‘나를 찾고’ 싶었다. 자기 이야기여야 했고, 복잡하고 설령 문법이 어긋난 문장이라 하더라도 그런 야심이 담겨 있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어떤 것을 느끼는지, 왜 사랑하는지, 왜 미워하는지, 왜 좌절하는지, 왜 행복한지 더 잘 알고 싶었다. 여자란 무엇이며 남자란 무엇인지, 두 사람이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지, 왜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지 알고 싶었다.

 

유쾌증 

역설은 과학기술과 여타 해학과 기지가 없는 영역에서 자만심에 빠질 위험에 맞서는 그녀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앨리스는 성탄 전야에 밥과 에릭, 데이지, 다른 투숙객들이 모닥불 가에서 춤추는 광경을 보면서 자신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단지 해학적인 기지가 모자라기 때문에 웃음을 터뜨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들은 남보다 더 크고 요란하게 웃어댔지만, 그건 진정 풍요로운 해학의 원천에서 벗어난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인하는 웃음에 불과했다. 유감스럽지만 앨리스에게도 기지로 받아넘기지 못하는 게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신에 관련된 역설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다이빙, 루소, 그리고 너무 생각이 많은 것 

햄릿은 문제가 생겼기에 그렇게 생각이 많았는가? 아니면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가 생겼는가? 지성인들은 햄릿의 생각이 문제를 일으킨 게 아니라 문제에서 생각이 비롯되었다고 대답할 터이다. 한편 자연주의자라면 생각은 문제를 해결할 방책인 체하지만 실은 그것이 바로 문제를 일으키는 질병이라고 볼 터이다. 생각은 심리적인 우울증의 한 형태였다. 햄릿은 고통스럽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고통을 느꼈다. 자연주의자라면 그에게 정신 활동을 극소화해야만 이성이 망가뜨린 자연스런 단순함과 편안함을 되찾을 수 있다고 충고할 터였다. 루소는 자연주의적 관점의 선구자이며 가장 존경받는 대변인이다. 그는 사치품, 예술, 과학, 근대적인 정부, 사상 같은 문명의 산물을 공격했다. 그는 책이란 인간이 미처 알지 못했던 고통을 가져다준다고 보았다. 사회생활과 지성이 우리에게서 타고난 미덕을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정직한 사람은 벌거벗고 레슬링을 즐기는 운동선수와 같다.’라고 루소는 주장했다.

 

사춘기 

사춘기 탓으로 돌려버리면 어떤 이득이 있는지 몰라도, 인간의 복잡한 고뇌가 다 단순해져버렸다. 햄릿, 라스콜리니코프, 베르테르를 몰아붙인 것은 무엇이었나? 당연히 사춘기적 분노였다. 그럼 돈키호테나 험버트는? 중년의 위기. 그럼 나이 든 안나 카레니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해 갱년기 장애와 호르몬 이상.

 

여성 혐오 

앨리스는 두 가지 방식으로 강인할 수 있다. 먼저 자율적인 강함이라 할 수 있는 게 있었다. 앨리스가 기분이 좋고 삶을 주도적으로 영위할 때 보이는, 자신감과 이해심 넘치는 태도. 다른 하나는 올랭피아의 강함이라 할 수 있는 형태가 있었다. 1865년 파리의 살롱에서 에두아르 마네의 전설적인 초상화가 처음 전시된 뒤로 생겨난 이름이다. 처음 전시되었을 때 <올랭피아>는 미술계에서 선풍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곧 외설적이고 비윤리적인 작품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전까지 여성 누드를 그린 남성 미술사 속의 모델들은 거의 언제나 유혹적이면서 온순한 자세를 취했다. 안방이나 고전적인 정원에서 여성은 나신인 채, 남자가 먼저 섹스를 시작하기를 기다리며, 요구하지는 않지만 유혹적이면서 수줍은 열다섯 소녀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올랭피아는 전혀 달랐다. 수줍어 움츠린 기색 없이, 자신 있고 스스로의 욕망을 잘 아는 여성이었다. 앨리스는 유혹을 마음대로 통제하는 데 익숙한 남자 관객에게 먼저 섹스를 걸어 오는 올랭피아 같았다.

 

남자에게는 애인 이전에 어머니가 있다. 그런 면에서 모든 남자는 동등한 관계 이전에 전능한 어머니에 맞서 무력한 아이 노릇을 경험한다. 에릭이 지닌 여성 혐오의 밑바닥에는 보살펴주는 이에 대한 두려움, 권능 있는 어머니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영상에서 풀어주기라도 하듯, 다른 영상도 있었다. 어머니에게 소리쳐서 복종하게 만드는 아버지. 에릭은 독립적이고 강한 여자들이 이렇게 움츠러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휴가 

몽테뉴는 수상록의 ‘고독에 관해’란 부분에서 이렇게 썼다. “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하고도 전혀 성숙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발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데려갔거든요.”

 

그리스어로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뜻이다. “유일하게 가능한 낙원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다.”하고 향수에 젖어 프루스트는 말했다. 낙원은 실제로 가서 더럽히지 않고 오직 상상만으로 그릴 수 있는 시나리오라는 점이었다.

 

지역성 

누구와 사귈 때 사람만 달랑 올 수가 없다.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문화가 따라오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 관습이 따라온다. 특정한 지역성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함께 온다. 이러한 성향은 민족성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계층과 지역과 집안의 특성이 뒤섞여 구성된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게 하나? 

앨리스는 자신이 단일한 사람이 아님을 상기했다. 옆에 있는 사람에 따라서 그녀가 다른 사람이 된다는 뜻이었다. 더욱이 그중 어떤 모습은 다른 경우보다 더 낫고 더 그녀답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렇게 주장했다.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면 우리는 재미난 사람이 되고, 그들의 지성에 의해 우리는 지성 있는 사람이 된다. 그들의 너그러움이 우리를 너그럽게 하고, 그들의 모순이 우리를 모순되게 한다. 개성이란 읽는 이와 쓰는 이 양쪽이 다 필요한 언어와 같다.” 마찬가지로 앨리스의 가능성도 애인이 공감해주는 한도에서만 뻗어갈 수 있다. 관계의 기반은 상대방의 특성이 아니라, 그런 특성이 우리의 자아상에 미치는 영향에 있다.

 

영혼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라메트리가 1748년 저서 『인간기계론』을 출판하자 교육받은 대중은 분노했다. ‘인간은 기계이며, 전 우주는 다양하게 변형되는 단 한 가지 재료로 되어 있다.’라고 라메트리는 주장했다. 물론 이 재료는 초라한 물질이다. 인간은 물체와 영혼으로 구성된다는 이원론은 플라톤 이후 별다른 이견 없이 군림해왔다. 인간에게 생명과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은 영혼이었다. 플라톤은 이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여 철학의 새 장을 열고, 영혼을 이성적인 우주선으로 보는 선례를 남겼다. 과학자들과 라메트리처럼 콧대 높은 철학자들은 유물론자로서 충성심을 발휘해 영혼에 대한 논의를 격하하기로 불퉁스럽게 합의했다.

 

신비주의 사상가들과 순진한 시인들은 영혼-우주선에 감정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메를린 먼로는 영화 산업의 도덕적 붕괴를 보여주고자, 영혼에 대한 계몽주의 이후의 견해를 천명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할리우드는 ‘당신의 키스에 천 달러를 내고, 당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50센트를 내는 곳입니다. 낭만주의 시대에 영혼의 개념이 감정과 연결되었다면, 감정은 곧 쾌감보다는 아픈 감정으로 통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영혼을 가진다는 것은 곧 고통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예술가들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이를 이겨내고 창작하는 게 아니라, 바로 고통을 겪기 때문에 창작한다는 가설이었다. 그러니 필립이 영혼을 사랑하는 데는 슬픔에 대한 사랑이 감추어져 있는 게 아닐까? 슬픔이야말로 가장 고전적이고 서정적인 마약이 아닌가.

 

진실의 층위 

프로이트 식으로 이해하자면, 스스로도 모르는 자아의 영역, 해결 안 된 갈등의 영역이 광활하긴 해도, 스스로를 알고 갈등의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어떤 동력이 존재한다. 이러한 틀에서 꿈과 말실수는 표현법을 모색하는, 혼란스럽지만 대단히 논리적인 시도다.

 

의문 

앨리스는 왜 그와는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을까? 왜 필립이 직접적으로 공격을 할 때에만 둘의 관계를 옹호할까? 왜 상처를 줄줄이 말해놓고 불쑥 사랑을 주장할까? 이런 의문에는 적어도 한 가지 두드러진 부작용이 있었다. 필립은 관심을 가지면 일이 복잡해진다는 매우 이성적인 판단으로 앨리스에게 끌리는 마음을 밀어내려 했지만, 우유부단함과 금기가 충만한 상황은 부지불식간에 높이 부풀어만 갔다.

 

책임 떠넘기기 

서로 키스했던 두 사람은 이런 말을 주고받은 후 차갑게 헤어졌다. 앨리스는, 어느 한쪽이 호감과 연애 감정을 근시안적으로 혼동해 우정을 망쳤다는 흔한 이야기 밑으로 자신의 양면성을 묻어버렸다.

 

혼자만의 언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란 공유된 의사소통 체계라고 정의되므로 사회를 벗어난 곳에서는 상상할 수 없다며 혼자만의 언어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불평을 표현하는 행동 뒤에는 상대방이 잘못을 빌 거라는 낙관적인 믿음이 깔려 있을 것이다. 불평의 기술에 대한 앨리스의 믿음은 구세주적인 면과 자폐적인 면 사이에서 비틀거렸다.

 

① 구세주적인 면 – 갈등이 아무리 무거워도 대화를 통해 반드시 해결에 도달하게 되리라도 믿었다.

 

② 자폐적인 면 – 앨리스가 자폐적인 기분으로 추락하는 것은 이런 경험을 할 때였다. 아무리 말을 잘 해도, 어떤 근거를 들이대며 간청하고 설득해도, 사람들은 결코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확신이 들 때.

 

오독 

조지 버나드 쇼는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점을 과장하는 흥미로운 과정’이라고 말했다.

 

누가 노력하는가? 

관계란 스스로 균형을 잡고자 하는 원초적이고 잔혹한 욕망이다. 잔인한 점은 관계의 총량을 양쪽이 똑같이 지불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양쪽이 똑같이 노력을 내놓는 결과가 가장 합리적이겠지만 원래 한쪽이 상대방보다 더 많이 노력하게 마련이다.

 

연애의 조각 맞추기 

자기존중심이 어느 수준까지 커지자, 앨리스는 종교적인 사랑의 속성인 굴욕감을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선언 

감정을 먼저 이끌어낸 사람이 그 감정에 걸맞게 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이상했다. 이 상황은 착시 현상과 비슷했다. 관계없는 물체에 의해서 모양이 결정되는 신기루와 같다. 에릭은 그를 둘러싼 희망 사항들이 투사하는 신기루였다.

 

초대 

며칠 후 뜻밖에도 필립에게 엽서가 왔다. 엽서의 한 면에는 멜론 그림이 있었고 뒤쪽에는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의 초대가 이렇게 기쁘고 동시에 겁날 줄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순교

 

 

11. 너를 사랑한다는 건(Kiss & Tell)

 

서장 

앤디 워홀이 예언했던 신화적인 시대, 모든 사람이 15분 동안 유명해지는 시대 즉 전기의 주인공이 되는 시대의 도래를 알린다. 철학자 시오랑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워홀과 비슷한 이야기를 그와는 다르게 음울한 어졸 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는 시간은 15분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조차 말년에 인터뷰 자리에서 자신은 아무 불평할 것이 없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70년을 넘게 살았다. 먹을 것은 충분했다. 많은 것을 누렸다. 한두 번은 나를 거의 이해하는 인간을 만나기도 했다.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평생에 한두 명. 뇌리를 떠나지 않을 것 같은 빈약한 수이지만, 이 쓸쓸하기 짝이 없는 결산은 우리가 심정적으로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깊이를 의심해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전기작가들은 당신이나 나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느라 열심이었다. 실제로 전기를 읽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더 단단한 재료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인간에게서 살과 피를 느끼는 것이다.

 

어린 시절 

모든 전기 작가는 어린 시절에서 시작하여, 그 이야기를 전기 속 인물이 나중에 쓴 시나 산문에서 발췌한 일화로 장식한다. 인생은 절대 그렇게 문법적인 속박을 받는 방식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오히려 절차에 자신이 없어 혼란에 빠진 아이의 시도와 비슷하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현미경으로 어떤 원자들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들이 자의식을 느껴 혼자 있을 때는 하지 않던 일을 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전기는 대체로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의 함의를 모르는 것 같다. 전기는 ‘결정적인’ 삶을 제시하려 한다.

 

초기의 데이트 

“무슨 일 하세요?”

“난 그런 질문 싫어해요.”

“왜요?”

“사람을 그냥 그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가정해버리니까요.”

 

“만사가 아무 의미 없다고 이야기해놓고 자기들은 내가 보기에는 정말 의미가 없는 운동 경기를 아주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게 웃기지 않느냐는 거예요. 어쩌면 인생이 의미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운동이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는 건지도 모르죠.”

 

가계도 

전기 작가들이 여러 가족과 잇따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를 공적 기록이나 출생증명서로 확인해본 뒤에야 가계도를 그리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제임스 조이스의 가족사를 연구한 리처드 엘먼 같은 전기 작가의 철저한 방식을 존경하게 된다. 조이스의 아버지의 학교생활까지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정확하게 추적하여, 그가 1859년 3월 17일 세인트 콜먼즈 칼리지에 입학했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1860년 2월 19일에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아가 학비 7파운드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잊지 않고 말해주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연극이 끝났을 때 이사벨과 나는 주차장의 혼잡을 피하려고 마지막 커튼콜이 시작되기 전에 빠져나왔다.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배우들이 절을 하면서 자신에게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짓는 게 보기 싫어. 연극을 통해 기껏 쌓아 올린 환상들을 스스로 다 부수어버리거든.”

 

내가 내 자식들에게는 절대로 안 할 일들 

① “내 자식들한테는 절대 푹 삶은 브로콜리를 억지로 먹이지 않겠어”

② 세계 경제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키워주겠어

③ “나는 또 섹스에 관해 그렇게 자유주의적이지 않을 거야”

④ “나는 가족 가운데 누구를 편애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 같아”

⑤ “나는 죄책감을 무기로 내 자식들에게서 뭘 끄집어내지 않을 거야”

⑥ “나는 나와 내 아이들 사이의 경계를 더 존중하려고 노력할 거야”

 

부엌 전기

성격을 드러내는 것과는 관계없는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었던 식욕도 성격의 비밀로 들어가는 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존슨 박사도 그 유명한 고기 파이를 먹은 뒤 보즈웰에게 지혜롭게 설명해주지 않았던가.

 

“함께 먹고 마셔보지 않고는 어떤 사람의 삶에 관해 쓸 수 없다.”

 

기억

과거를 익숙한 연대기에 따라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프루스트적인 순간을 이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여, 삶의 장면들이 결정하는 계기를 이루는 냄새, 촉감, 소리, 사물을 따라가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연대기에 따른 이런 사건 배치는 어떤 수준에서는 시간과 선형적인 관계라는 개념, 어떤 기억이 다른 기억보다 시간상 뒤에 있다는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프루스트적인 순간은 주관적으로 볼 때 우리를 어떤 사건과 나누는 거리가 실제 거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드러냈다. 

 

기억이 현실만큼 강할 때는 삶을 순차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살게 된다. 시간의 두 구역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사적인 것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어린 시절 비눗방울을 불었다거나, 처칠이 얄타에서 스탈린과 시가를 나누어 피웠다거나, 버트런트 러셀이 트리니티에 다닐 때 스틸턴 치즈에 특별한 감정이 있었다거나 하는 사실을 알고 잠시 즐거워한다. 그러나 전기는 그 이상을 우리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섹스가 친밀성의 상징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두 사람이 친밀해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상징은 오히려 자신이 상징하는 상태의 실현을 방해할 수도 있었다. 서로 알아가는 더 힘든 과정을 피하는 방법으로 상대와 잘 수도 있으니까. 마치 책을 읽는 일을 면하기 위해 책을 사는 것처럼. 

 

사생활은 친절한 마음 또는 동정심을 갖고 보아야 하는 면이 담겨 있다. 사생활은 우리의 노출된 순간의 기록이다.

 

친밀해지는 과정에는 유혹과 대립되는 면이 있다. 유혹이 가장 훌륭한 자질과 야회복의 과시에 기초를 둔 것이라면, 친밀성은 상처받기 쉬운 면과 발톱을 모두 드러내는 간단치 않은 과정을 수반한다. 

 

어떤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사람에 관하여 뭘 알기를 바라는가? 왜 이 문제가 우리가 사적이라고 여기는, 삶의 신비한 부분을 이해하는 데 중심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가? 마지막으로, 우리가 선택한 연인은 우리 자신의 무엇을 드러내는가?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결함이 많은 인물이 관대하게 우리에게 베풀어준 것 덕분에 안정된 상태에 이르지만, 바로 그 뒤부터 그 사람의 결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심리학을 동원하여 설명하곤 하는 두 사람의 화합 가능성은 결국 환경을 끌어들일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시에서는 아주 친하여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서 저녁을 먹던 두 친구가 휴가 때 캠핑을 갔다가 전에는 본 적이 없는 불쾌한 면들을 잔뜩 보게 되어, 결국 다시 만나 저녁을 먹는 것도 불가능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서로 날 때부터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이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런 느낌은 특정한 환경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본 세상

피카소 회고전을 본 기억이 났다. 이 전시회는 피카소의 한평생에 걸친 숨 막힐 듯한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이 경우에는 수척한 인물들을 파랗게 그리던 재능 있는 젊은이로부터 한결 부드러워진 분홍색 장면들을 그리는 사람에게로 배턴이 넘어가며, 그 사람은 배턴을 들고 조금 달려가다 원근법을 없앤 다음 그것을 큐비즘이라고 부르는 화가에게 넘겨준다. 그렇게 한 구간을 뛴 뒤, 배턴은 ‘게르니카’를 그리는 사람에게로 넘어가며, 그 과정이 계속 승승장구로 이어진다. 아니, 그렇다고 들었다. 그때 나는 이미 카페테리아로 빠져나온 뒤였기 때문이다. 

 

머리만 하더라도 피카소는 1881년에서 1973년까지 급진적인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우선 머리를 짧게 깎은 열다섯 살의 피카소를 보여주는 그림들이 있다. 그러나 열여덟 살의 자화상에서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정 가운데에 가르마를 탔으며 콧수염까지 기르고 있다. 스무 살에는 긴 턱수염을 자랑하며, 중년에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오른쪽에서 가르마를 타 머리카락 몇 올이 왼쪽 눈으로 떨어지곤 한다. 1944년 파리 해방 때 그의 머리는 숱이 준데다가 상당히 세기까지 했으며, 1949년 평화 대회 때는 대머리가 되었다. 옷도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초기에는 재킷, 중년에는 양복, 끝으로 가면서 흰 바탕에 파란 줄무늬 티셔츠가 된다. 

