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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거리

 

런던 - 바르셀로나

 

런던

런던 거리

 

알랭 드 보통이 에세이를 썼던 히드로공항에 도착했다. 터미널이 5개나 존재하고 항공량은 인천공항보다 많은 세계 2위 수준의 공항이다. 하지만 삐걱거리는 에스컬레이터와 어수선한 내부는 인천공항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민영화가 반드시 좋은 성과만을 기대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런던은 바르셀로나로 환승하기 위한 24시간을 체류한다.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지하철을 찾는다. 공항 바로 근처에 런던 시내를 향하는 지하철이 있다. 지하철은 작다. 앉은 좌석을 제외하고는 좌석 앞에 서서 탑승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지하철 소음이 심하다. 요금도 비싸다. 6파운드로 1시간을 이동하니 피카델리 서커스역에 도착한다.

 

많은 사람들, 우중충한 궂은 날씨, 내리는 빗방울이 지하철을 탈출한 사람들을 반긴다. 극장을 홍보하는 거리의 네온사인은 아름답다. 역사를 보여주는 건축물을 휘감은 네온사인은 빛으로 장식한 카페의 내부를 외부로 옮겨놓은 듯 아름답다. 소란스럽고 축축한 거리와 즐겁고 들뜬 분위기의 사람들은 대비된다. 런던의 펍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술자리에 함께 한 이유로 술에 취한 듯한 느낌을 받는 것처럼 펍은 주위의 사람들을 유쾌하게 한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영국이라는 장소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역사가들은 18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넓은 시골을 감상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대니얼 디포는 1720년대에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황량하고 무시무시하다”고 묘사했다. 존슨 박사는 스코틀랜드 서부 여행기에서 스코틀랜드의 고원이 “거칠고”, 처량할 정도로 “식물 장식”이 없으며, “가망 없는 황량함만 넓게 뻗어 있다”고 썼다. 당시 여행을 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해외로 갔다.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로마, 나폴리와 그 주변 시골이 가장 인기 있는 목적지였다. 휘슬러 이전에는 아무도 런던의 안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알랭 드 보통이 설명했듯이 많은 역사가에게 런던은 흥미로운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예술가들이 영국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소개해주었다. 1727년 시인 제임스 톰슨은 잉글랜드 남부의 농촌 생활과 풍경을 예찬하는 <사계>를 발표했다. 이 시가 성공을 거두면서 스티븐 덕, 로버트 번즈, 존 클레어 등 다른 “농경 시인”의 작품도 각광을 받게 되었다. 리처드 윌슨은 트위크넘 근처에서 템스 강을 그렸고, 토머스 헌은 구드리치 성을 묘사했으며, 필립 드 루테르부르는 틴턴 사원을 그렸고, 토마스 스미스는 더웬트워터와 윈더미어를 화폭에 담았다. 

 

런던의 한 카페

 

사실 예술 혼자서는 열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 또 예술은 예술가들에게만 있는 독특한 정서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단지 열광에 기여하고, 우리가 이전에는 모호하게만 또는 성급하게만 경험한 감정들을 좀더 의식하도록 안내할 뿐이다. 사실 예술가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은 영국에 살면서 각자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삶을 영위했다.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을 독점하지 않고 아름다움의 다양한 시각을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우리 주변의 아름다움에 주목하기를 추천한다.

 

킨키부츠

알랭 드 보통은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 우리에게 예술이 필요한 이유를 우리가 잘 잊어버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신체만이 아니라 정신을 가진 피조물이며, 따라서 미술은 우리의 무기력한 상상력을 자극해야 하고, 우리에게 철학적 설명으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우리는 친절하고 용서하고 자비로워야 한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지만, 평소에는 이런 형용사의 의미를 깡그리 쉽게 잊어버리기도 한다.

 

킨키부츠는 영국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이다. 재정난으로 어려움에 처한 구두 공장을 되살려야 하는 주인공과 여장을 좋아하고 게이바에서 일하는 게이 로라가 우정을 키우며 구두 공장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다. 인물설정을 보면 주인공인 아들은 맡고 싶지 않았던 구두 공장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하고 로라와 만나게 되면서 편견을 극복해 나간다. 로라는 자신의 선택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성찰해 나가고 자아를 찾는 여정을 통해 성숙해진다. 킨키부츠는 유쾌하고 즐겁다. 배역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문가로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선율을 그린다. 무대 연출이나 오케스트라, 조명, 극본을 통해 영화에서 보여줄 수 없었던 라이브의 감동을 보여준다.

 

알랭 드 보통은 <영혼의 미술관>에서 무엇이 훌륭한 예술인가라는 주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작품의 명성과 개인의 영혼을 움직이는 힘 사이에 놓인 간극을 한 번쯤은 경험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걸작이 여러 면에서 우리의 내적 필요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관련된 개념들은 저절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 개념들은 후원, 이데올로기, 돈, 교육이 뒤얽힌 복잡한 체계에 대학교육과 박물관의 지원사격이 더해진 결과이며, 이 모든 것이 예술작품의 무엇이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좌우한다.”

 

매튜 아놀드는 <교양과 무질서> 에서 이렇게 말한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 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다. 아널드는 이런 태도의 핵심을 이루는 선언으로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한다. 예술은 ”삶의 비평“이다.

 

킨키부츠의 두 주인공은 다른 의미로 사회에서 소외받는 존재이다. 구두 공장의 주인공은 자본주의의 노예이고, 게이바에서 일하는 로라는 사회에서 소외받는 성소수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의 주인공은 1) 우리와 비슷하지만 우리보다 뛰어날 것 2) 덕과 정의에 있어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되지 않더라도 상당한 명망을 누리고 있을 것 3) 주인공의 운명은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뀔 것이어야 하지만 그 원인이 악덕이나 사악이 아니라 어떤 과오에 있을 것을 규정했다. 아쉽지만 킨키부츠는 비극이 아닌 희극일뿐더러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따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뮤지컬 킨키부츠는 좋은 작품이었다고 느꼈다. 사회에서 가장 소외받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을 수 있는 공연을 기획했다는 용기 하나로 찬사와 격려를 보내고 싶다. 

 

히드로공항과 패럴림픽

히드로공항 입국장 패스트 트랙을 거치면 영국 홍보 영상을 볼 수 있다. 텔레비전을 통해 상영되는 영상 속에는 영국이 외국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랑할 만한 내용이 담겨있다. 조정, 럭비,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존 스노우, 군인, 연극, 스포츠 등이 상영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스포츠에서 장애인 농구와 패럴림픽 운동 종목 영상이었다. 짧은 순간의 영상이지만 영국이 추구하는 수준 높은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하계올림픽, 동계올림픽, 월드컵 등 수 많은 국제행사를 치렀지만 얼마나 소외된 사람들의 노력에 관심을 기울였을까. 세상에서 가장 소외되고 약한 사람일지라도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다.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공동체의 소외된 사람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치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킨키부츠의 주인공인 여장 게이 로라와 패럴림픽 스포츠는 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이야기한 영국의 열린사회를 잘 보여준다. 포용력과 조금 다르더라도 개성을 존중하는 문화를 반영한다. 비록 브렉시트는 영국의 현재를 잘 보여주지만 영국이 추구했던 가치는 충분히 본 받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