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꼼수와 비키니녀 그리고 페미니즘
당신은 전차 기관사이고, 시속 100킬로미터로 철로를 질주한다고 가정해보자. 저 앞에 인부 다섯 명이 작업 도구를 들고 철로에 서 있다. 전차를 멈추려 했지만 불가능하다.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속도로 들이받으면 인부들이 모두 죽고 만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 생각이 옳다고 가정하자) 절박한 심정이 된다. (첫째) 이때 오른쪽에 있는 비상 철로가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도 인부가 있지만, 한 명이다. 전차를 비상 철로로 돌리면 인부 한 사람이 죽는 대신 다섯 사람이 살 수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둘째) 이제 다른 전차 이야기를 해보자. 당신은 기관사가 아니라, 철로를 바라보며 다리 위에 서 있는 구경꾼이다 (이번에는 비상 철로가 없다). 저 아래 철로로 전차가 들어오고, 철로 끝에 인부 다섯 명이 있다. 이번에도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전차가 인부 다섯 명을 들이받기 직전이다. 피할 수 없는 재앙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다가 문득 당신 옆에 서 있는 덩치가 산만 한 남자를 발견한다. 당신은 그 사람을 밀어 전차가 들어오는 철로를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면 남자는 죽겠지만 인부 다섯 명은 목숨을 건질 것이다 (당신이 직접 철로로 몸을 던질까도 생각했지만, 전차를 멈추기에는 몸집이 너무 작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중에서 |
어떤 행위가 윤리적일까?
첫번째 질문에서 많은 사람들은 다섯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전차를 비상철로로 돌릴 것을 주장할 것입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섯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기에 어떻게 보면 합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반면 두번째 질문에서 많은 사람들은 한 사람의 생명을 철로로 밀어 다섯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행위를 반대할 것입니다. 한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철로 바깥으로 미는 것은 살인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두 경우 모두 행위의 결과는 한 사람의 생명이 희생됨으로 인해 다섯 사람의 생명을 구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첫번째 경우와 두번째 경우를 상반되게 인식합니다. 이렇게 상반되게 인식하는데에는 사람의 '동기'라는 가치가 숨어 있습니다. 이 '동기'는 사람을 목적으로 놓느냐, 수단으로 놓느냐에 따라 '선한 동기'도 되고 '나쁜 동기'도 됩니다. 첫번째 경우처럼 다섯 사람을 구하기위해(목적) 비상 철로로 돌리면 '선한 동기'가 되지만, 두번째 경우처럼 한 사람을 희생함으로(수단) 다섯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믿게 되면 '나쁜 동기'가 됩니다.
이 목적은 결국 도덕이 의무감에서 행동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도덕의 최고원칙인 의무의 필수 조건을 3가지 대조적인 용어로 밝힙니다.
대조 1 (도덕) : 의무 대 끌림 대조 2 (자유) : 자율 대 타율 대조 3 (이성) : 정언명령 대 가언명령 |
나꼼수와 나꼼수 비키니녀
나는 꼼수다에서는 정봉주 전 의원의 석방을 위해 '정봉주 국민운동본부'를 창설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꼼수다 방송에서 '정봉주 국민운동본부'를 통한 이색시위를 선전하기에 이릅니다. 이 이색시위의 내용이 바로 비키니 응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논란이 이어졌고 삼국카페에서는 공동성명서를 내기에 이릅니다.
칸트가 이야기한 도덕의 최고 원칙으로 빗대어 이야기 하자면 이 비키니녀는 첫째 (도덕)에서 끌림이 아닌 '의무'로써 행했으며, 둘째 (자유)에서 타율이 아닌 '자율'로 이야기했습니다. 다만 셋째 (이성)에서 어떤 행동이 다른 것의 수단으로만 바람직한 '가언명령'이라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정언명령'은 조건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성을 가진 존중을 받아야 하는 '사람'을 수단으로 하는 노출시위는 칸트의 관점에서는 윤리적이지 않습니다.
윤리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노출시위를 비롯한 다양한 여성의 정치표현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이는 전통적인 관점으로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비윤리적인 동성애를 거부하는 이들이 동성애자들의 행복을 존중하기 위해 동성애를 지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소수자와 피억압자의 권리요구는 사회의 안정을 저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삼국카페의 공동성명서에는 이러한 윤리적인 관점이 투영돼 있습니다. 여성을 목적으로 보지 않고 수단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분노했고 성명을 내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는 윤리적이지 않으며 나꼼수 진행자 및 우리 사회가 더 많은 논쟁을 통해 해결방법을 모색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여성인권'에 관한 부분은 조금 더 큰 관점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성해방주의(페미니즘)
우크라이나 여성 노출 시위
'슬럿워크', 우리나라 여성 노출 시위
메리 울스톤크래프트의 '여성권리의 옹호'가 출판되기 전까지는 페미니즘은 암흑기였습니다. 페미니즘은 여성 참정권운동까지의 '제1차 여성해방주의 물결'과 1960년대 '제2차 여성해방주의 물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의 주요 주제는 첫째, 사회가 성적, 육체적 불평등에 의해 특징지워진다는 점, 둘째, 이러한 남성권력의 구조는 전복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페미니즘은 세 가지 대조적인 전통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1차 여성해방주의 물결'에서는 '자유주의 여성해방주의'와 '사회주의 여성해방주의'로 나누어 볼 수 있고, '제2차 여성해방주의 물결'은 '급진적 여성해방주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메리 울스톤크래프트와 베티 프리던과 같은 '자유주의 여성해방주의자'는 '공적'영역의 개혁인 여성의 법적·정치적 위상을 강화하고, 여성의 교육적·직업적 전망을 향상시키는 데 관심을 둡니다.
둘째, '사회주의 여성해방주의'는 전형적으로 여성종속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사이의 연결을 부각시키고 여성이 가지는 경제적 중요성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셋째, '급진적 여성해방주의'는 제2차 여성해방주의의 독특한 정취인 관습적이고 정치적인 교리에 뿌리를 두지 않는 여성해방주의 비판으로 발생합니다. 이는 성적 구분이 사회에서 가장 근본적이며,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분열이라고 믿습니다.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과거와 현재의 모든 사회는 가부장제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여성인권일까?
미국의 여성학자 거다 러너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차이 그 자체가 아니라 차이를 열등성으로 만드는 데서 악이 창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어준 총수의 생물학적 완성도 발언은 이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꼼수다 진행자 및 미권스 회원들이 사람, 특히 여성을 수단으로 보고 발언을 한 부분은 분명히 '윤리적'으로 비판 받을만 합니다. 하지만 '여성인권'을 놓고 비판을 가한다면 이들은 억울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은 '차이'를 '열등성'으로 만들지 않았고 오히려 '우등성'으로 만들어 남성의 성차별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카페의 비판은 나는 꼼수다에 분명 좋은 약이 될 것입니다. 삼국카페가 나는 꼼수다를 더이상 지지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꼼수다는 삼국카페가 이야기하는 여성인권에 대해 무한한 신뢰와 지지를 보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삼국카페가 이야기한 여성인권의 보다 절실함을 이야기하는 여성학자 케이트 밀렛의 이야기를 끝으로 글을 마칠까 합니다.
"가부장제는 인구의 1/2인 여성이 인구의 1/2인 남성에 의해 통제되는 제도이다."