 

남자와 여자

전기는 전통적으로 나이, 계급, 직업, 성의 경계선을 망설임 없이 가로지른다. 도시의 귀족이 시골 빈민의 삶을 포착하기도 하고, 쉰 살 먹은 사람이 젊은 랭보의 경험을 따라가기도 하고, 소심한 학자가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제휴하기도 한다. 이런 기획 뒤에는 부러운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은 표면적인 차이라는 잔물결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존슨 박사도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모두 똑같은 동기에 자극을 받고, 똑같은 오류에 속고, 희망에 힘을 얻고, 위험에 막히고, 욕망에 휩쓸리고, 쾌락의 유혹을 받는다.”

 

존슨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똑같은 단일한 가족에 속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 공동체로 가는 여권을 기초로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자기도 모르는 새에 이런 고민을 표현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직접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비슷한 상황에서 느낄 만한 것을 생각하여 그들이 영향을 받는 방식을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 형제가 고문을 받고 있다 해도, 우리 자신이 편안하다면 우리는 그가 겪는 고통을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오직 상상에 의해서만 그가 느끼는 고통에 대한 개념을 형상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상상에 의해 우리 자신을 그의 상황에 집어넣고 우리 자신이 똑같은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상상으로 남들과 함께 고통을 겪는 것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베개 이론의 우울한 전제는 남들의 경험을 진정으로 상상하려면 충분한 경험이 축적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심리

마르셀 프루스트 설문지

 

나의 중요한 성격적 특징: 사랑받고 싶은 욕구.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존경받고 싶은 욕구보다는 귀여움을 받고 응석을 부리고 싶은 욕구.

 

남자에게서 보고자 하는 특징: 여성적인 매력.

 

여자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특징: 남자의 미덕들 그리고 우정에 대한 개방성.

 

내 친구들에게 가장 감사하는 것: 나를 향한 애정 어린 감정들. 그들이 그런 감정을 높이 평가할 만큼 아름다운 사람들일 경우에.

 

나의 가장 큰 결함은: 알지 못하면 원할 수 없다는 것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사랑하기

 

나의 행복의 꿈은: 고상하지 못하다고 할까봐 두렵다. 감히 표현할 수가 없다. 표현하면 부서질까 두렵다.

 

나의 가장 큰 불행이 되었을 만한 일은: 어머니나 할머니를 몰랐다면.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나 자신,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내 모습.

 

내가 살고 싶은 나라는: 내가 원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애정 어린 감정이 늘 공유되는 곳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아름다움은 색깔이 아니라 색깔들의 조화에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자아의 꽃-그것 말고도 모든 꽃.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새는: 제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신문작가는: 오늘은 아나톨 프랑스와 피에르 로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보들레르와 알프레드 드 비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속 주인공은: 햄릿.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속 여주인공은: 베레니스(페드르는 썼다가 지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름은: 한 번에 하나밖에 없다.

 

어떻게 죽고 싶은가: 지금보다 나은 상태로-또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현재 내 마음의 상태는: 이 모든 질문에 답을 하려고 나 자신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지겹다.

 

존슨 박사는 캐텔 박사보다 한참 전에 이 항목의 가치를 깨달아, “혈통에서 시작하여 장례식에서 끝나는 공식적인 이야기보다 그의 하인 한 사람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에서 어떤 사람의 진정한 성격에 관한 지식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 뒤에 전기 작가들도 이 점에 주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리처드 앨먼이 “트리에스테에서 조이스의 하녀로 일했던 마리아 에켈 부인과 인터뷰를 해준 토머스 스테일리 교수”에게 감사한다는 표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결말을 찾아서

보즈웰을 옹호하자면, 그는 왜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세세하고 특수한 것들이 저명한 남자와 관련이 될 때는 종종 그 사람의 특성을 드러내기도 하고 또 늘 재미있다는 나의 의견은 여전히 확고하며 이 점에서 나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다.”

 

그런 사소한 것들을 위한 공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암묵적으로 루소의 전기 서술 방식을 따른다는 뜻이다. 그의 <고백록>은 유명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나는 세상의 다른 누구와도 다르다. 더 낫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다르다.”

 

‘적어도 나는 다르다’의 자리에 “적어도 나는 그림을 다르게 본다”를 넣으면, 새로운 전기의 선언에 근접하는 뭔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후기

이사벨은 나에게 산책을 하고 싶은지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자고 요청한 것이었다. 어떻게 “산책하러 가고 싶어?” 같은 간결한 문장 속에 그런 뜻이 들어갈 수 있었을까? 상대의 의도에 대한 질문으로 그녀 자신의 요구를 위장하는 작전을 통해서.

 

12.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1부 낭만주의

매혹

다른 사람이 영혼의 짝이라는 느낌, 이 확신은 아주 순식간에 찾아올 수 있다.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다. 이름을 알 필요도 없다. 객관적 지식은 끼어들 틈이 없다. 대신에 중요한 건 직관, 즉 이성의 정상적 작용 과정을 건너뛰기에 더더욱 정확하고 존중할 가치가 있는 것만 같은 자발적인 감정이다. 

 

낭만이라고 보았던 것-무언의 직관, 순간적인 갈망, 영혼의 짝에 대한 믿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배워가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에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신성한 시작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러브스토리다. 

 

사랑에 빠지다

파티에 다녀온 뒤에는 반드시 모든 손님의 흉을 본다. 다른 모든 사람에 대한 불신이 커짐에 따라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깊어진다. 그들은 일상생활의 위선들에 반항한다. 타협으로부터 서로를 해방시킨다. 서로 더 이상 비밀이 없다는 느낌이 자릴 잡는다.

섹스와 사랑

성욕은 처음에는 단지 생리적 현상, 호르몬을 깨우고 신경 말단을 자극한 결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실은 감각적이라기보다 관념적이다. 무엇보다 받아들여졌다는 생각, 외로움과 부끄러움이 끝날 거라는 전망과 관련이 있다. 

 

우리를 흥분시키는 구체적 요인들은 기이하고 비논리적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보다 건전하다고들 하는 다른 삶의 영역들에서 우리가 갈망하는 자질, 즉 이해, 공감, 신뢰, 조화, 관대함, 친절함의 메아리가 담겨 있다. 

청혼

역사 기록이 시작된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논리적 이유로 결혼을 했다. 그런 합리적인 결혼에서 외로움, 강간, 간통, 폭력, 가혹함, 육아실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비명이 생겨났다. 합리적 결혼은 어떤 진실한 관점에서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았으며, 자주 편의주의적이고, 편협하고, 속물적이고, 착취적이고, 모욕적이었다. 이를 대체한 것은 감정에 의거한 결혼이다. 본능의 명성은 수 세기에 걸친 비합리적인 ‘합리성’에 반하여 나타난 집단 트라우마 반응의 유산이다. 

 

실용적인 의미에서 결혼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오히려 결혼에 더욱 감정적인 설득력을 부여할 뿐이다. 결혼했다는 것은 조심성, 보수적 경향, 소심함과 연관 지을 수 있지만, 결혼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더 무모하고 그래서 호소력이 더 큰 낭만적 제안이다. 

 

그가 청혼한 것은 그와 커스틴이 서로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을 보존하고 ‘동결’시키길 원해서다. 그는 결혼이라는 행위를 통해 황홀한 기분이 영원해지길 기대한다.

 

우리는 사랑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우리가 추구하는 건 친밀함이다. 우리는 유년기에 아주 익숙했던 감정들 그대로를 성년의 관계 안에서 재현하길 바라고, 그 감정은 다만 애정과 보살핌에 국한되지 않는다. 

2부 그 후로 오래오래

별것 아닌 일들

작은 쟁점들은 사실 단지 필요한 관심을 받지 못한 큰 쟁점들이다. 일상에서의 논쟁은 그들 성격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어져 나온 실밥이다. 

 

이 둘은 두 개의 믿을 만한 치유책 덕에 지속적인 비통함에서 벗어난다. 첫째는 나쁜 기억력이다. 두 번째 치유책은 보다 추상적이다.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를 생각하면 너무 오랫동안 분노를 안고 가기가 어렵다. 

토라짐에 대하여

“내가 약간 제정신이 아니잖아. 미안해.”

 

진짜 메시지는 지극히 퇴행적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아직 젖을 먹는 아기이니, 지금 당장 나의 부모가 되어줘야 해. 당신은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하는지를 정확히 헤아려주어야 해. 내가 아기였을 때, 사랑에 대한 관념들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래주었듯이 말이야.”

 

토라진 연인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는 그들의 불만을 아기의 떼쓰기로 봐주는 것이다. 

섹스와 검열

자유사상가의 견지에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그에게 성적으로 변함없이 충실해야 한다는 것 사이에 본질상으로나 논리상의 어떤 연결도 없다. 우리 시대에 이 철학은 압도적인 차이 아래 소수자의 견해로 남아 있다. 

 

낭만주의는 고정된 파트너가 아닌 누군가와 잠자리를 하고 싶은 욕구가 무엇인지를 강력히 재정의했다. 모든 혼외적 관심을 일종의 위협이자 종종 감정의 파국에 근접하는 어떤 것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감정전이

“난 가끔 제정신이 아냐”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모든 게 네 탓

사랑의 모든 가정들 중 아주 얄팍하리만치 불합리하고 미숙하고 개탄스럽지만 그럼에도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서약한 사람이 우리의 감정적 실존의 중심일 뿐 아니라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다 그에게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 사랑의 기이하고 병적인 특권이 있다. 

가르치기와 배우기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사랑과 가르침의 관계를 바라보는 유용하고도 시류와 다른 관점을 제안한다. 그들이 보기에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타인의 훌륭한 점을 찬탄하는 감정, 고결한 특질과 대면했을 때 느껴지는 흥분이었다. 그 결과 사랑의 깊어짐은 항상 보다 고결해지는 방법-화를 잘 참거나 관대해지는 법, 탐구심을 키우거나 더 용감해지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욕구를 수반하게 했다. 이 고대 그리스의 렌즈를 통해 본다면 연인이 상대방의 성격으로 인해 불행하거나 불편한 점을 지적해도 그가 사랑의 정신을 포기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파트너의 자아를 더 발전시키려는, 사랑의 본질에 아주 충실한 일을 하려 했다고 축하받아야 한다. 

3부 아이들

사랑의 가르침

성숙한 사랑이란 낭만적 사랑이 사랑을 주기보다는 찾기를,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기를 추구하는 데 주로 초점을 맞춘 편협하고 다소 인색한 감정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사랑스러움

유년의 사랑스러움은 선함의 미성숙한 영역에 해당한다. 아이들의 사랑스러움을 대할 때 우리는 성숙함에 도달하는 길에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는지를 떠올린다. 

사랑의 한계

좋은 부모의 역할에는 중요하면서도 무척 까다로운 요건이 딸려 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소식을 끊임없이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는 양치질, 숙제, 방 정돈, 취침 시간, 마음 넓게 쓰기, 컴퓨터 사용 제한에 대해 말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자연의 칙령은 사춘기의 짜증과 분노라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실현된다. 에스터와 윌리엄이 집을 떠날 수 있는 원동력을 키우려면 라비와 커스틴이 우스꽝스럽고 구식이고 따분하다고 느끼기 시작해야만 한다. 

섹스와 양육

우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 끌리는 사람들은 우리가 어렸을 때 가장 사랑한 사람들과 뚜렷한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빨래의 위신

현대사회는 부부가 모든 면에서 평등하기를 기대한다지만, 실제로는 고통의 평등을 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4부 외도

바람피우는 남자

자신만의 매력에 의구심을 품고 타인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인지를 계속 알아내야만 하는 애처롭도록 불안정한 남자들이 어떤 위험한 짓을 벌이는가.

찬성론

낭만주의의 렌즈로 보면 명백히 이보다 더 큰 배신은 있을 수 없다.

반대론

한 번도 배신당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신의를 계속 유지하기에 좋은 전제조건이 못 된다. 보다 진실하고 충실한 사람이 되려면 적절한 예방 접종을 겪어봐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배우자를 배신하지 말라는 명령이 틀에 박힌 말이 아니라 영구히 뚜렷하게 빛을 발하는 도덕적 의무로 변모한다. 

양립할 수 없는 욕망들

우리의 낭만적인 삶은 슬프고 불완전하게 끝날 운명이다. 자유사상가가 모험을 추구하며 사는 동시에 외로움과 혼란을 피할 수 있고, 결혼한 낭만주의자들이 섹스와 애정, 열정과 일상을 통합시킬 수 있다고 순진하게 소망한다. 

 

모험과 안전은 양립할 수 없다는 걸 그는 알았다. 사랑이 넘치는 결혼 생활과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성욕을 죽이고, 외도는 결혼 생활을 죽인다. 두 패러다임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자유사상가인 동시에 결혼한 낭만주의자가 될 순 없다. 

비밀

우리는 정직성에 너무 감명하는 탓에 정중함의 미덕들을 망각한다. 아끼는 사람이 우리의 본성에서 상처를 줄 수 있는 면과 항상 전면적으로 마주치지는 않게 하려는 욕구 말이다. 어느 정도 자제하고 자기 편집에 조금 열성을 보이는 것으로서의 억제는 솔직한 고백 능력 못지않게 당연히 사랑에 포함된다. 눈치채지 못한 척하는 편이 더 친절하고 더 현명하고 사랑의 참된 정신에 더 가까울 수 있다.

 

역사의 거의 전 기간 동안 사람들이 결혼 생활을 유지한 것은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고, 약간의 재산을 지키고, 가문의 통합이 유지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뒤 아주 다른 낭만주의의 규칙이 서서히 세상을 장악했다. 그에 따르면 부부는 둘 사이에 진실한 열정, 욕망, 충족감 같은 몇몇 감정들이 통용되는 한에서만 함께 있어야 했다. 이 새로운 낭만주의의 규칙에서 배우자들은 부부의 일상생활이 둔화되거나, 아이들이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거나, 섹스가 더 이상 마음을 끌지 못하거나, 어느 쪽이든 최근 들어 약간 불행하다고 느껴왔다면 당연히 각자의 길을 갈 수 있었다.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

애착 이론

1950년대에 영국의 존 볼비와 그의 동료들이 전개한 애착 이론은 우리가 맨 처음 경험하는 부모의 보살핌에서부터 고나계의 긴장과 갈등을 추적한다. 위대한 저작인 <분리 불안>(1959)에서 볼비는 최초의 가정환경에서 실망을 겪은 사람은 성인이 되어 관계의 어려움이나 모호함에 직면할 때 두 종류의 반응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볼비가 ‘불안정 애착’이라 명명한, 두려워하고 집착하고 지배하는 행동 양식이고, 둘째는 ‘회피 애착’이라 명명한, 방어 및 후퇴 작전이다. 

 

부부 상담을 구하는 환자의 70퍼센트가 불안정하거나 회피하는 행동을 보인다.  불안정 애착의 징후는 침묵, 지연, 막연함 같은 애매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은 즉시 모욕이나 악의적인 공격과 같이 부정적으로 해석된다. 

 

회피 애착 유형은 정서적 필요가 충족되지 않으면 갈등을 피하고 상대방에게 노출을 줄이려는 강한 욕구를 느낀다는 특징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회피적인 사람은 두려움에 찬 방어적인 행동 양식을 파트너에게 설명하지 못한다. 

성숙함을 향해

자연은 우리에게 성공을 향한 집요한 꿈을 심어놓았다. 부지런함은 우리에게 도시, 도서관, 우주선을 선사했다. 그러나 이 충동 때문에 개인의 평정은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젠 ‘충분히 좋은’ 게 충분히 좋다. 

 

노화는 피곤해 보이는 것과 좀 비슷하지만, 잠을 아무리 자도 회복되지 않는다.  

결혼할 준비가 되다

옛날에는 사람이 재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떤 이정표에 도달하면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런 뒤 낭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올바른 감정들, 그중에서도 특히 영혼의 짝을 만났다는 믿음과 확신이 중요하다고 여겨진 것이다. 

 

결혼은 ‘어지간히 좋은’ 결혼만 있을 수 있다. 정착을 하기 전에 몇 명의 애인을 사귀어보는 것도 이 깨달음을 깊이 새기는 데 도움이 된다. 가까이서 보면 사실은 모든 사람이 조금씩 잘못되었다는 진실을 직접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서 발견할 기회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자신이 미쳤다는 생각은 철저히 직관에 반한다. 우리는 자신이 지극히 정상이고 대체로 선량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성숙은 자신의 광기를 감지하고, 적절한 때에 변명하지 않고 인정하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만일 수시로 자신이란 사람에 대해 당황스러워지지 않는다면 자기 이해를 향한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은 것이다.

 

중요한 여러 분야에서 파트너가 우리보다 더 현명하고 합리적이고 성숙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미래

완벽한 행복은 아마 한 번에 5분이 채 넘지 않을, 작고 점진적인 단위들로만 찾아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이 순간은 두 손으로 붙잡아 소중히 간직해야 할 행복이다. 

 

13. 철학의 위안

인기 없는 존재들을 위하여(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자크-루이 다비드가 서른여덟 살 때인 1789년 여름 파리에서 그린 그림이었다. 조슈아 레이널즈 경은 “그 그림은 바티칸 궁전의 시스티나 성당과 라파엘로의 방 이후에 나타난 회화 중에서 가장 경탄할 만하고 정교하다. 그 그림은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 시민들의 영예를 되살려주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의 침대 발치에는 플라톤이 펜과 두루마리를 옆에 놓고 국가가 저지르는 불법 행위를 지켜보는 증인으로 말없이 앉아 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할 당시 플라톤의 나이는 겨우 스물아홉이었는데도, 다비드는 그를 희끗희끗한 머리에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으로 바꿔놓았다. 감방 쪽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가 간수들의 부축을 받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 일곱 명은 저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비탄에 빠져 있다.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크리톤은 소크라테스 옆에 앉아 깊은 애정과 근심 어린 눈빛으로 거장을 응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운동선수에게나 기대할 법한 몸통과 이두근의 스크라테스는 꼿꼿한 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은 채 불안해하거나 후회하는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수많은 아테네 시민들이 그를 어리석은 존재로 매도했다는 사실조차 자신의 철학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놓지는 못했다.

 

당초 다비드는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들이키는 장면을 그릴 작정이었으나, 시인 앙드레 셰니에가 극적 긴장감을 극도로 높일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놓자 선뜻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소크라테스가 이제 곧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독배를 잡으려고 침착하게 손을 내밀면서 자신의 철학적 논지를 끝내는 모습이라면, 아테네 국법에 대한 복종과 자신의 소명에 대한 헌신을 동시에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에 훨씬 더 극적인 그림이 되리라는 것이 셰니에의 제안이었다. 지금 우리는 비범한 한 존재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교훈적인 순간을 목격하고 있다. 

 

다비드의 그림엽서가 나에게 그처럼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은 아마 그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행위가 나 자신의 행위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과 대화할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국가의 유죄판결 앞에서도 조금도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끝까지 이성적으로 남을 수 있는 신념을, 즉 비난에 직면할 때면 흔히 보이기 쉬운 병적인 흥분이 아닌 확신을 부여했다. 소크라테스의 임무는 바로 철학을 통해서 현명해지자는 것이다. 

 

라케스의 동료인 니키아스는 용기에는 지식, 즉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고, 또 용기를 전쟁에 국한시켜서는 곤란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소크라테스는 짧은 시간에 돈과 영향력은 그 자체로는 미덕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메논에게 논증했다. 부유한 사람은 존경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 존경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부를 축적한 방식에 달려 있다. 빈곤이 그 자체로 한 개인의 도덕적 가치의 한 자락을 들추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틀릴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신념을 논리적으로 검증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한 진술이란 이성적으로 결코 모순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진술은 오류가 증명될 수 없어야 진리가 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엘리트주의에는 속물근성이나 편견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접근 가능한 정신의 기능인 이성에 바탕을 두었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어떤 형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수렴되는 법정의 판단을 존중했다. 우리는 지역 배심원들이 적시에 우리를 돕도록 설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후대의 심판이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하나의 관념이나 행동이 유효하느냐 않느냐는 논리의 법칙을 지키느냐의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다. 

가난한 존재들을 위하여(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단번에 두드러지게 되었던 것은 감각적 쾌락을 강조한 점 때문이었다. 에피쿠로스는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생각해왔으면서도 정작 철학으로 좀처럼 수용하지 않았던 것을 받아들여서 “쾌락은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목표이다”라고 단언했다. 에피쿠로스는 훌륭한 음식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다. “모든 행복의 시작과 뿌리는 위의 쾌락이다. 심지어 지혜와 문화까지도 여기에 귀착된다.”

 

쾌락의 기본적인 요소들은 비록 손에 넣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비싸지만은 않은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행복, 에피쿠로스의 구매 리스트 

 

1. 우정: 진정한 친구들은 절대로 우리를 세속적인 잣대로 평가하지 않으며,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내면적인 자아이다. 이상적인 부모처럼, 우리를 향한 친구들의 사랑은 우리의 외모나 사회적인 지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2. 자유: 에피쿠로스와 그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좋아하지 않는 자들을 위한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들에게 치욕을 안겨줄지도 모르는 변덕스러운 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기 위해서 아테네 상업 세계의 고용관계에서 자신들을 제외시키고(“우리는 일상과 정치라는 감옥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한다”), 독립을 누리는 대가로 보다 검소한 생활방식을 택하면서 일종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은 집 근처의 옛 디필론 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정원을 사서 찬거리로 약간의 채소들을 가꾸었다. 에피쿠로스가 친구 메노이케우스에게 설명했듯이, “(현명한 사람은) 가장 많은 양의 음식이 아니라 가장 맛있는 음식을 선택한다. 

 

그러나 소박함은 친구들의 위신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아테네가 중히 여기는 가치들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그들은 더 이상 물질적인 기준으로 자신들을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사색: 불안을 다스리는 데는 사색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 문제를 글로 적거나 대화 속에 늘어놓으면서 우리는 그 문제가 지닌 근본적인 양상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비록 문제 그 자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것들, 말하자면 혼란, 배제, 마음의 고통 등을 예방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은 물론이고 친구들이 돈, 질병, 죽음, 그리고 초자연에 대한 두려움들을 분석하는 데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누구도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죽음 뒤에는 망각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실제로 일어날 시점에 아무 문제도 야기하지 않을 어떤 일(죽음)을 두고 미리 걱정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에피쿠로스는 주장했다.

 

에피쿠로스가 펼쳤던 주장은, 만약 우리에게 돈은 있는데 친구와 자유, 사색하는 삶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을 것이고, 비록 부는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친구와 자유, 사색을 누린다면 우리는 결코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세 가지 분류는 행복이란 몇몇 복합적인 심리적 재산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지, 물질적인 결과물과는 상대적으로 관계가 적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에피쿠로스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는 실제로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행복하다. 가장 기본이 되는 비물질적인 요소들을 갖추지 못하는 한, 행복 그래프의 선은 줄곧 낮은 곳에 머물 것이다. 

 

값비싼 물건들이 크나큰 기쁨을 안겨주지 못하는데도, 우리가 그런 것들에 그렇게 강하게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하자면 값비싼 물건들이,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따로 있는데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에 그럴듯한 해결책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건들은 우리가 심리적 차원에서 필요로 하는 어떤 것들을 마치 물질적 차원에서 확보하는 듯한 환상을 준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에피쿠로스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쓸데없는 의견들”로 인해서 더욱 악화된다. 그런 의견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의 우선순위를 반영하지 못하고 호화스러움과 부만을 내세울 뿐, 우정이나 자유, 사색은 좀처럼 강조하지 않는다.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들이 우리를 유혹하는 방식을 보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하지만,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그 어떤 것과 잉여 생산품을 교활하게 연결시키는 전략을 활용한다. 우리가 결국 구입하는 것은 지프일 것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우리가 추구해왔던 자유이다. 우리가 구입하는 것은 아페리티프일 것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우리가 찾고 있었던 우정이다. 우리가 구입하는 것은 멋진 목욕탕과 목욕 도구일 것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우리에게 평온을 가져다주는 사색이다.

 

“사치스러운 음식과 음식들은 절대로 해악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육신에 건강을 가져다 주지 못하리라”

 

루크레티우스는 “우리 자신의 분명한 분별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풍문에 의해서” 필요한 물건을 결정하는 방식을 개탄했다.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는 사치스러운 생산품과 비용이 많이 드는 생활환경을 선택하도록 유혹하는 이미지가 흘러넘치는 반면에, 검소한 분위기나 검약을 실천하는 개인들은 매우 부족하다.

 

성숙한 자기인식과 소박함에 대한 존중이 확산될 경우 소비 수준은 결국 크게 위축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삶의 본연의 목적이라는 잣대로 측정하면, 빈곤은 거대한 부이고 무한한 부는 거대한 빈곤이다.” - <바티칸 어록>

 

루크레티우스는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에서 “인류는 영원히 무의미하고 무익한 고통의 희생자가 된다. 물건의 구입이나 순수한 쾌락의 증대에 어떤 제한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탓에, 쓸데없는 불안으로 안달복달한다.”

좌절한 존재들을 위하여(세네카)

다비드가 스물다섯 살이 되던 1773년에 그린 <세네카의 죽음>은 65년 4월 로마 외곽의 별장에서 일어난 한 스토아 철학자의 마지막 순간들을 묘사했다. 몇 시간 전에 “세네카는 즉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는 황제의 명령서를 가지고 백부장이 그의 집에 도착한 터였다. 세네카의 자살도 순조롭지 않았다. 나이가 든지라 발목과 무릎 뒤쪽의 정맥을 끊었으나, 피가 빨리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세네카는 464년 전 아테네에서 있었던 한 죽음을 떠올리면서 의사에게 독약을 달라고 부탁했다. 철학으로 외부환경을 극복해야 할 상황이 벌어질 경우, 소크라테스의 모범을 따르리라던 생각을 그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터였다. 그러나 아테네 철학자의 예를 따르려던 세네카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독약까지 마셨건만, 아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두 번의 헛된 시도 끝에 마침내 그는 자신을 증기탕 안에 넣어달라고 요구했고, 거기서 그는 고통스럽지만 평정을 잃지 않은 채 운명의 여신의 훼방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서서히 질식해 죽어갔다.

 

그 장면을 다비드가 로코코식으로 해석한 것은 처음도 아니었고, 또 그의 해석이 가장 훌륭한 것도 아니었다. 다비드의 그림에 나타난 세네카는 죽어가는 철학자라기보다는 드러누우려는 군사령관의 모습에 더 가깝다. 드러난 오른쪽 젖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그의 아내 파울리나의 옷차림은 제정 로마 시대보다는 19세기에 그랜드 오페라를 관람하러 나선 옷차림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어색하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에 대한 다비드의 표현은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이 세네카의 비통한 죽음을 견뎌낸 방식에 대한 기나긴 찬양의 역사와 잘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세네카의 저작 전편을 살펴보면 한 가지 관념이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우리 인간은 평소에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또 납득할 수 있는 좌절에 봉착할 경우에는 잘 참아넘기는 반면, 예상하지 못한 좌절을 겪으면 엄청난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다.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세계의 진정한 모습과 조화를 이루게 하고, 좌절 그 자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런 좌절에 수반되는 유해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어야 한다. 

 

1. 분노: 세네카는 그런 분노를 일종의 광기로 보았다. 우리는 인간 존재의 피할 수 없는 불완정성과 화해해야만 한다.

 

2. 충격: 우리 인간은 스스로가 예상치 못했던 것에 가장 큰 상처를 받기 때문에, 또 따라서 모든 것을 예상해야 하기 때문에(“운명의 여신이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은 없으므로”), 우리는 늘 마음속에 재앙을 당할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고 세네카는 제안했다. 우리 인간은 악들이 실제로 자신에게 닿기 전에는 절대로 악을 예상하지 않는다. 

 

3. 불공평: 메틸리우스가 죽은 것은 그의 어머니가 사악해서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선한데 아들이 죽었다고 해서 이 세상이 불공평한 것도 아니다. 그의 죽음은, 세네카의 이미지로는, 운명의 여신의 장난이었고, 또 그 여신은 절대로 도덕적인 재판관이 아니었다. 그 여신은 <신명기>의 신처럼 자신의 희생자들을 평가하지도 않았고 그들을 공적에 따라서 보상하지도 않았다. 운명의 여신은 허리케인처럼 도덕과 상관없이 피해를 준다. 

 

4. 근심: 전통적인 위안의 형태는 당사자를 안심시키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풀려나갈 것이라고 설명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현명하게도 세네카는 우리에게 나쁜 일들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도록 요구하면서, 하지만 그런 결과도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을 수 있다고 덧붙인다. 

 

세네카는 <행복한 삶에 관하여>에서 “철학자들은 돈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 누구도 지혜로운 자에게 가난의 운명을 지우지 않았다.”고 했다. 스토아 철학은 빈곤을 찬양하지 않았다. 단지 가난은 두려워할 것도 아니고 경멸할 것도 아니라고 했을 뿐이다. 스토아 철학은 부를, 엄밀히 말하면, 선호할 만한 것으로, 이를테면 필수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죄도 아닌 것으로 여긴다. 

 

현명한 사람은 운명의 여신이 내린 모든 선물을 버리고 조용히 걸어나갈 수 있다는 관념은 스토아 철학의 주장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이고, 특이한 것이다. 세네카가 “자족한다”라는 표현으로 무엇을 의미하려고 했는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세네카의 말은 모순으로 들릴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한쪽 눈을 잃은 것에 대해서 행복을 느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한쪽 눈을 잃는다고 해도 삶은 가능할 것이다. 눈이나 손의 정상적인 숫자는 단지 만들어진 관념일 뿐이다. 그런 입장을 말해주는 두 가지 예를 살펴보자.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난쟁이이더라도 자신을 경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가 더 크기를 원한다.” -<행복한 삶에 관하여>

 

“현명한 사람은 친구 없이 살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친구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자족적이다.” -<도덕에 관한 서한>

 

5. 조롱당한다는 느낌: “정신의 나약함”.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일을 자유롭게 만들어갈 수 있는 상황과, 변화 불가능한 현실을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상황을 올바르게 구분하는 것이 바로 지혜라고 세네카가 말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는 인간의 조건을 늘 외적환경에 굴복해야 하는 것으로 환기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향할지 예측 불가능한 짐마차에 묶에 있는 개와 비슷하다. 우리를 묶은 사슬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 움직일 여유를 줄 만큼 길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넉넉하지는 않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저항하느라고 자신의 힘을 소진하느니보다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순응하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이다.

 

“삶의 단편들을 놓고 흐느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온 삶이 눈물을 요구하는 것을”

  • <마리크아에게 보내는 위로문>



부적절한 존재들을 위하여(몽테뉴)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에서 동쪽으로 30마일 떨어진 곳에 자리한, 숲이 울창한 언덕 꼭대기에는 검붉은 지붕에 짙은 적색 돌로 지은 멋있는 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성은 중년의 한 귀족과 그의 아내 프랑수아, 딸 레오노르, 그리고 그들의 하인과 가축들(닭, 염소, 개, 말)의 보금자리였다. 미셸 드 몽테뉴의 할아버지는 소금에 절인 대구를 팔아 번 돈으로 이 성을 1477년에 구입했고, 몽테뉴의 아버지는 거기에 건물을 몇 채 더 짓고 경작지를 넓혔다. 몽테뉴는 비록 가사에는 관심이 없고 농사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서른 다섯 살 이후로 이 성을 지켜오고 있었다. 성의 한켠에는 탑이 솟아 있었는데, 그 탑의 3층에 있는 자신의 원형 서재에서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내 인생의 대부분의 날들을, 그리고 하루의 대부분을 나는 그곳에서 지낸다.”

 

그 서재에는 창(몽테뉴는 그 창을 통해서 “탁 트인 눈부신 경치”를 볼 수 있노라고 묘사했다)이 세 개 있었고, 책상과 의자가 각각 한 개씩 놓여 있었다. 반원형의 5단짜리 책장에는 철학과 역사, 시, 종교서 1쳔여 권이 정돈되어 있었다.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번역한 라틴어판 <소크라테스의 변명>(“지금까지 존재했던 인물 중 가장 현명한 사람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의 <철학자들의 일생>과 드니 랑뱅이 편집한 루크레티우스의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에서 에피쿠로스의 행복관을, 세네카(“나의 기질과 놀랄 만큼 어울리는”)의 신판 저작 전질을 읽고 또 읽었던 곳도 그곳이었다. 그는 제1언어로 라틴어를 배웠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테렌티우스와 플라우투스의 희곡,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베르길리우스의 전집까지 사서 <아이네이스>를 훤하게 알았다.

 

“은퇴 이후 그것(독서)이 나를 위로한다. 독서는 괴롭기 짝이 없는 게으름의 짓누름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준다. 그리고 언제라도 지루한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켜준다. 침울한 생각으로부터 해방되려면, 그냥 책에 의지하기만 해도 된다. 

  • <수상록> 3

 

고대 철학자들은 인간에겐 이성의 힘이 있기 때문에 다른 생명체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행복과 위대함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비록 1천여 권의 책을 소장하고 훌륭한 고전 교육의 혜택을 받은 몽테뉴였지만, 이런 찬미는 여간 거북하지 않았다. 

 

몽테뉴는 삶이 버거울 때면, 커다란 서재를 갖추고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으로 살기보다는 동물로 살아가는 삶의 이점을 살폈다. 염소는 상처를 입으면 수많은 식물 중에서 꽃박하를 찾고, 거북은 독사에게 물리면 본능적으로 야생초 마요라나를 찾으며, 황새는 스스로 소금물 관장제를 투입할 수 있다. 대조적으로 인간들은 어쩔 수 없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의사들에게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의존해야 한다.

 

몽테뉴는 정신이란 것이 우리 인간에게 감사해야 마땅한 어떤 것을 주었는지 의심스러웠다. 키케로는 이성의 긍정적인 측면을 잘 설명했다. 그리고 열여섯 번의 세기가 더 흘러, 이성의 부정적인 측면을 소개하는 것은 몽테뉴의 몫이었다. 

 

성에 부적절함에 대하여

 

더없이 위대한 철학자들까지도 육체적 수치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가장 지각 없고 난폭한” 신체 부위인 괄약근, 자신의 소화기관들이 얼마나 혐오감을 일으키는지를 예리하게 파악하고는 자신은 마치 그런 것들을 가지지 않은 것처럼 살고 싶어했다. 몽테뉴는 또 성적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거세함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종식시킨 남자들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제아무리 그런 극단적인 조치들에 이끌린다고 해도 몽테뉴의 철학에서 얻을 것은 어디까지나 조화이다. “우리 인간의 괴로움 중에서 가장 세련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경멸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두 조각 내지 못해 안달을 부릴 것이 아니라, 복잡다단한 육체를 상대로 한 전쟁을 중지하고 그것을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굴욕적이지도 않은, 그리고 무엇보다 어쩔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혜를 얻기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몽테뉴가 섬세하게 추구했던 것은 그보다는 지혜에 대한 정의였다. 진정한 지혜는 보다 속된 자아와의 조화를 필요로 한다. 또한 지혜는 지적이고 고상한 문화가 우리의 삶에서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서 좀더 소박한 시각을 가져야 하고, 필멸의 인간이라는 틀에서 일어나는 절박하고 간혹 원시적인 요구도 받아들여야 한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철학자들은 인간이 육체를 정복할 수 있고, 또 육체적이고 열정적인 자아에 결코 휩쓸려서는 안 된다고 암시했다. 그 충고를 완벽하게 따르기란 불가능하며,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육체는 부정할 수도 없고 정복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문화적 부적절함에 대하여

1580년 여름에 몽테뉴는 평생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프랑스 밖을 나서는 첫 여행길에 올랐다. 말을 타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거쳐 로마에 이르는 긴 여정이었다. 일행과 함께 여행하면서 몽테뉴는 사람들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관념들이 지방에 따라서 얼마나 뚜렷하게 달라지는지를 관찰했다. 

 

스위스 여러 주의 여관에서는 바닥보다 많이 높은 침대가 정상으로 통했기 때문에 디딤판이 필요했고, 침대 주위로는 멋진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야 했으며, 여행객들에게는 나름대로 은밀한 공간이 주어져야만 했다. 독일 땅에서는 방바닥과 거의 구별이 없는 눈높이의 침대가 정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침대 주변에는 커튼도 없었고, 여행객들은 한 방에 4명씩 자야 했다. 그곳의 여관 주인들은 여행객들에게 프랑스 여관에서 볼 수 있는 침대 시트 대신 깃털 이불을 내놓았다. 바젤에서는 포두주에 물을 타지 않았으며 저녁식사 때는 예닐곱 가지의 코스 요리를 즐겼다. 바덴에서는 매주 수요일은 생선으로만 식탁을 꾸몄다. 스위스의 가장 작은 마을이었던 바덴은 고작 2명의 경찰에 의해서 치안이 유지되었다. 독일인들은 15분마다 종을 울렸고, 심지어 1분 단위로 종을 울리는 마을도 있었다. 린다우에서는 모과로 만든 수프를 내놓았으며, 고기 접시는 수프에 앞서 나왔고, 빵은 회향으로 만든 것이었다. 

 

우리에게 낯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런 관습들이 결점으로 받아들여져서는 곤란하다. 국적과 친숙함을 선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불합리하다. 행동거지를 평가하는 수단은 편견보다는 꼼꼼하 추론이 되어야 했다. 경솔하게도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을 보면 부적절한 것으로 치부하면서 고대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했던 인물이 제시한 지적 겸손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을 무시했던 사람들 때문에 몽테뉴도 낭패감을 느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가장 현명한 사람은, 아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이 아는 것은 오직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뿐이라고 대답했다.”

  • <수상록> 2

 

사람은 누구나 온전한 형태의 인간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몽테뉴가 자신의 서재 천장의 들보에 썼다는 57개의 글귀 중에는 테린티우스의 글도 있었다. “나는 사람이다. 인간의 것 중에서 나에게 낯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말 등에 타고서, 아니면 상상속에서 여러 국경을 건너 여행함으로써 몽테뉴는 우리에게 지역적 편견과 또 그것이 유발하는 자아분열을 버리고 세계 시민으로서 보다 덜 옹졸한 주체성을 가지도록 권했다. 

 

비정상적이라는 비난에 대한 또 다른 위안은 친구, 말하자면 다정한 존재를 두는 것이다. 친구란 우리가 가진 많은 것들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정상적이라고 판단해줄 만큼 친절한 사람을 일컫는다. 에피쿠로스처럼 몽테뉴는 우정을 행복의 필수 조건이라고 믿었다. 

 

라 보에티에는 몽테뉴가 알고 지낸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몽테뉴를 올바르게 이해했던 것이다. 라 보에티에는 몽테뉴가 본연의 모습을 지킬 수 있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친구로 인정하는 것은 상대방이 친절하고 서로 어울리며 즐길 만한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아마 이 점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그가 우리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해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적 부적절함에 대하여

똑똑한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들: “만약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는 어떤 것이든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측정할 때, 그것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유익하고 적절한지를 잣대로 삼아야 할 것이다.” -<수상록>2

 

몽테뉴는 지식을 두 개의 범주로, 즉 학문과 지혜로 구분했다. 학문의 범주에는 논리학과 어원학, 문법,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들어갔다. 그리고 지혜의 범주에는 그보다 훨씬 더 폭넓고 이해하기 어렵고, 보다 가치 있는 지식의 종류를 넣었는데, 여기에는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이를테면 사람들이 행복하게 도덕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당되었다. 

 

“우리의 교육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고 현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무엇인가를 집어넣는 것이었다. 교육은 우리에게 미덕을 추구하고 지혜를 포옹하도록 가르치지 않았다. 

  • <수상록>2

 

“그 사람은 더 선해지고 현명해졌는가?” 우리는 가장 많이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수상록>1

 

그가 꿈꾸었던 학교는 학생들에게 단어의 어원보다는 지혜를 가르치고, 추상적인 질문에 경도된 오랜 지적 편견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몽테뉴식 지혜에 관한 시험

사람들에게 학문보다 지혜를 측정하는 시험지를 안겨주면, 아마 지식의 위계구조에 즉각적인 변동이 일어나고, 의외로 새로운 엘리트가 탄생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똑똑한 사람으로 보이는 방법

“책을 통해서 내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을 올바르게 활용하여 나 자신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어떤 책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면, 나는 다른 책을 집어든다.” -<수상록>2

 

몽테뉴가 암시했듯이, 인문학 분야의 책이라고 해서 어렵거나 지루한 내용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지혜는 특수한 어휘나 문장구조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을 피곤하게 해서 얻는 이점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어떤 것을 알아야 하는가?

몽테뉴의 지식 체계에서는, 한 권의 책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삶에 유익하고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인문학 분야에서 저자의 책임은 과학에 버금가는 정확도에 있지 않고 인류에게 행복과 건강을 주는 데에 있다. 몽테뉴는 그런 관점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짜증스러운 반응을 나타냈다. 

 

현명해지려는 노력이 담기지 않은 무엇인가를 쓰는 것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시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혼동하는 것보다 더 큰 죄이다. 

 

똑똑한 사람들은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어야 하는가

몽테뉴 본인이 느끼기에 자기보다 요점을 훨씬 더 우아하고 정확하게 파악한 듯한 저자들을 인용한 글이 수백 개에 이른다. 그는 플라톤을 128회, 루크레티우스를 149회, 세네카를 130회나 인용했다. 

 

여기서 지혜의 매우 특이한 원천이 하나 강조되었다. 바다 여행을 하던 피론의 돼지 ,투피 인디오 혹은 가스코뉴의 농부보다 훨씬 더 독특한 존재, 그것은 바로 독서가였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경험을 적절히 살펴보면서 자신을 지적 삶을 추구할 만한 훌륭한 존재로 생각한다면, 몽테뉴가 암시했듯이 우리 모두도 고대의 훌륭한 책에 있는 사상에 결코 뒤지지 않는 심오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예술과 현실의 관계는 오래전부터 중요한 철학적 주제로 생각해 왔는데, 그렇게 된 배경은 플라톤이라는 인물이 처음으로 그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수치심과 개인의 외모의 관계는 고대의 어떤 철학자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는 이유로 중요한 철학적 주제로 대접받지 못했다. 이처럼 전통에 대한 부적절한 존중을 염두에 두고서 몽테뉴는 자신이 플라톤도 시야가 좁고 우둔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고백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몽테뉴의 암시에 따르면, 학자들이 고전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쏟는 이유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과의 연결을 통해서 자신을 지적인 존재로 비치고 싶은 허영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결과 일반 대중은 학식만 높고 현명함에서는 크게 처지는 책들을 산더미만큼 많이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몽테뉴는 흥미로운 지혜란 어느 인생에서나 발견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우리의 나이가 2000살이 아니고, 플라톤의 대화에 관심이 없고, 또 시골에 조용히 파묻혀 산다는 이유로 자신은 깨달음을 얻기에 부적절한 존재라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도 현명한 지혜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보다 풍성한 요소를 갖춘 삶만이 아니라 당신의 평범한 개인적 삶도 도덕철학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수상록>3

 

겉으로 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그 옛날에 사색에 빠졌던 사람들과 전혀 닮지 않았다고 해서 낙담할 이유는 전혀 없다. 평범하고 도덕적인 삶이라면, 비록 지혜를 얻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우둔함에서 결코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성취를 이룬 삶이다.




상심한 존재들을 위하여(쇼펜하우어)

1821년: “결혼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다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쇼펜하우어는 일부다처제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생각을 가진다. “일부다처제가 가진 수많은 장점 중 하나는 남편이 장모들과 그렇게 밀접하게 가까이하지 않아도 좋다는 점이다. 그 두려움이 지금 수많은 결혼을 가로막고 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열 명의 장모면 어떨까!”

 

1809-1811년: 쇼펜하우어는 괴팅겐 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인생은 슬픈 것이다. 나는 삶을 심사숙고하는 일에 내 삶을 바치기로 작정했다.”

 

1813년: 쇼펜하우어가 바이마르를 떠날 때 괴테는 그를 위해서 2행시를 쓴다. “만약 그대가 인생에서 즐거움을 얻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이 세상에 가치를 부여해야만 하네.” 쇼펜하우어는 이 시에 감명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노트에 괴테가 적어준 글 옆에 샹포르로부터 인용한 글을 덧붙인다. “사람들을 있지도 않은 모습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냥 두는 것이 더 낫다.”

 

1833년: 쇼펜하우어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는 존재는, 그가 느끼기에 인간이 결여하고 있는 겸손과 상냥함을 지닌 푸들들이다.  “어떤 동물이든 눈에 보이기만 하면 그 즉시 나에게 기쁨을 주고 나의 가슴을 흐뭇하게 만든다.” 그는 이 푸들들을 “선생”이라고 높여 부르면서 애정을 듬뿍 쏟고 동물의 복지에 예민한 관심을 가진다. 

 

이 철학자는 하루를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서 매우 엄격하게 지낸다. 그는 아침에 세 시간 글을 쓰고, 한 시간 동안 플루트(로시니)를 연주하고, 영국식 식당 엥리셔 호프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서 흰색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한다. 점심식사 후 자신의 클럽인 인근의 카지노 소사이어티의 도서관을 찾는다. 저녁 무렵이 되면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개와 함께 마인 강변을 따라 두 시간 가량 산책을 한다. 밤에는 오페라 공연장이나 극장을 방문한다. 

 

1844년: “우리 인간의 가장 숭고한 기쁨은 존경을 받는 데에 있다. 그렇지만 존경을 보내야 할 사람들은 자신들의 존경을 표현할 만큼 감각이 예민하지 못하다. 그래서 가장 행복한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를 존경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1859년: 이제는 여성들도 무사무욕과 통찰력을 보여줄 수 있는 존재라고 판단한다. 

 

현대인의 러브 스토리 한 토막-쇼펜하우어의 해설을 곁들여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은 사랑의 감동에는 냉담했다. 이런 무관심이 쇼펜하우로서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그보다 255년 전에 태어난 가스코뉴의 수필가 몽테뉴처럼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덜 이성적으로 만드는 것들에 관심을 보였다. 인간의 마음은 육체에 종속되어 있다는 몽테뉴의 관점과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이성이 자기 지위를 잃는 예를 나열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그 힘에 이름까지 부여했다. 그 힘이란 쇼펜하우어의 생각으로는 언제나 이성보다 우위에 서며, 이성의 계획이나 판단 모두를 뒤틀어놓을 만큼 막강하다. 그것을 그는 생에 대한 의지라고 불렀는데, 인간 존재의 내부에 고유한, 살아남고 싶어하고, 번식하고 싶어하는 본능적 욕구로 정의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암시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의식적인 자아와 무의식적인 자아로 나뉜다. 무의식의 세계는 생에 대한 의지의 지배를 받는 반면, 의식의 세계는 생에 대한 의지에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생에 대한 의지가 가지고 있는 모든 계획을 알지 못한다. 의식적인 마음은 주권을 가진 실재라기보다는, 아이에게 홀딱 반하는 생에 대한 의지의 하인으로 그 일부분만 겉으로 드러난다. 

 

사랑을 생물학적으로, 불가피한 것으로, 또 종의 지속에 꼭 필요한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 이론은 우리가 사랑이 유발하는 갖가지 엉뚱한 행동에 대해서 보다 관용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고무한다. 

 

생에 대한 의지는 우리가 아름답고 지적인 후손을 가질 기회를 더 많이 줄 수 있는 사람 쪽으로 향하도록 한다. 사랑이란 것은 생에 대한 의지가 이상적인 상대(부모의 한쪽)를 발견했다는 것을 의식 밖으로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두 사람이) 서로르 ㄹ사랑하기 시작하는, 이를테면 가장 적절한 영어 표현 “to fancy each other”, 즉 서로에 대해서 환상을 품는 순간은 실제로 완전히 새로운 개인의 형성이 처음 시작되는 순간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생에 대한 의지는 그러한 검사를 통해서 무엇을 추구하는 것일까? 건강한 자식을 얻으리라는 확신을 찾고 있는 것이다. 생에 대한 의지는 둘 사이에 태어날 다음 세대는 위험천만한 세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적절해야 할 것이라는 확신을 원한다. 따라서 생에 대한 의지는 자신의 아이의 신체와 정신상태가 균형잡혀 있기를 원한다.

 

중화이론은 쇼펜하우어에게 남녀간의 끌림이 오가는 길을 예상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불행하게도 끌림의 이론은 쇼펜하우어로 하여금 너무나 처량한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안락함과 열정이 함께하는 사랑은 극히 드문 행운”이라고 쇼펜하우어는 관찰했다.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와 건강한 아이의 생산은 근본적으로 상충하는 두 개의 프로젝트인데, 사랑이라는 것이 장난을 쳐서 꼭 필요한 몇 년 동안에는 그 두 가지 프로젝트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우리를 착각하도록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로도 결코 지낼 수 없을 듯한 사람들이 결혼을 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결코 아니다. 

 

“사랑이란 것은 상극으로까지 보이는 사람에게도 자신을  맡기게 한다. 종의 의지가 개인의 의지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그 연인은 자신의 특질과 상반되는 모든 특질들에 눈을 감아버리고 모든 것을 간과하고 모든 것을 그릇되게 판단하고 자신의 열정의 대상이 된 인물과 자신을 영원히 함께 묶어버린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기 신부에게서 자신에게 비참한 삶을 약속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성격적인 혹은 기질적인 결함을 확실히 파악하고 쓰라림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 문제 때문에 놀라 달아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그 남자가 종국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그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제3자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남자 본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이익인 것 같은 환상에 빠져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우리는 자신을 거부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법을 일찍이 배워야 한다. 그의 이성은 상대방의 특질들을 높이 평가할 수도 있지만, 그의 생에 대한 의지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시비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방식으로 그렇게 말하도록 하는 것이다.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그 두 사람이 결합할 경우 신체 구조가 매우 나빠 그 자체로 조화롭지 못한 불행한 존재를 출산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선언하는 것이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우리는 연인으로 인하여 행복했을지는 몰라도, 자연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잡았던 손아귀를 푸는 보다 큰 이유이다. 

 

쇼펜하우어가 볼 때,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무의미한 생존을 위해서 똑같이 전력투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간도 사랑을 추구하고, 장래 파트너가 될 사람과 카페에서 잡담을 나누고, 아기를 가지고, 두더지나 개미와 비슷한 선택의 과정을 겪게 되는데, 그런 생명체보다 별로 더 행복하지도 않다. 

 

쇼펜하우어는 비통함을 불러일으키는 헛된 기대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사랑이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 때, 사랑의 본래 계획에는 행복이란 것이 절대로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위안이 된다. 

 

“천부의 잘못이 딱 하나 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관념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위대한 일에서든 아니면 하찮은 일에서든 이 세상과 삶은 행복한 존재를 돕게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늙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거의 대부분 실망이라고 부를 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젊은 시절을 방해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행복이란 살아 생전에 꼭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가정 아래에서 행복사냥에 나서는 일이다. 여기서부터 희망은 늘 좌절하기만 하고 그로 인해서 불만이 생겨난다. 적절한 충고와 가르침으로, 젊은이들의 마음에서 이 세상이 그들에게 줄 것이 아주 많다는 그릇된 관념을 털어낼 수만 있다면, 그들은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 <소론과 보유>

 

우리 인간에게는 두더지에게 없는 한 가지 장점이 있다. 우리도 두더지처럼 생존을 위해서 투쟁을 벌여야 하고, 짝을 찾고, 자식들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덧붙여 극장과 오페라, 콘서트 홀을 찾고, 밤에 침대에서 소설과 철학, 서사시를 읽을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생에 대한 의지의 요구에서 놓여날 수 있는 최고의 원천을 찾았던 것도 이런 활동에서이다. 예술과 철학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이 고통을 지식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다.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의 친구인 괴테가 사랑이 안겨주는 고통의 상당 부분을 승화시켜 지식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를 무척 존경했다.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들은 우리를 알지 못하면서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괴테의 독자들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된다. “예술의 정수는 그 하나의 이야기가 수천 명에 적용된다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쇼펜하우어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의 삶의 여정에서, 그리고 삶의 불행에서 그는 이제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보다는 전체로서 인류의 운명을 더 돌아볼 것이다. 따라서 그는 고통받는 존재로서보다는 세상을 아는 존재로서 행동해야 할 것이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어려움에 처한 존재들을 위하여(니체)

1. 

 

비참한 기분을 높이 평가한 철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현명한 삶이란 예로부터 고통을, 곧 번민, 절망, 분노, 자기멸시, 비탄을 줄이려는 노력과 결부되었다. 

 

2. 

 

게다가 철학자의 대다수는 늘 “멍청이”였다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역설했다. 니체의 책을 읽는 것이 비범한 까닭은, 수많은 멍청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니체만이, 인생의 완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든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가능하다면 고통을 파괴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고통을 증폭시키고 그 전보다 더 악화시키는 것 같다! - <선악을 넘어서>

 

3. 

 

우리는 외모에 놀라서는 안 된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는 보통 그 눈에 비친 단 하나의 개인적 특성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 특성이 우리의 전체 인상을 결정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신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도, 만약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다면 언제나 긴 턱수염이 우선 생각나는 존재로만 보일 뿐이다. 이를테면 쉽게 화를 내고 간혹 난폭해지기도 하는 군인형으로 생각된다. 그는 그런 인간형으로 대접받게 될 것이다. - <서광>

 

4. 

 

쇼펜하우어는 이 젊은이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쇼펜하우어의 설명에 따르면, 철학적 지혜의 정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담겨 있었다.

 

“가장 분별 있는 인간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애쓴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가장 행복한 운명은 육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지 않고 삶을 마무리 짓는 사람의 것이다.” - <소론과 보유>

 

니체는 자신의 식사와 학업 진도에 대한 보고 대신에 자제와 체념이라는 자신의 새로운 철학을 요약하여 보냈다. “삶이란 고통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또 삶을 즐기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삶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잘 압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삶의 아름다운 것을 얻기를 포기하고 금욕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는 스물넷의 나이에 바젤 대학에서 고전문헌학 교수직을 맡았을 때 염세적이고 사려 깊었던 프랑크푸르트의 그 현자를 사랑하는 점이 같다는 이유로 리하르트 바그너와 그의 아내 코지마 바그너와 친해지게 되었다. 

 

5. 

 

니체는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정신세계의 급진적인 변화를 겪었다. 예술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던 부유한 중년 여성 말비다 폰 마이젠부크의 초대를 받아들여 나폴리 만의 소렌토에 있는 한 빌라에서 그녀와 한 무리의 친구들과 몇 달을 함께 지냈다. 그는 자신이 인생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이미 늙어버렸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이제야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6. 

 

1876년 말에 코지마 바그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정신적 각성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인간의 완성이란 환상이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이라면 쾌락을 추구하기보다는 쇼펜하우어가 조언한 것처럼 “방화시설이 잘된 자그마한 방안에 틀어박혀” 조용하게 살면서 고통을 피하는 데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이제 니체에게는 어리석고 진실과 거리가 먼 허튼 충고로 와닿았으며, 니체가 몇 년 뒤 경멸적으로 표현했듯이, 그것은 “수줍은 사슴처럼 숲속에 숨어 안주하려는” 터무니없는 노력으로 비쳤다. 완성이란 고통을 피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의 역할을 “선한 무엇인가를 이루는 과정에서 겪는 자연스럽고 또 피할 수 없는 단계”로 인정함으로써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7.

 

음식과 공기 외에, 니체의 견해를 바꾸게 한 것은 인류 역사를 통해서 완성에 가까운 삶을 산 것 같은 몇몇 개인에 대한 회고였다. 그 개인들은 “초인”으로 묘사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듯한 인물이었다. 이 단어의 악명과 부조리함은 니체 자신의 철학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뒤에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트의 국가사회주의(나치)에 매료된 것과 더 관계가 깊다. 또 초기에 니체의 저작을 영어로 옮겼던 번역자들이 부주의하게 번역한 탓도 컸는데, 그들은 초인, 곧 위버멘쉬에게 전설적인 만화 주인공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베 갈리아니, 스탕달, 몽테뉴, 괴테 이들 네 사람은 아마 원숙기를 맞은 니체가 “완성된 삶”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는지를 파악하는 데에 가장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인물들일 것이다. 

 

그들은 공통점이 많았다. 그들은 호기심을 보였고, 예술적인 재능을 타고났고, 성적으로도 매우 왕성했다. 그들은 “따듯한 햇살과 원기를 돋우는 맑은 공기, 남부의 식물, 바다의 숨결, 그리고 육류와 과일, 달걀로 이어지는 식사”에 끌렸다. 그들 중 몇 명은 니체처럼 섬뜩한 유머를, 말하자면 염세적인 정신의 바탕에서 우러나오는 유쾌하면서도 사악한 웃음을 지을 줄 알았다. 그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탐험했고, 니체가 생이라고 부른 것들, 이를테면 용기와 야망, 위엄, 강인한 품성, 유머, 독립심을 가지고 있었다(경건함과 순종, 분노와 까다로움은 그만큼 없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깊숙이 관여했다. 몽테뉴는 보르도 시장을 두 차례나 지냈으며, 유럽을 여행하기도 했다. 아베 갈리아니는 파리 주재 대사관의 서기관을 지냈으며, 화폐 공급과 곡류 배급에 관한 저술(이들 책에 대해서 볼테르는 몰리에르의 재치와 플라톤의 지성을 적절히 결합했다고 높이 평가했다)을 남겼다. 괴테는 10년 동안 바이마르 궁정의 대신을 지냈으며, 농업과 산업, 빈민구제 분야의 개혁안을 제안했고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면서 나폴레옹을 두 차례 알현했다. 니체는 괴테를 “위대한 인물”, “내가 존경하는 마지막 독일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실용적인 활동을 통해 자신을 삶에서 유리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삶 깊숙이 던져넣었다.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책임을 떠맡았다. 그가 원했던 것은 총체감이었다. 그는 이성과 관능, 느낌, 의지를 서로 분리하는 데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우상의 황혼>) 스탕달은 나폴레옹의 군대를 따라서 유럽 전역을 돌아다녔다.

 

니체가 꼽은 영웅들은 또한 거듭 사랑에 빠졌다. “이 세상의 모든 온전한 움직임은 성교로 향한다”라는 사실을 몽테뉴는 잘 알았다. 일흔 네 살의 나이에, 마리엔트바트에서 맞은 어느 휴일 괴테는 열아홉 살의 귀여운 처녀 울리케 폰 레베초에게 혼을 빼앗겼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 책을 사랑했던 스탕달은 그 책의 저자 못지않게 열정적이어서 그의 일기는 수십 년 걸친 여성 편력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남자들은 한결같이 예술가였고(“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라고 니체는 인정했다), <수상록>, <상상 속의 소크라테스>, <로마의 비가>, <연애론> 등을 완성했을 때 더할 나위 없는 만족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니체가 가장 사랑했던 화가 중 한 사람인 라파엘로는 당시 자신이 위대한 예술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이미 두 거장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두 거장의 작품들을 보면서 라파엘로는 자신이 움직이는 대상들을 잘 그리지 못한다는 사실과 자신이 그림에서 기하학적인 요소들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선투시도법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그 결점을 자신을 위한 자양분으로 승화시켰다. 

 

8. 

 

니체는 이런 것들이 인간 존재가 완성된 삶을 사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들 중 일부라고 암시했다. 그는 여기에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사항을 한 가지 더 보탰다. 한때 극도의 비참함을 느껴보지 않고는 그런 것들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9.

 

니체는 인간 완성이란 것을 쉽게 이룰 수 있다든지 아니면 영원히 이룰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고쳐보려고 무척 애썼다.

 

10.

 

니체의 저서를 읽다보면 불과 몇 쪽마다 꼭 높은 산에 관한 묘사를 만나게 된다. 니체의 집에서 겨우 몇 킬로미터 떨어진 코바치 봉을 오르다보면, 니체의 철학이 담고 있는 정신과 어려움에 대한 옹호, 니체가 쇼펜하우어의 사슴 같은 수줍음과 결별한 이유 등을 그 어떤 박물관에서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니체의 산 철학이 담고 있는 도덕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 해발 3451미터를 오르기란 쉽지 않다(평범 - 고통 - 성취).

 

11. 

 

연필과 가죽 노트(“오직 산책에서 얻는 사고만이 가치를 지닌다”)를 옆구리에 끼고서 종종 펙스 계곡을 걷곤 했던 니체는 인간의 삶에서 긍정적인 요소들과 부정적인 요소들, 이를테면 완성과 어려움의 상호 의존성을 이끌어냈다. 

 

12. 

 

물론 끔찍한 어려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삶은 다 힘겹다. 그리고 그들 중 몇 명을 완성된 삶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달려 있다. 니체가 존경했던 몽테뉴가 <수상록> 마지막 장에서 설명했듯이, 삶의 기술은 역경에 처할 때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 고통을 감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약 어느 음악가가 한 음색만을 좋아한다면 어떤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음악가는 모든 음색을 활용하여 조화를 일구어낼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역시 삶을 구성하는 선과 악을 가지고 그렇게 요리할 수 있어야 한다.” - <수상록>3 

 

그리고 300년 뒤, 니체는 그런 사상으로 회귀했다.

 

13.

 

1504년 스물한 살의 나이에 라파엘로는 두 거장의 작품들을 연구하기 위해서 우르비노를 떠나 피렌체로 향했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앙기아리 전투를, 미켈란젤로가 카시나 전투를 각각 그렸던 시의회홀을 찾아서 그들의 밑그림들을 면밀히 검토했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해부학적인 스케치에서 얻은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는 시신을 해부하듯이 그들의 예를 따랐다. 라파엘로가 쏟은 노력의 결과는 곧 명백해졌다. 우리는 라파엘로가 피렌체로 옮기기 전에 그린 <한 젊은 여자의 초상>과 몇 년 뒤 완성한 <한 여자의 초상>을 비교해볼 수 있다. <모나리자>를 통해서 라파엘로는, 피라미드형 구도에서 두 팔이 기부 역할을 하는, 상반신만 나오는 앉은 자세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모나리자>는 그에게 초상화에 풍만함을 주기 위해서는 머리와 어깨, 두 손에 서로 대조적인 축을 사용해야 한다는 요령을 가르쳐주었다. 우르비노에서 그린 여인은 자신의 의상에 몸이 꽉 죄인 상태에다가 두 팔이 부자연스럽게 잘려 있지만, 피렌체에서 그린 여인에게서는 움직임과 편안함이 느껴진다. 이런 재능을 라파엘로가 저절로 얻게 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칫 절망감에 빠질 수도 있었던 열등감 속에서도 현명하게 대처함으로써 훌륭한 예술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라파엘로가 걸었던 성공의 길은 고통을 현명하게 승화시켜야 한다는 니체의 가르침을 뒷받침하고 있다. 

 

“재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라. 타고난 재능이라고! 모든 분야에서 그다지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으면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다. 그들은 부족한 자지릉ㄹ 일궈가면서 스스로 위대함을 획득하여 (우리가 표현하는 것처럼) “천재”가 되었다. 그들 모두는 장인의 근면함과 치열함을 갖추고 있어서 감히 훌륭한 완성품을 내놓기 전에 각 부분들을 정확하게 구축하려고 애쓴다. 그들이 그런 시간을 가지는 이유는 황홀한 완성품이 주는 효과보다, 보잘것없고 신통치 않은 것들을 더 훌륭하게 개선하는 작업 그 잧에 보다 많은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라파엘로는 창작 과정에서 부딪힌 어려움들을 승화시켜, 그것에 정신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결실을 많이 거둘 수 있었다. 

 

14.

 

니체는 원예에 은유적 관심뿐만 아니라 실제적 관심도 많았다. 1879년에 바젤 대학에서 물러나자마자 그는 전문적인 정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행동에 놀라는 어머니에게 니체는 “제가 바라는 것은 소박하고 자연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아시는지요”라고 일러주었다. 니체가 표현했듯이, 우리는 “고귀한 것들은 저급한 것에서 성장하도록 되어 있지 않고 또 시간을 두고 성장하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일류들은 그 자체의 원인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믿어버린다. 그러나 니체는 역설하기를, “훌륭하고 존경받는 것들은 그와는 분명히 정반대인 사악한 것들과 교묘하게 얽혀 있고, 사슬로 꿰어져 있다”고 말했다. “사랑과 미움, 감사와 보복, 선한 본성과 분노는 서로 뒤얽혀 있다.” 이 말은 그런 감정적인 것들을 더불어 함께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이 성공적으로 다듬어진 결과일 수 있다는 뜻이다.

 

“미움과 시기, 탐욕, 그리고 지배욕이라는 감정들은 삶의 지배적인 감정인데 이런 것들은 삶이라는 총체적인 경제에서는 기본이며 필수이다. - <선악을 넘어서>

 

15.

 

인생의 완성은 삶을 갈갈이 찢어놓을 수 있는 어려움에 현명하게 대처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 니체는 우리에게 어려움을 참고 견디라고 요구했다. 

 

16.

 

그리고 우연의 일치와는 거리가 멀지만, 니체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라파엘로도 1504년 우리비노에서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에 대한) 질투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술을 마시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라파엘로는 피렌체로 가서 위대한 화가가 되는 길을 배웠다. 스탕달도 1805년에 “지배당할까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인한 절망감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술을 입에 대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17년 동안 그 고통을 다스려 1882년에 <연애론>을 출판했다. 

 

17.

 

니체의 알코올 혐오는 동시에 영국학파로서 도덕철학을 지배했던 공리주의와 그 철학의 위대한 주창자 존 스튜어트 밀에 대한 혐오를 설명하고 있다. 공리주의 철학자들은 도덕적 모호함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떤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방법은 그 행동이 일으키는 쾌락과 고통의 정도를 측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리주의, 그리고 심지어 그런 철학을 발아시킨 나라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니체는 격노했다. 

 

“유럽의 상스러움, 근대적 아이디어들의 비속함은 영국의 작품이고 발명이다. - <선악을 넘어서>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직 영국인만이 그렇게 한다. - <우상의 황혼>

 

물로 니체 또한 행복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단지 행복이란 고통을 치르지 않고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 

 

“모든 것의 가치를 쾌락과 고통에 따라서, 말하자면 어떤 행동의 결과로 수반되는 이차적인 현상에 따라서 평가하는 사고방식에는, 창조적인 힘과 예술가의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조소를 흘리며 경멸해마지않을 천진난만함이 있다. - < 선악을 넘어서>

 

여기서 예술가의 분별력을 언급한 이유는 예술적 창조의 경우 대단한 성취감을 주지만, 언제나 처절한 고통을 요구하는 행위의 가장 명백한 예이기 때문이다. 만약 스탕달이 자신의 예술에 대한 가치를 그 예술이 당장에 주는 “쾌락”과 “고통”에 따라서 평가했다면, 아마도 “지배당할까 두려워하는 사람”에서부터 자신의 창조력의 절정을 향하여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18.

 

니체에게는 알코올보다 기독교의 경험이 훨씬 더 많았다. 그는 작센 주의 라이프치히 시 근처의 뢰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는 성직자였으며, 어머니는 그곳에서 한 시간 거리인 포블레스 마을에서 예배를 집전하던 성직자 다비트 에른스트 욀러의 딸로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들의 아들 니체는 1844년 10월에 뢰켄 교회에서 그 지방의 성직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다.

 

19.

 

<신약성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 어떻게 위안을 주는가? 어려움에 처한 상황 중 많은 것이 전혀 어려움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미덕이라는 식으로 위안을 주려고 한다.

 

만약 자신의 소심함이 걱정된다면, <신약성서>는 이렇게 강조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오. - <마태복음> 5장 5절

 

만약 친구가 없는 것을 걱정한다면, <신약성서>는 이렇게 제안한다: 인자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 <누가복음> 6장 22-23절

 

만약 착취당하는 것을 걱정한다면, <신약성서>는 이렇게 충고한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러여ㅝ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들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 <골로새서> 3장 22-24절

 

만약 돈이 없는 것을 걱정한다면, <신약성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낙타나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 <마가복음> 10장 25절

 

니체의 설명에 따르면,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어리석은 노예들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는데, 산의 정상에 오를 배짱이 부족했던 그들은 산기슭에 머물러 있어도 기쁘기만 하다는 철학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기독교인들은 성취감을 실제로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세상의 지위, 섹스, 지적 정복, 창의성)을 즐기기를 원했지만, 그런 아름다운 것들이 요구하는 어려움을 극복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위선적인 믿음을 짜내기에 이르렀다. 무력함은 “선함”이 되었고, 천박함은 “겸양”이 되었다. 자신이 혐오하는 사람에 대한 종속은 “순종”이 되었고,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복수할 수 없는 것”은 “용서”로 둔갑했다. 허약함을 나타내는 모든 감정은 신성한 이름으로 덧씌어져 “자발적인 성취, 무엇인가를 갈망함으로써 선택된 것, 하나의 행위, 하나의 성취”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위안의 종교”에 빠진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가치체계에서 바람직한 것보다는 쉬운 것에 우선권을 둠으로써 그들의 삶의 잠재력을 모두 낭비해버렸다.

 

20.

 

니체는 우리가 좌절에 봉착할 때 어떤 식으로 접근하기를 원했을까?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심지어 우리가 그것을 가지지 않았을 때라도, 아니 결코 가질 수 없을 때라도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계속 굳게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달리 표현하면, 어떤 선한 것들을 손에 넣기가 무척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들을 모욕하고 악으로 치부하고 싶은 유혹에 굴하지 말라는 뜻이다. 

 

21.

 

에피쿠로스는 니체가 아주 젊었을 때부터 좋아했던 고대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니체는 에피쿠로스를 “후기 고대의 영혼의 위로자” “가장 위대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 철학적 사색을 영웅적이고 목가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창조한 인물”이라고 불렀다. 특히 니체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행복이란 것은 친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삶과 관계가 있다는 에피쿠로스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니체는 공동체가 주는 마음의 평온함을 거의 깨닫지 못한 채 살았다. 

 

여자들로부터 연이어 퇴짜를 맞으면서 니체는 결혼 문제에 지치게 되었다. 그의 우울증과 좋지 못한 건강을 염려한 리하르트 바그너는 두 가지 치유법이 있다고 단정지었다. “니체는 결혼을 하든가 아니면 오페라를 써야 한다.” 그러나 니체는 오페라는커녕 그럴듯한 가곡을 작곡할 재능초자 타고나지 못했다. 

 

니체가 진정으로 사랑을 느꼈던 부유한 부인이 바로 바그너의 부인인 코지마라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결혼의 중요성에 대한 바그너의 주장에 간헐적으로 동의했다. 결혼한 친구인 프란츠 오베르벡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자네는 부인 덕택에 모든 것이 나보다 백 배는 낫네. 그대에겐 함께할 둥지가 있잖은가. 하지만 내게는 기껏 동굴밖에 없어. 간혹 사람을 접하는 일은 마치 축제일, 이를테면 진정한 ‘나 자신’을 되찾는 일 같군.”

 

1882년 니체는 다시 한번 자신에게 어울리는 여인을 발견했다. 그가 경험한 사랑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웠으면서도 가장 위대했던 사랑, 바로 루 안드레아스 잘로메였다. 스물한 살의 아름답고, 똑똑하고, 바람기가 많았던 그녀는 그의 철학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루는 남편으로서보다는 철학자로서의 니체에 더 관심이 많았다. 루의 거부는 그를 다시 한번 오랫동안 지속될 극심한 우울증으로 몰아 넣었다. 

 

그에게는 직업상의 어려움도 있었다. 그의 책 중에서 그가 제정신으로 살았던 동안에 2000부 이상 팔린 것은 한 권도 없었다. 

 

니체의 건강도 마찬가지로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학창시절부터 그는 다양한 질병을 앓았다. 두통, 소화불량, 구토, 현기증, 실명에 가까운 시력 상실과 불면증, 그중 상당수는 그가 1865년 2월 쾰른의 매춘굴에서 옮은 것이 거의 확실한 매독의 징후들이었다(니체는 피아노 외에는 아무것에도 손길 한번 주지 않고 그곳을 빠져나왔다고 주장했다).

 

22. 

 

처절한 고독과 무명, 가난, 그리고 나쁜 건강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니체는 자신이 그토록 비난했던 기독교도들의 행동거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우정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명성과 부와 행복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아베 갈리아니와 괴테는 여전히 그의 영웅으로 남아 있었다. 마틸데는 오직 시에 관한 대화만을 원했지만, 그는 “자시경멸이라는, 남자들에게 흔한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똑똑한 여성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23. 

 

목사였던 그의 아버지처럼, 니체는 위안이라는 임무에 매달렸다. 그의 아버지처럼, 그도 우리에게 성취에 이르는 길을 펼쳐 보이기를 원했다. 그는 어려움을, 성취를 위해서 꼭 필요한 전제조건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달콤한 위안은 종국적으로 도움이 되기보다는 잔인한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르 아프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다.

 

14.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1. 교리가 없는 지혜

진정한 이슈는 하느님이 존재하느냐 않느냐 여부가 아니라, 만약 하느님이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이라면 이런 논의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하는 것이다. 

 

종교가 우리의 발명품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발명품은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두 가지 필요성(그러나 세속 사회에는 어떤 특별한 기술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두 가지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생겼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첫째는 함께 살아야 한다는 필요성이다. 둘째는 직업상의 실패, 꼬인 인간관계, 가족의 죽음, 자신의 노화와 사망 등에 대한 우리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끔찍스러운 고통에 대처해야 할 필요성이다. 

 

현대 무신론의 오류는 어떤 신앙의 핵심 교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타당성을 지니는 신앙의 측면들이 무척 많다는 점을 간과한 데에 있다. 

 

무신론자가 직면하게 된 도전이란, 어떻게 하면 종교적 식민지화의 과정을 역전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책은 종교에서 보다 독단적인 측면을 제거함으로써, 골치 아픈 이 행성에서의 우리의 유한한 생애 동안에 가뜩이나 회의적인 현대인이 마주쳐야 하는 재난과 슬픔에 대한 시의적절하고 위안이 되는 몇 가지 측면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 책은 이제 더 이상은 진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로부터 여전히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현명한 것들을 구출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2. 공동체

 

1) 낯선 사람 만나기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상실들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통렬하게 느끼는 것은 바로 공동체 정신의 상실이다. 예전에만 해도 이웃의 정이란 것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무자비한 익명성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자비한 익명성이란, 제한적이고 개인적인 목적, 즉 경제적 이익이나, 사회적 상승이나, 또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사람들이 서로 접촉하는 상태를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 어떤 공동체에 들어가는 방법의 핵심에는 각자의 일에서의 성공에 대한 찬양이 놓여 있다. 어떤 파티에서 맨처음 받는 질문이 “무슨 일을 하십니까?”일 때에, 우리는 그 공동체의 출입문에 맞닥뜨렸음을 직감한다. 

 

지금의 세계는 일터에서의 성취가 곧 물리적 생존을 위한 경제적 수단을 확보하고, 나아가서 정신적 번영을 위해서 필수적인 타인의 관심을 확보한다고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우선 장소를 이용해서 공동체 정신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를 들면 미술관은 화폭 앞에서 조용히 감상하는 습관을 옳다고 간주하고, 나이트 클럽은 음악에 맞춰 두 손을 흔드는 습관을 옳다고 간주한다. 커다란 목제 출입문에다가 입구 주위에 300개의 천사 석상이 새겨져 있는 교회의 경우, 강도나 광인이 아닐까 하는 오해를 살 위험이 없어도 우리가 낯선 사람에게 몸을 굽혀서 인사를 건넬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를 허락해준다. 

 

교회는 단순히 세속적인 성공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았다.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교회는 우리가 세속적 성공 없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쳐주었다. 

 

여러 종교에서는 음식을 섭취할 때야말로 도덕 교육을 하기에 매우 적절할 때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2) 사과

공동체 정신을 고취시키려는 종교의 노력은 단순히 우리가 서로 인사를 나누도록 만드는 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유대교의 경우는 특히 분노에 대해서 독특하게 통찰한다. 가령 분노를 느끼기가 얼마나 쉬운지, 분노를 표현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다른 사람의 분노를 달래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도 어색한 일인지 등에 대한 통찰이 그렇다. 하느님은 이와 같은 고리처럼 이어지는 사과의 연쇄 속에서 특권적인 역할을 한다. 속죄의 날은 한 가지 큰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 개념에 따르면,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행위가 단순히 가해자나 피해자들 가운데 어느 한쪽의 주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곳에 원인이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도록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규범을 따르는 것이다. 

 

3)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증오

우리의 사회적 소외 가운데 일부는 공동체적 가치에 대해서는 어떤 관심도 없는 우리 본성의 여러 측면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우리의 그런 측면들은 가령 성실성이나 자기희생이나 공감에 대해서는 오히려 짜증을 내거나 불편함을 느끼는 반면, 나르시시즘이나 질투나 악의나 성교나 음란한 공격성에 대해서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린다. 

 

최상의 공동체적 의식은 개인의 필요와 집단의 필요를 효과적으로 중재하게 마련이다. 의식은 곧 자아와 타인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 중 한 사람이 사망했을 때에 유대교에서 거행하는 의식이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한 신자의 죽음 직후에 이어지는 7일간의 시바 기간에는 몇 가지 단계가 차례대로 허락된다. 우선 격심한 혼란의 단계가 허락된다. 다음으로 보다 억제된 30일간의 단계(슐로심)가 허락되는데, 이때에 유족은 기존에 감당하던 여러 가지 책임에서 면제된다. 다음으로 12개월간의 단계(슈네임 아사르 코데시)가 허락되며, 이때에는 회당에서 유족이 고인을 추억하기 위해서 기도한다. 그 1년이 지나고, 묘석(마체바)이 공개된 다음, 계속해서 기도하고, 다시 한번 예배를 드리고 가정에서 모임을 가지고 나면 이제부터는 자기 삶과 공동체 모두의 요구에 다시 충실할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원활하게 기능하는 공동체를 원한다면, 우리의 본성에 관해서 순진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신 우리의 파괴적이고 반사회적인 감정의 깊이를 완전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축제와 방탕을 변두리로 내쫓아서도 안 되고, 경찰을 불러서 소탕해서도 안 되고, 논평가들이 눈살을 찌푸리게끔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대략 한 해에 한 번쯤은 혼돈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가 종교에서 배우는 것은 단순히 공동체의 매력만이 아니다. 우리는 또 한 가지를 더 배운다. 즉 훌륭한 공동체가 되려면, 사실은 그 구성원인 우리 안에 공동체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 요소가 많다는 점을 수긍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공동체를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항상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랑의 축제를 연다면, 반드시 바보들의 축제도 열어야 할 것이다. 

3. 친절

1) 자유의지론과 온정주의 

1859년 존 스튜어트 밀은 이런 불간섭주의적 접근방식을 옹호하는 최초이면서도 가장 정교한 논고인 <자유론>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문명화된 공동체에서 그 구성원 중 누군가의 뜻을 거슬러 권력을 행사해도 정당할 때는 오직 다른 구성원에게 해악이 가해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목적일 때뿐이다. 그 구성원의 육체적, 도덕적 선만 가지고는 충분한 보장이 되지 못한다.”

 

자유의지론의 계산에 따르면, 세속 사회에서는 법률에 따라야 하는 품행과, 개인의 도덕에 따라야 하는 품행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을 그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우리가 중립성보다는 도덕적 간섭을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선호해야 하는 한 영역이 있다. 많은 사람의 삶에서는 무엇보다도 압도적이며, 그 영역의 가치에 비하면 다른 어떤 관심사도 순식간에 왜소해지는 한 영역이 있다. 그 한 영역이란 바로 우리의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다. 

 

자유의지론자들은 우리가 이론적으로는 타인을 인도함으로써 이익을 얻고 있다고 시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런 이익을 타인에게 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불평할 것이다.

 

어느 단계에선가 일단 하느님이 ‘과거에’ 한때나마 존재했었다는 것을, 따라서 도덕의 근거가 본질적으로 초자연적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진실로 믿을 때에만, 비로소 하느님의 현재의 비존재에 대한 인식이 우리의 도덕적 원칙을 흔들어놓을 만한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애초부터 하느님을 우리의 창작물로 간주한다면 초자연적인 존재에게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되던 여러 가지 규범들이 사실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우리 조상들의 작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과연 우리가 더 이상 윤리적 의구심 때문에 부담을 느낄 수가 있을까? 

 

우리에게는 여전히 동정심을 품으라거나 정의롭게 행동하라는 등의 충고가 필요하다. 

 

미신에서 이성으로 향하는 도덕의 적절한 진화란, 결국 우리가 가진 도덕적 계명의 저자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적 교훈에서도 먼저 고려해야 할 내용은 반드시 보편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가령 기독교에서는 자존심(겉으로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마음가짐)이야말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유대교에서는 부부가 성행위를 얼마나 많이 해야 하는지에 대한 권고를 결코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대 국가는 사소한 학대가 결국 큰 범죄를 야기시킨다는 사실에 제대로 주목하지 않는다. 종교의 권고 대상을 보면, 가깝게는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정도에서부터, 멀게는 거대한 범죄의 온상을 형성할 정도에 해당하는 각종 냉대와 학대가 망라되어 있다.

 

십계명은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가하는 공격성을 제어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탈무드의 명령이며, 중세 기독교의 미덕과 악덕의 명부를 살펴보라. 거기 나와 있는 온갖 종류의 학대들은 비록 정도가 다르기는 하더라도, 엄청나게 격한 분노를 일으키기 쉽다는 점에서는 모두 똑같다고 할 수 있다. 

 

남을 얕잡아 보는 발언을 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부부간에 성적으로 너무 무관심함으로써 생기는 결과를 경고했다는 것이야말로 도덕적 상상력의 보다 위대한 성취라고 말할 수 있다.

 

2) 도덕적 분위기

14세기 초에 피렌체의 화가 조토는 한 성당의 벽을 프레스코화들로 장식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 성당에는 14개의 벽감이 있었으며, 조토는 그 하나마다에 서로 다른 미덕이나 악덕을 알레고리화한 초상화를 하나씩 그리게 되었다. 그는 회중석에 가장 가까운 오른쪽 벽에 우선 기본적인 미덕으로 일컬어지는 신중, 용기, 절제, 정의를 그렸고, 그 다음으로는 기독교의 미덕으로 일컬어지는 신앙, 자비, 희망을 그렸다. 그리고 반대편인 왼쪽 벽에는 이에 상응하는 악덕들을 배치했다. 우둔, 변덕, 불의, 불성실, 시기, 절망이었다.

 

도덕적 분위기를 산출하려는 이런 기독교적 열망과는 대조적으로, 자유의지론적 이론가들은 공공장소에서는 주읿이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무신론자들은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의 주민들을 딱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자유의지론적 국가라는 이름에 참으로 걸맞은 국가가 있다면, 그곳에서는 시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비교적 균형 잡힌 메시지로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즉 단순히 상업적인 메시지는 회피하는 한편, 전체 사회를 위한 번영에 대한 개념을 강조한 메시지를 만들려고 할 것이다. 

 

3) 역할모델

기독교는 공공장소에서의 메시지에 신중하게 관심을 쏟는 한편으로, 선과 악에 관한 우리의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역할이 지대하다는 점을 현명하게도 인식했다.

 

성 요셉은 어린이를 둔 가정이 스트레스에 차분하게 대처하는 방법이라든지, 일터에서의 시련을 온화하고도 불평하지 않는 성격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도 있다. 성 유다 다태오는 상실된 대의의 수호성인인 그는(굳이 어떤 즉각적인 해결책이나 심지어 희망조차 찾을 필요가 없는 상태에서) 부드러운 태도로 우리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 분노를 느낄 때에는 성 필립 네리를 찾을 수 있다. 그는 결코 우리의 문제를 실제보다 더 과장하지도 않고, 우리에게 굴욕을 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에게 뭔가 부조리하다는 느낌을 주고, 결국 우리가 혀냊의 상황을 웃어넘김으로써 치유 효과를 얻게 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아울러 가톨릭에서는 우리의 이상적인 친구들의 모습을 3차원 미니어처의 형태로 집 안에 놓고 바라보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가톨릭은 우리가 이런 관계의 메커니즘을 굳이 포기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나무나 돌이나 수지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성인의 조각상을 구입해서 각자의 방이며 복도의 선반이나 모퉁이에 놓아두라고 권고했다. 

 

자유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진 자유의지론자는 그들의 온정주의적 전략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것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누군가를 향해서 당신은 완전히 성장했다고, 따라서 이제는 무슨 일이든지 간에 당신이 좋을 대로 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주 친절한 일은 아닐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를 아주 자유롭게 해주는 일도 아닐 것이다. 

4. 교육

1) 우리가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

교육의 목표를 옹호한 빅토리아 시대의 또다른 사람인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했다. “대학의 목적은 유능한 변호사나 의사나 기술자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능력 있고 교양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매슈 아널드는 적절한 교육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 인간의 혼란을 제거하고 인간의 불행을 감소시키려는 열망”을 우리 안에 고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교육의 가장 야심만만한 목표는 “이 세상을 우리가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훌륭하고 더 행복한 곳으로 만들려는 고귀한 포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대학은 학생들에게 정서적이고 윤리적인 삶의 기술을 가르치는 데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 같으며, 이웃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우리가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훌륭하고 더 행복한 곳으로 만들려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성서 교육의 쇠퇴와 문화 교육의 대두 간의 관계를 고려해보면, 비로소 그 의미가 명백해지기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문화 예술 작품을 성서처럼 참고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결국 문화가 성서를 대체한 셈이었다. 

 

무신론자들은 종교적 믿음의 내용물에 대해서 너무나 반대해왔기 때문에, 영감을 고취시키고 지금도 타당성이 있는 종교의 전반적인 목표에 대해서조차 그 진정한 가치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 목표란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우리에게 잘 조율된 조언을 제공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의 일부분을 돕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기독교의 용어를 따라서 우리는 그 일부분을 ‘영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교육 제도의 본질적인 임무는 우리의 영혼에 자양분을 주고 영혼을 위안하고 인도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모호함에 사랑에 빠진다. 또한 위대한 예술은 도덕적 내용을 가져서도 안 되고, 청중을 변화시키려는 열망을 품어서도 안 된다는 모더니스트의 교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학계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기술(추상적 관념과 우리의 삶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강조, 텍스트에 대한 명료한 해석, 전체보다는 발췌에 대한 선호)이야말로 종교가 주로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종교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개념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가 아니라, 오히려 몰이해와 무관심에서 비롯된 관심과 지지의 저하라는 것을 종교는 깨달았다. 그리고 명료함이 관념을 손상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지켜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명료함은 결과적으로 엘리트의 지적 노동이 자리잡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들은 본질적으로 통속적이었다. 그들의 주장에서는 복잡성이나 통찰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나, 그들은 설교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을 막연히 돕고 싶어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가 세운 지적 세계에서는, 가장 유명한 기관에서조차도 영혼에 관해서 가장 진지한 질문을 내놓은 일도 거의 없으며, 따라서 답변을 내놓는 일도 없다. 예를 들면 역사와 문학 같은 분야를 폐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분야는 매우 귀중한 재료를 다루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피상적인 범주일 뿐이고, 그 자체로서 우리의 영혼을 가장 괴롭히거나 매료시키는 테마를 추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설계된 미래의 대학은 과거처럼 소설, 역사, 희곡, 회화의 연구를 장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대학이 이런 재료를 가르치는 목적은 단순히 학문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학생들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예를 들면 <안나 카레니나>와 <마담 보바리>는 19세기 소설의 서사적 경향에 초점을 맞춘 강의 교재가 아니라, 오히려 결혼의 긴장과 갈등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강의 교재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피쿠로스와 세네카의 저서는 헬레니즘 철학에 관한 강의보다는 오히려 죽음에 관한 강의 개요에나 등장하게 될 것이다.

 

학과는 우리의 삶이 직면하는 갖가지 문제를 필수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여러 가지 강의 주제들 가운데에는 혼자 있는 것, 자기 직업을 다시 생각하는 것, 자녀와의 관계를 향상시키는 것, 자연과 다시 접촉하는 것, 자녀와의 관계를 향상시키는 것, 자연과 다시 접촉하는 것, 질병에 대처하는 것에 관한 주제도 있을 것이다. 

 

아널드와 밀이 무척 원했을 것 같은 이런 방식을 통해서, 세속 교육은 적절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것이며, 교과과정을 다시 설계하여 우리의 가장 절박한 개인적, 윤리적 딜레마를 직접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2) 어떻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가

기독교 신학자들은 우리의 영혼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말한 아크라시아로부터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번번이 그 일을 하기 싫어하는(의지의 나약함 때문이거나 방심 때문이거나 간에) 혼란스러운 성향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그 지혜를 삶에서 실천할 힘은 부족하다. 기독교는 정신을 게으르고 변덕스러운 기관으로 묘사한다. 교육의 핵심 이슈는 단순히 무지를 없애는 것(이는 세속 교육자들도 암시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관념을 이론적으로는 완전히 이해하면서도 정작 그 관념대로 실천하기는 싫어하는 우리의 성향과 싸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교훈이 이성(로고스)과 감성(파토스) 모두에 호소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리스의 소피스트의 견해를 따르는 셈이다. 웅변가는 증명하고(프로바레), 즐겁게 하고(델렉타레), 설득하는(플렉테레) 3중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키케로의 충고를 승인하는 셈이다. 세계를 뒤흔들 발상을 우물거리며 말하는 것은 정당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미국 전역의 교회에서, 주일 설교라는 것은 인문학 분야의 전형적인 강의에 비추어볼 때에 이보다 더 대조적인 것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열광적인 합창단이 소리 높여 찬양할 경우 몽테뉴의 에세이에 담긴 의미의 범위는 훨씬 더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부름과 응답 형식의 리드미컬한 가사로 이루어지기만 했더라도 루소의 철학적 진리는 우리의 의식 속에 훨씬 더 오래 머무를 수 있지 않을까? 

 

관념은 언변으로 전달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전달되어야 할 필요도 있다. 종교는 너무나 현명했기 때문에 정교한 달력과 일과표를 만들어놓았다. 

 

과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세속 사회는 반복을 심각한 결점으로 간주하며, 그 대신 새로운 정보의 지속적인 흐름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따라서 세속 사회는 우리가 모든 것을 잊어버리도록 촉구한다. 

 

뉴스의 위상은 우리의 삶이 계속해서 결정적인 변화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다는 묵언의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 이런 변화의 원인은 현대 역사의 두 가지 추진력, 바로 정치와 기술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교에서는 뉴스 보도를 통해서 통찰을 바꾸거나 얻어야 할 필요가 거의 없다. 16억 명의 불교도에게는 세계를 바꿔놓을 정도의 중요성을 지닌 뉴스가 기원전 483년 이래로 하나도 없었다. 기독교도의 경우에도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들은 30년의 부활 주일 즈음에 이미 닥쳐왔으며, 유대인의 경우에도 70년에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서 제2신전이 파괴된 직후가 바로 그런 시기에 해당한다. 

 

3) 영적 훈련

일본의 선불교에서는 우정의 중요성, 좌절의 불가피성, 인간 노력의 불완전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선불교는 추종자가 여러 가지 활동들, 곧 꽃꽂이, 서예, 참선, 산책, 자갈밭 정원 조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도를 통해서 이런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보다 직접적으로 도와주었다.

 

다도와 비교할 만한 사례를 유대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유대교의 문헌에는 죄를 시인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재생의 가능성과 속죄의 중요성을 거듭해서 언급하고 있다. 바빌로니아에서의 포로 생활 기간에 유대교는 그 공동체에 미크베(깨끗한 샘물을 정확히 575리터 담을 수 있는 신성한 욕조)를 만들도록 조언했다. 유대인은 영적으로 미심쩍은 행위를 고백한 이후에 이 욕조에 들어가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은 물론 하느님과의 관계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종교에서 권장하는 여러 가지 다른 상징적인 관습들과 마찬가지로, 신체 활동을 이용하여 영적 교훈을 뒷받침하고 있다. 

 

종교 수련장은 원숙한 면모를 보여준다. 시토 수도회 수도원의 창립자인 프랑스의 성 베르나르는 인간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는데(코르푸스-몸, 아니무스-정신, 스피리투스-영) 그 각각을 주의 깊게 보살피는 품위 있는 휴식처가 별도로 있다고 주장했다. 

 

4) 지혜 가르치기

궁극적으로 모든 교육의 목적은 우리의 시간을 절약하고 오류를 방지하는 것이다. 세속 사회는 물리학과에 입학하는 대학생이 불과 몇 달 안에 패러데이가 평생 알고 있었던 것보다 많은 지식을 배우게 되고, 불과 몇 년 안에 아인슈타인의 통일장 이론의 한계까지 파악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더라도 전혀 애석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지혜가 결코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는 개인의 삶에서도 특히 중요한 문제를 향해서 직접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가? 나는 얼마나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종교는 교정을 위한 아이디어로 꽉 차 있다. 종교의 사례는 새로운 교과과정을 제안한다. 가령 지식을 우연히 분류된 학문 분야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관련된 도전에 따라서 배열하려는 계획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어떻게 하면 지식을 이용하여 내적인 필요를 채울 수 있을지에 관해서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다. 지혜를 전수하기 위해서 학교를 처음 세운 것도, 책을 의술에 비유한 것도, 수사학과 반복의 가치를 깨달은 것도 바로 그들이었다.

 

현대의 대학과 달리, 종교는 그 가르침을 특정한 시기(청년기의 몇 년간), 특정한 공간(캠퍼스), 단일한 형식(강의)에만 제한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고 느낄 수 있는 피조물임을 자각하믕로써, 종교가 우리의 정신을 흔들어놓기 위해서 자원을 모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5. 자애

가장 넓은 의미에서 보면, 마리아 숭배는 어른이 된 우리의 판단력과 책임과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유년 시절의 필요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성인 사회에서는 이런 갈망이 대부분 언급되지 않고 지나가버리게 마련이지만, 갈망을 소생시키고 합법화했다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업적이다. 기독교의 마리아, 고대 이집트의 이시스, 그리스의 데메테르, 로마의 비너스, 그리고 중국의 관음보살 등은 모두 우리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자애를 찾아서 되돌아가는 추억의 통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무신론은 종교가 그 자신의 동기를 애써 회피하고 있다고 공격한다. 마리아 숭배라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유년기의 갈망에 대한 미화된 대응에 불과하지만 종교는 이런 사실을 선뜻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유년기의 필요를 부정하는 것이다. 

 

성숙함이란 우선 유아기와 적절하게 타협해야만 찾아오는 것이며, 어른치고 어린이처럼 위로 받기를 종종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의존성을 인정하는 힘이야말로 도덕적이고 영적인 건강의 지표라고 설명한다. 

 

가톨릭의 사례는 그런 시기에 예술과 건축이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대개는 어떤 성당, 미술관, 또는 다른 숭고한 장소의 조용하고 어둑한 후미진 곳에서 자녀를 자애롭게 돌아보는 부모의 얼굴 이미지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각자의 안에 숨어 있는 어떤 원초적인 필요가 반응하고 어떤 균형이 회복되었음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6. 비관주의

기독교는 그 역사의 상당 부분에서 현세의 존재가 가진 더 어두운 측면을 강조해왔다. 프랑스의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혹독한 비관주의를 드러낸 인물로서 유난히 눈에 띈다. 1658년 부터 1662년에 걸쳐 집필한 <팡세>에서 파스칼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비정상저이고, 불쌍하고, 무가치한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행복이란 환상일 뿐이라고(“세계의 무익함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자체가 아주 무익한 것이다”), 오히려 슬픔이야말로 표준이라고(“만약 우리의 상태가 참으로 행복하다면, 굳이 행복말고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망상이라고(“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공허하고도 불결한가”), 우리는 무익한 도잇에 성미가 급하다고(“우리가 하찮은 것에 위안을 받는 까닭은, 우리가 하찮은 것에 분노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 중에서도 가장 강한 사람조차 우리를 내습하는 무수한 질병 앞에서는 결국 무력한 상태가 된다고(“파리는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몸을 파먹을 수 있다”), 모든 지상의 제도는 부패했다고, 우리는 자기 중요성으 과대평가하는 터무니없는 경향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상황에서 뭔가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상황의 절망적인 사실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라고 파스칼은 주장한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데에서 시작된다.”

 

파스칼의 이런 어조를 고려한다면, 그의 저서는 위안이 되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며,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하다. 만약 파스칼의 비관주의가 효과적으로 우리를 위안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때때로 부정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 때문에 우울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사건과 좌절된 야심과 상심과 질투와 불안과 죽음의 공격 앞에서 좌절하고 있다. 종교의 시대에 산다는 한 가지 이점이 있었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이 지상에 행복이 영원히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약속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비관주의자들의 경우,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뛰어난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어떤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법이 없으므로, 가끔 어두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소한 성공에도 깜짝 놀라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현대의 세속적 낙관주의자들은 지상 낙원의 건설에 바쁜 나머지,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신비스러운 현상들을 대부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현명하게도 종교는 우리가 본래적으로 결함을 가진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지속적인 행복을 얻지도 못하고, 난처한 성적 욕구에 휩싸이고, 지위에 집착하고, 끔찍한 사고에 노출될 위험이 있으며,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통곡의 벽은 재난은 어디에나 있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다시 심어주고, 현대 문화가 뜻하지 않게 만들어낸 명랑한 가설을 확실히 고쳐 쓰는 역할을 한다.

 

아무런 해결책도 제공되지 않고, 고통도 끝나지 않지만, 다만 우리의 고통과 탄식 속에서 어느 누구도 혼자가 아니라는 기본적인, 하지만 무한히 위안이 되는 공개 시인만이 있을 것이다.

7. 관점

무신론자에게 가장 위안이 되는 구약성서의 내용은 바로 욥기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책은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지 하는 테마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욥의 관심을 자연의 거대함과 다양함 쪽으로 돌림으로써, 그가 더이상 자신의 삶에서 벌어진 사건에만 사로잡히지 못하게 한다. 욥은 자신을 능가하는 규모를 상기하고, 우주의 연대와 크기와 신비를 깨닫는다. 즉 하느님은 회중에게 영원의 작동 방식에 비하면 인간의 재난이란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가를 느끼게 함으로써, 이제는 욥도,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삶에서 일어나게 마련인 이해 불가능하고 도덕적으로 모호한 비극을 좀더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스피노자는 구름 속에 살면서 산꼭대기에서 추종자를 향해서 말씀하는 의인화된 지고의 존재에 대한 관념을 매우 싫어했다. 그에게는 “하느님”이라는 것이 단지 우주를 창조한 힘, 제 1원인, 또는 철학자들이 좋아하는 용어에 따르면 카우사 수이, 즉 자기 원인을 가리키는 학술 용어에 불과했다. 

 

철학적 구성물인 이 하느님은 스피노자에게 상당한 위안을 주었다. 좌절과 재난의 순간에는 우주적 관점을 차용하고, 또는 상황을 다시 상상해보라고 권한다.  그의 유명한 시적인 조어에 따르면 ‘수브 스페키에 아에트르니타티스’, 즉 영원의 견지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당대의 새로운 기술에, 그중에서도 특히 망원경에, 그리고 그 도구에서 비롯된 다른 행성에 관한 지식에 매료된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상상력을 이용하여 자기 자신에게 벗어나는, 그리고 우리의 의지를 우주의 법칙에 종속시키는 연습을 권했다. 비록 이런 일이 우리의 의도와는 반대 쪽에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욥에게 한 충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다. 거부된 중요성을 계속 고집함으로써 우리의 굴욕을 극복하려고 시도하느니보다 차라리 우리의 본질적인 무가치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초월하는 어떤 상징이며, 또한 우리의 하찮음에 대한 인식을 이용한 교육이다. 밀턴의 <실락원> 중에서도 특히 울림이 큰 한 구절(“광포한 불의 홍수와 돌풍…”)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한다. 우리보다 더 크고 더 연륜이 많고, 더 뛰어난 누군가에 의해서 우리가 지금의 자리에 놓였다는 것은 결코, 우리에게 굴욕이 아니다. 이렇게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삶에 대한 과도하게 희망적인 우리의 야심으로부터 구제받을 수 있다. 

 

이런 재평가의 과정이 무신론자와 신앙인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통의 접근점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욥기와 스피노자의 <에티카> 양쪽 모두에 언급되어 있는 인간 본성의 한 요소를 통해서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한 요소란 바로 별이다. 세속적인 사람이 구제의 경외감을 경험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는 바로 별을 관찰함으로써 찾아오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서 별을 해석하는 임무를 공식적으로 담당하고 있는 과학자들은 그 주제의 치유적인 중요성을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근시안적이다. 천문학이 지혜의 원천이 될 수 있다거나, 또는 고통의 훌륭한 개선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고려하지는 않았다.

 

과학이 우리에게 중요한 까닭은 우리가 세계의 일부분을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결코 정통할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좌절, 우리의 상심, 우리에게 전화하지 않은 사람을 향한 우리의 증오, 우리를 스쳐 지나간 기회에 대한 우리의 미련 같은 것들을 그런 우주의 이미지와 비교함으로써 위안을 얻을 수 있다. 

 

8. 미술

일부 무신론자들의 경우, 그들이 종교를 포기할 때에 부딪히는 가장 어려운 측면들 중 하나는 교회 미술을, 그리고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아름다움과 정서를 모두 포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미술관이 우리의 새로운 교회가 되어왔다는 것을. 미술관 역시 교회와 마찬가지로 비할 데 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다. 더구나 미술관에서 보내는 시간은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시간과 똑같은 심리적 위안을 준다. 미술관은 대학과 마찬가지로 그 잠재 능력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미술관이 위탁받은 귀중한 물건들을 다루는 방식 때문이다. 미술관은 참으로 중요한 물건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런 물건들을 영혼의 필요와 적절하게 연결시키는 역량까지는 갖추지 못한 듯하다. 

 

현대의 미술관이 생소하기는 하지만, 막상 답변하기에는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근본적인 질문은 이렇다. 왜 미술이 중요해야 하는가? 우리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면, 바로 미술 작품(특히 종교에 뿌리를 둔 미술 작품)을 종교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현대의 미술관은 방문객이 한때 신성하게 모시던 물건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위안과 인도를 간구하는 장소는 결코 아니다. 여러 나라에서는 미술관을 보란 듯이 새롭고도 세속적인 환경 속에 지어놓고, 종교 미술 작품에서 신학적인 맥락을 제거해버린다(그것이야말로 그 작품의 제작자의 바람과는 반대이겠지만). 

 

1792년에 프랑스에 혁명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가가 가톨릭 교회와 공식적으로 단절되자, 불과 사흘 만에 프랑스 최초의 국립 미술관이 루브르 궁전에 설립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곧 루브르의 전시실마다 프랑스 가톨릭 교회에서 약탈한 물건들이, 나중에는 나폴레옹의 원정에 의해서 유럽 전역의 수도원과 교회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쌓이게 되었다. 

 

루브르의 한 중세 전시실에는 <성모와 성자>라는 제목의 작은 조각상이 있는데, 1789년에 생 드니 성당에서 약탈한 것이다. 이 미술관에 들어오기 전의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이 조각상 앞에 무릎을 꿇고, 성모 마리아의 동정과 평온으로부터 힘을 얻었다. 하지만 설명과 카탈로그 항목만 가지고 판단하면, 현대의 루브르의 관점에서 우리가 실제로 그 조각상에 대해서 해야 할 일은 그 작품을 이해하는 것뿐이다. 즉 그 조각상은 은도금이 되어 있으며, 성모 마리아가 한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수정으로 만든 붓꽃이고, 이 작품이야말로 14세기 전반기 파리에서 유행한 금속 공예의 전형이며, 이 조각상의 전체적인 모양은 <자애의 성모>라는 비잔틴 작품에서 유래한 것이고, 그리고 13세기 말에 토스카나의 장인들이 처음 개발한 반투명의 얕은 돋을새김 법랑 세공품 가운데 프랑스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등이다. 불행히도 미술 작품이 주로 구체적인 정보의 저장고로서만 우리 앞에 제시될 경우, 열성적인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술 작품에 대한 관심을 금세 잃어버릴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미술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우리에게 아무런 의구심도 남겨놓지 않는다. 미술은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한 하나의 매체일 뿐이다. 미술이란 우리가 사랑해야 하고 고마워해야 하는 것에 관한, 그리고 우리가 멀어져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에 관한 기억을 강제로 불러일으키는 메커니즘이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미술을 “관념의 심미적인 표상”이라고 정의했다. 즉 미술은 일반 언어와 마찬가지로 개념을 전달하는 일을 담당한다. 다만 미술은 우리의 감각과 이성을 모두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점, 또 이런 이중의 전달 방식이 놀랄 만큼 효율적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우리에게 미술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잘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체만이 아니라 정신을 가진 피조물이며, 따라서 미술은 우리의 무기력한 상상력을 자극해야 하고, 우리에게 철학적 설명으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우리는 친절하고 용서하고 지비로워야 한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지만, 평소에는 이런 형용사의 의미를 깡그리 쉽게 잊어버리기도 한다.

 

기독교는 미술에 교육적, 치유적 임무를 부여하는 것을 결코 어색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기독교 미술은 선전의 역할을 상당히 담당했다. 14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로마에는 교수대에까지 사형수들을 따라가서 그들의 눈앞에 타볼레테를 보여주는 일을 담당하는 단체가 있었다. 타볼레테란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대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나, 성모와 성자의 그림)이 있는 작은 판자이다. 이런 그림이 사형수에게는 마지막 순간에 위안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런 중요한 생각들 중에서도 기독교에서 가장 의미가 큰 것은 바로 고통의 개념이다. 1천 년 이상이나 기독교 미술가들은 가령 손바닥에 크고 녹슨 못이 박히고, 채찍을 맞은 옆구리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어깨에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 때문에 다리마저 부러져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는 것이 과연 어떤 기분인지를 우리가 느끼게 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쏟았다. 그들의 목적은 이런 고통의 묘사에서 잔인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묘사는 다만 도덕적이고 심리적인 발달을 의도하고, 우리의 결속감과 동정의 힘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의도한 것이다. 

 

그리스도 이야기가 지닌 위력은 그리스도가 어제껏 세상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고통속에서 죽었다는 주장으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그는 질병과 슬픔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향해서,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은 단지 그들만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를 제공한 것이었다. 비록 고통 자체를 면제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흔치 않은 형벌이 왜 나에게만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패배감만큼은 면제해줄 수 있었다. 

 

기독교 미술은, 이미지의 중요한 기능들 가운데 하나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동정심이라는 그 섬세한 특성은 우리 자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낯선 사람의 경험에서 우리 자신을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낯선 사람의 고통을 우리 자신의 고통처럼 처절하게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타인을 아기로 그릴 경우에도 이와 유사한 동일시의 순간이 나타날 수 있다. 기독교 미술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장면 바로 옆에 가장 흔히 배치되는 것이 그의 유아기 모습이라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의 유아기의 순수함과 귀여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생애 마지막과 참으로 대조적이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자는 아기 예수의 이미지는 우리가 다른 모든 인간을 마치 아기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야 한다는 그의 권고를 무의식적으로 강화시킨다. 우리의 적 역시 한때는 아기였으며, 나쁜 사람이 아니라 돌봐주어야 하는 대상에 불과했다. 기껏해야 키가 50센티미터밖에는 안 되고, 우유와 파우더 냄새를 풍기며, 엎드려서 새근새근 잠자는 아기였던 것이다. 

 

우리의 타고난 상상력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 미술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의 기준에서 훌륭한 미술가란 일상의 생활이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리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릴 위기에 있는 중요한 도덕적, 심리적 진실들에 생명력을 주는 사람이다. 기독교 미술가는 자신의 기술적 재능(빛과 구성과 색채의 자유로운 사용, 물질과 매체에 대한 숙련된 이해)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에게서 적절한 윤리적 반응을 이끌어내고, 그리하여 우리의 눈이 우리의 마음을 훈련시키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임무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온갖 종류의 시각적인 상투성이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유명한 권고가 있다. 이런 말을 그저 기계적으로 반복할 경우에는 그 의미가 완전히 상실된다.

 

미술도 역시 그렇다. 가장 극적인 장면을 묘사한 경우에도 재능이나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따분한 작품이 될 뿐이다. 기독교 미술의 역사는 위대한 옛 진리를 향해서 천재들이 감행한 공격의 줄기찬 파도로 이루어져왔다. 그들은 성모 마리아의 겸손, 요셉의 성실, 예수의 용기, 또는 유대인 권력자들의 가학성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감상자를 다시 놀라게 할 수 있고, 개심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미술은 악을 계속 새로운 형태로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악의 위력을 감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미술가들은 미덕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서, 우리의 냉소주의와 염세주의의 두터운 벽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약간씩 닮아가고 싶은 개인에 대한 묘사를 내놓기 위해서 지칠 줄 모르고 노력해왔다. 

 

기독교는 미술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임무가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데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미술이 미덕과 악덕을 묘사함으로써, 중요한 것(그러나 우리가 잊기 잘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어야 한다는 임무가 바로 그것이다.

 

미술이 우리에게 중요한 관념을 상기시키는 메커니즘으로 기능할 수 있는 모델은 구상 미술의 영역을 넘어서 추상 미술로 충분히 연장된다. 우리는 리처드 세라의 단단한 강철판들로부터 용기나 힘 같은 미덕들이 방출되는 것을 감지한다. 애그니스 마틴의 회화에 나타나는 형태의 기하학 속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늘 필요한 냉정에 대해서 기억할 수 있다. 바버라 헵워스가 나무와 끈을 가지고 만든 조각에는 훌륭한 삶에서 긴장이 담당하는 역할에 관한 시가 숨어 있다. 

 

불교는 우리가 추상적 창조물을 묵상하는 동안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에 고나한 구체적인 질문을 받을 때, 추상적 창조물에 대한 우리의 반응의 강도를 높일 수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했다. 가령 복잡한 만달라 패턴을 다룰 경우, 우리는 의미의 범위를 좁히는 동시에, 그 미술 작품은 불교학에서 묘사된 우주의 조화에 대한 감각적인 표상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의 미술관은 대개 “19세기”와 “북이탈리아 화파”와 같은 표제 아래 전시실을 배치하는데, 이는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이 교육받은 학문적 전통이 반영된 결과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배치는 미술관 관람객의 내적인 필요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을 “19세기의 미국 소설”이나 “카롤링거 시대의 시”로 구분하는 학문적 분류를 따른 것이라고 해야 한다. 

 

보다 유익한 목록 시스템이 있다면, 우리의 영혼의 관심사에 따라서 장르와 시대를 초월하여 미술 작품들을 한데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는 단순성의 아름다움을 상기시키는 전시실(그곳에는 샤르댕과 최석환의 그림이 있을 것이다), 자연의 치유 효과에 대한 전시실(코로, 호베마, 비어슈타트, 원강), 아웃사이더의 존엄에 대한 전시실(프리드리히, 호퍼, 스타키), 또는 어머니의 양육의 편안함에 관한 전시실(헵워스, 카샛) 등이 있을 것이다. 이 미술관을 걸어다니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잘 잊어버리는,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중에서도 가장 본질적이고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는 중요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만나는 경험이 될 것이다. 

 

이런 평가 작업에서 영감을 얻으려면, 베네치아의 한 교구 교회인 산타 마리에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건물에는 서로 다른 세기와 지역의 조각상, 회화, 금속공예, 장식 창문 등을 한데 모아놓았는데, 왜냐하면 미술품을 만든 사람의 출신과 기법 성향의 이로간성보다는 오히려 미술이 우리 영혼에 미치는 영향력의 일관성에 더욱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건은 우리의 미술관을 위한 어젠다를 다시 작성해서, 미술이 일찍이 여러 세기 동안 신학의 필요를 따랐던 것처럼 이제는 심리학의 필요를 따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9. 건축

건축물의 외관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향해서 우리는 단호히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을 너무 쉽게 수용하는 것은 어리석고, 희생이 크고, 궁극적으로 위험한 일이다. 자칫하다가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불행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법률에 의하면 부동산 개발은 개인 사업의 일종에 불과하다. 사법 체계는 통행인의 감수성을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현대 세계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확실히 ‘프로테스탄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 전반기에 북유럽에서 처음 등장했을 때에만 해도, 프로테스탄티즘은 시각예술에 대해서 극도로 적대감을 드러냈고, 복잡하고 풍부하게 장식된 건물을 빌미로 삼아 가톨릭 교도를 비판했다. 머지않아 가톨릭도 대응에 나섰다. 1563년의 트렌트 종교회의 이후에 교황청에서 발표한 교령에서는, 프로테스탄트의 불경건한 주장과 반대로, 대성당과 조각상과 그림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세부사항을 기억하고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관습을 가르치고 습득시키는” 임무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성스러운 건축은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사의 진리를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건축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가톨릭은 인간의 행동 방식에 대한 핵심(슬프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을 지적했다. 우리는 주위의 사물에 대한 고조된 감성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다는, 다시 말해서 우리의 눈길이 머무는 모든 것을 인식하고 거기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 역시 이런 약점을 인식했지만, 항상 못 본 체하거나 무관심한 체하는 쪽을 더 선택했다.

 

가톨릭이 아름다움을 존경하게 된 근거는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자 플로티노스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간다. 3세기에 살았던 이 철학자는 아름다움과 선의 명백한 연관 관계에 대해서 논증했다. 플로티노스가 보기에는 주위 환경의 성격이 중요했다. 아름다움은 사랑, 신뢰, 지성, 자비, 정의 같은 미덕을 암시하고, 우리를 거기에 계속 머무르게 할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선의 물질적인 버전이었다.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만약 우리가 아름다운 꽃이나 기둥이나 의자에 대해서 공부한다면, 우리는 그런 대상 속에서 어떤 특성들을, 곧 도덕적 성질과 직접 비교되고, 우리의 눈을 통해서 들어와서 마음 속에서 이런 자질들을 강화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특성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나아가서 플로티노스의 주장은 우리가 추함을 얼마만큼 진지하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강조하는 데에 기여했다. 추함은 단순히 불운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사악함의 부분집합으로 다시 범주화되었다. 추한 건물은 윤리적 수준에서 우리에게 불쾌함을 준다는 것이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건물에 대해서도 잔인하다, 냉소적이다, 자기만족적이다, 감상적이다 따위의 표현을 묘사할 수 있었다. 나아가서 우리는 나쁜 의도를 가진 지인으로부터 악영향을 받을 위험이 있는 것처럼 건물로부터도 악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하느님이 부재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윤리적인 믿음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런 믿음은 여전히 견실하고 축하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존경하는, 그러나 종종 너무 쉽게 간과하는 그런 믿음들은 어떤 것이라도 그 자체의 신전을 세울 만큼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봄의 신전이나 자비의 신전이 될 수도 있으며, 고요함의 신전이나 반성의 신전이 될 수도 있고, 용서의 신전이나 자각의 신전이 될 수도 있다. 

 

신이 없는 신전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종교는 이런 건물의 외관에 관해서 통일적인 규범을 내놓으려고 노력했다. 중세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대성당은, 십자형의 평면도에 동서의 축이 있고, 회중석 서쪽 끝에는 세례를 위한 수조가 있고, 동쪽 끝에는 제단과 지성소가 있어야 했다. 오늘날까지도 동남아시아의 불교도들은 자신들의 건축적인 에너지를 오직 파라솔과 둥근 테라스가 있는 반구형의 스투파를 세우는 데에 투입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세속 신전의 경우에는 굳이 이런 표준적인 법규를 따를 필요가 없다. 이 신전의 유일한 공통 요소는 영혼의 안위를 위한 핵심적인 미덕을 장려하려는 우리의 노력이다. 

 

관점의 신전

관점의 신전이라는 새로운 시설도 결국에는 과학박물관이나 천문대 같은 곳에서 탐구하는 것과 똑같은 아이디어를 다루게 될 것이다. 벽은 고생물학 및 지질학의 관심사로 장식되고, 천장과 바닥은 천문학 기구로 장식될 것이다. 관점의 신전은 과학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규모와 나이와 복잡성에 대해서 우리를 깨우치는 것이 목적이다. 과학박물관의 경우와는 달리, 관점의 신전은 우리에게 기초적인 과학교육을 시키는 것이 그런 훈련의 핵심인 것처럼 굳이 가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성의 신전

반성의 신전은 고독의 시간에 어울리는 구조를 제공할 것이다. 이곳은 단순한 공간이 될 것이고, 방문객에게는 한두 개의 걸상, 창밖의 경치, 평소에는 자신이 억압하려고 했던 곤란한 주제 몇 가지를 해명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제공될 것이다. 현대에 건립될 반성의 신전은 이런 철학을 따르고, 관조할 수 있는 이상적이고도 확신을 심어주는 환경을 창조할 것이다. 

 

수호신의 신전

나폴리 남부 해안에 있던 영들은 특히 우울증을 완화시키고, 율리아 에쿠에스트리스 식민지(오늘날 제네바 호반에 있는 도시 니옹)의 수호신은 정치와 상업 생활에서 변덕스러운 운명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특별히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종교 건축의 배후에 있는 목적을 우리가 부활시키고 지속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육신을 지닌 신격에게 바친 성묘를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중요한 감정과 추상적 테마를 위해서 고안된 세속 신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의 기독교 마을의 하늘에 높이 솟은 성당의 첨탑이 그랬던 것처럼, 이런 신전들은 우리의 희망을 일깨우는 기능을 담당할 것이다. 

10. 제도

 

1) 책과 제도

18세기에 회의주의자들과 무신론자들이 종교를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주로 사용한 매체는 책이었다. 이 회의주의자들은 종교에 대해서 신랄하고 흥미진진한 비판자였지만, 정작 자신들과 적들의 근본적인 차이를 직시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들의 적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위해서 굳이 책의 출간에 거의 의존하지 않았다는 점이 바로 그 차이였다. 그들의 적들은 대신 제도를 선택했다. 즉 막대한 인원을 동원하고 배치시킨 다음, 미술과 건축과 학교와 제복과 말씀과 의식과 기념비와 달력 등을 통해서 일사분란하게 활동했던 것이었다. 

 

<국가>에서 플라톤은 외로운 지식인의 한계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감동적인 이해를 보여주었다. 즉 그는 철학자가 군주, 이른바 철인군주가 되기 전까지는 이 세계가 바로잡힐 수 없으리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무엇인가를 변화시키고 싶은 사람이라면, 단지 책을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속의 지식인은 19세기 이후로 낭만주의 덕분에 제도의 비대함과 경직성을, 그리고 제도의 부패 성향과 변변치 않은 능력에 대한 묵인을 조롱하는 법을 배웠다. 지식인의 이상은 어떤 제도의 속박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 돈을 혐오하는 사람, 실생활과 동떨어진 사람, 그리고 대차대조표를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에 은근히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다. 

 

오늘날에도 우리 내면의 삶에서 세속 사상가들보다는 성서의 예언자들이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경향이 있다면 어째서일까? 그 이유 가운데 상당 부분은 세속 사상가들이 제도의 구조물(영혼에 관련된 자신들의 생각을 더 많은 청중에게 유포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을 줄곧 탐탁찮게 생각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제도로서의 종교가 주는 기본적인 교훈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규모의 중요성, 그리고 돈과 지능과 지위를 적절하게 모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해관계의 중요성이다. 낭만주의가 영웅 한 사람의 성취를 예찬했던 반면, 종교는 개인 혼자서 활동할 경우에는 불가능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잘 보여준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프리드리히 니체의 경력을 살펴보자. 아퀴나스의 평정심 가운데 상당 부분은 그가 머물던 곳들, 곧 그가 교수로 재직했던 파리 대학, 그리고 훗날 그가 설립을 도왔던 나폴리의 신학대학 등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관대했던 분위기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서 니체는 자신이 (그의 말 그대로) “보금자리마다 추적을 당해 쫓겨난 야생동물”처럼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그의 평생 목표(철학과 음악과 미술 등을 축으로 삼은 세속 이데올로기로 기독교 도덕을 대체하는 것)는 19세기의 독일 학계에서 환영받지 못했으며, 결국 이 철학자는 유목민처럼 이리저리 떠돌아야 했다. 

 

가톨릭의 쿠라 아니마룸, 즉 “영혼 돌보기”라고 하는 일에 마음이 끌리기는 하지만, 이러한 돌보기를 종교적인 방식으로 실행할 수는 없는 사람들의 경우, 결국에는 여러 가지 한계(응집력이 강한 동료 조직망의 결여, 넉넉한 수입의 결여, 그리고 안정적이고 위신이 높은 직업 체계의 결여)로 인해서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비록 니체가 오늘날 생존했더라도 그가 적당한 일자리를 얻기는 곤란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런 문제의 뿌리가 얼마나 깊이 박혀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될 것이다.

 

제도의 또 한 가지 유용한 특징은 공통된 시각적 어휘를 통해서 그 구성원의 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종교와 상업적 기업의 전략은 서로 겹친다. 기독교가 우리의 현대 기업들이 전문으로 하는 것과 똑같은 “브랜딩” 기법을 차용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반대로 종교가 이미 개척해놓은 정체성에 관한 교훈을 오늘날의 기업들이 열심히 따라 하고 있다.

 

브랜드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일관성을 촉진하는 것이다. 브랜딩의 적은 공간적 다양성이다. 최소한 그런 점에서 맥도날드는 가톨릭 교회와 상당히 비슷한 데가 있다. 우리의 필수품 가운데서도 가장 하찮은 것들(샴푸와 모이스쳐 로션, 파스타 소스와 선글라스 등)을 위해서는 최상급 브랜드가 대기하고 있는 반면, 우리의 본질적인 필요를 위해서는 외로운 개인의 비조직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관심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현대 세계의 이상하고 유감스러운 특징이다. 

 

품질관리의 실제 효과를 보여주는 설득력 있는 사례를 찾는다면, 정신분석학이라는 이름의 파편화되고 고도로 변화무쌍한 분야와 가톨릭 신앙의 고백성사라는 이름의 우아하게 이루어지는 의식을 비교하면 된다. 고백성사는 20세기 중반에 소비재의 규범이 된, 신뢰할 만한 전 세계적 서비스 산업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백실의 위치에서부터 사제의 어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명시적인 규범에 의해서 결정되며, 덕분에 멜버른에서 앵커리지에 이르는 세계 각지의 가톨릭 교도는 영혼을 속죄하기 위한 시험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오늘날의 심리치료만 해도 장소의 일관성이라든지, 얼핏 보기에는 작지만 실제로는 중요한 세부사항들, 치료사의 전화 자동응답기의 안내 문구, 치료사의 옷 취향, 상담실의 외관에 대해서 아무런 기준 같은 것도 없이 시행되고 있다. 결국 환자들은 예기치 못한 공간적 특수한 상황(치료사의 자녀나 애완동물에서부터 콸콸거리는 배관이나 골동품 가구에 이르기까지)을 견뎌야 한다. 

 

상당수의 기업에서는 일단 자사의 정체성을 성공적이라고 규정하고 나면, 비즈니스 저술가들이 “브랜드 확장”이라고 지칭하는 일에 뛰어들게 된다. 심리학자 매슬로의 유명한 욕구 피라미드의 정점을 이야기할 수 있을텐데, 현대 기업은 그 전문 역량을 여기에까지 적용하지는 못한다. 자기실현이나 학습이나 사랑이나 내적 성장을 향한 우리의 열망은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 

 

지적 운동 역시 이처럼 안타깝게도 브랜드 확장의 시도를 기피해왔다. 지적 운동은 자신의 사상이 물질 영역의 서비스와 상품을 보완해주는 유사품 서비스와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했다. 기독교, 유대교, 불교는 인류의 구원에 관한 위대한 사상을 오히려 저급한 물질적 행위, 즉 주말 휴가, 라디오 방송국, 식당, 박물관, 강연장, 의류업체 등의 운영 등과 연관시키는 데에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오직 종교들만이 적절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실에 따르면, 어떤 사상이 우리에게 제대로 각인되기 위해서는 책과 강연과 신문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입고, 먹고, 노래하고, 집을 장식하고, 목욕할 때에 사용하는 것들에도 그 사상의 반향이 남아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에게 각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과 종교의 활동은 상품화의 형태로 묘사될 수 있다. 상품화란 공급도 불안정하고, 의미도 불분명한 상품을 유명하고, 인지도가 높고, 재고가 충분하고, 홍보가 잘 되는 실체로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우리에게 제대가 필요한 까닭은, 우리가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감정들을 마음속에 간지학고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세속 세계, 특히 낭만주의적인 세계에서는 상품화가 상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다양성의 상실, 특성의 상실, 그리고 자발성의 상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품화는 드물지만 존재의 연약함을 확인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돕는다. 종교적 믿음이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우정, 공동체, 감사, 초월 같은 개념들과의 규칙적이고 전례적인 만남이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우리 영혼의 가장 잘 잊어버리고, 가장 깨닫지 못하는 부분을 마음에 새길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철학자가 군주, 즉 철인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권력과 사상의 연합은 모든 주요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우리는 각 종교의 이데올로기에 반드시 수긍하지 않고서도 그런 결합을 존중하고 배울 수 있다. 

 

2) 오귀스트 콩트

19세기 프랑스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는 과학의 발견에 의해서 미래의 세계에서 똑똑한 사람은 그 누구도 하느님을 믿지는 않으리라는, 특유의 투박한 관찰로부터 발전되었다. 세속 사회는 오직 부의 축적, 과학적 발견, 대중오락, 낭만적 사랑에만 전념할 것이며(즉 윤리적 교육, 위안, 초월적 경이, 또는 결속의 원천을 완전히 결여한 사회가 될 것이며) 결국에는 견디기 어려운 사회적 병리 현상에 시달리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콩트의 해결책은 전통에서 보다 타당하고 합리적인 측면을 찾아내서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 성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 즉 수십 년에 걸친 사고의 결과이며, 콩트의 지적 업적 중 최고라고 할 만한 것이 바로 새로운 종교였다. 이것은 이것은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였으며, 콩트의 말 그대로 ‘인류의 종교’였다. 콩트는 이 새로운 종교를 두 권의 책 <보편 종교에 관한 요약 설명>과 <인간의 미래에 관한 이론>에서 설명했다. 콩트는 여러 종교의 역사를 면밀히 연구했으며, 따라서 그의 새 종교는 옛 종교에서 가져온 최상의 내용들로 대부분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는 특히 가톨릭에서 많은 것을 가져왔다. 유대교, 불교, 이슬람교의 신학에서도 시험 삼아 몇 가지를 가져오기도 했다. 

 

콩트는 무엇보다도 현대의 무신론자가 노출하고 있는 위험한 것들을 억제하기 위해서 애썼다. 그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경쟁적, 개인주의적 충동을 심화시키는 한편, 사람들을 공동체, 전통, 자연과의 공감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고 믿었다. 그는 발생 단계에 있는 매스미디어가 감수성을 악화시키고, 자기 반성과 은둔과 독창적인 사고의 기회를 봉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낭만주의 숭배를 비난했으니, 전통적인 가족 관계에 너무나 큰 긴장을 주며, 사랑에 대해서 잘못되고 이기적인 이해를 조장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콩트는 세속 학교와 대학이 새로운 영혼의 교육자가 될 수 있으리라고, 그리하여 학생들에게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윤리적 교훈을 전수해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자본주의가 결국에 호기심이 많고 정서적으로 균형을 갖춘 노동력보다는 오히려 숙련되고, 순종적이고, 자기 반성이 없는 노동력을 선택하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새로운 종교에 대한 콩트의 계획은 우선 막대한 숫자의 새로운 사제직을 창설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직위의 명칭을 똑같았지만, 이 사제들은 가톨릭 교회의 사제들과 전혀 달랐다. 그들은 결혼하고, 공동체 속에 잘 통합되고, 전적으로 세속적이며, 철학자와 저술가로서의 능력과 오늘날 우리가 심리요법사라고 부르는 직종의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동료 시민의 행복 능력과 도덕 관념을 드높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직장과 애정 문제에서 시련을 겪는 사람들과 치료 목적의 대화를 나누고, 세속적 설교를 행하고, 전문용어를 배제한 쉬운 철학 논문을 저술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사제직은 남을 도우려는 강한 열망과 문화적, 미적관심을 소유한 사람들, 그러나 대학에서 일거리를 찾지 못해서 좌절하고 신문에 글을 쓰거나 무관심한 대중에게 책을 팔아서 불안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콩트는 신앙의 요구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건축이 담당한 역할을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에, 세속 교회(또는 그의 말 그대로 인류를 위한 교회)의 네트워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설립 비용은 은행가들이 지불해야 했다. 이런 세속 교회의 건물 정면에는 감사의 뜻으로 그 은행가 겸 시혜자의 흉상을 세워놓고 내부의 넓은 홀에는 이 새로운 종교의 세속 성인들의 초상화가 전시된 만신전을 만들 계획이었다. 세속 성인들은 키케로, 페리클레스, 셰익스피어, 괴테 등이었다. 서쪽을 향한 무대에는 콩트의 믿음을 요약한 경구가 적혀 있을 것이었다. “너 자신을 앎으로써 너 자신을 향상시키라.”

 

유감스럽게도 콩트는 무신론자와 신자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일반 대중으로부터는 완전히 무시되고, 신문으로부터도 조롱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트가 남긴 유산이라면, 세속 사회에도 그 나름의 제도가 필요하다는 그의 인식을 들 수 있다. 즉 종교의 자리를 대신하여 인류의 필요(정치, 가정, 문화, 직장 등이 이미 담당했던 범위를 넘어서는 것들)에 부응하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3) 결론

종교가 쇠퇴함으로써 충족되지 못한 필요 가운데 일부를 재검토하려고 할 때에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새로움이다. 대부분의 종교에는 여러 세기 동안 우리 곁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점이 된다. 

 

이 책의 목적은 우리가 종교에서 부활시킬 수 있는 교훈들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이었다. 공동체의 감각을 살리는 방법, 친절을 권장하는 방법, 광고의 상업적 가치에 대한 현재의 편견을 없애는 방법, 세속 성인을 선정하여 이용하는 방법, 대학의 전략과 문화 교육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을 재고하는 방법, 호텔과 온천을 다시 설계하는 방법, 우리의 유치한 필요를 인지함으로써 생기는 이익에 대한 설명, 우리의 비생산적인 낙관주의 가운데 일부를 굴복시키는 방법, 숭고한 것과 초월적인 것을 통해서 자신의 관점을 확보하는 방법, 박물관을 재조직하는 방법, 건축을 이용해서 의미를 만드는 방법 등이 그런 교훈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혼을 돌보는 데에 관심이 있는 개인들의 분산된 노력을 한 곳에 모아서, 제도의 보호 아래에서 체계화하는 방법이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주장의 핵심은, 현대인이 겪는 여러 가지 문제는 기존 종교가 제시해온 해결책에 의해서 성공적인 대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종교는 매우 유용하고, 효과적이고, 지적이기 때문에 신앙인들만의 전유물로 남겨두기에는 너무 귀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